각 시대의 대쟁투 – 32일

20 장 — 종교적 대각성

세계적 사명

재림이 가까웠다는 선포와 함께 종교적 대각성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 요한계시록 14장의 첫째 천사의 기별에 예언되어 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계 14:6, 7).

한 천사가 이와 같은 경고를 전달하는 자가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그 의미가 깊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하늘의 사자의 순결과 영광과 능력을 통하여 그 기별로 말미암아 성취된 사업의 고상한 특성과 그 사업에 수반될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셨다. 또 한 천사가 공중에 날며 “큰 음성으로” 경고하되,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파하는 것은 이 운동의 신속성과 세계적인 범위를 분명히 알려준다.

그 기별 자체는 그 운동이 일어날 시기에 대하여 빛을 비추어준다. 그 기별은 “영원한 복음”의 일부분이며, 그것은 심판의 시작을 알려준다. 각 시대에 구원의 기별은 전파되어 왔다. 그러나 이 기별은 오직 말세에만 전해질 복음 기별의 일부분이다. 왜냐하면 심판의 때는 말세가 되어야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언은 심판의 때가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사건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날 것을 말하고 있다. 특별히 다니엘서가 그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나 말세에 관련된 예언의 일부로서 다니엘은 그것을 간수하고 “마지막 때까지” (단 12:4) 봉함하여 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때가 이르기 전에는 그 모든 예언의 성취에 기초를 둔 심판에 관한 기별은 하나도 선포될 수 없었다. 그러나 선지자 다니엘은 마지막 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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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그 당시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말라고 교회에 경고하였다. 그는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 (살후 2:3) 라고 말하였다. 큰 배도와 장기간에 걸친 “불법의 사람”의 전성시대가 그친 다음에야 비로소 주님의 재림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불법의 비밀”, 멸망의 아들, “불법한 자”라는 칭호를 가진 “불법의 사람”은 예언에 기록된 바와 같이 1260년 동안 최상권 (最上權) 을 잡은 법왕권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1260년의 기간은 서기 1798년에 마쳤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 기간 이전에 있을 수 없었다. 바울은 1798년까지의 신약시대 전체를 그의 경고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별은 그 이후에 선포될 것이었다.

이런 기별은 과거에 전파된 일이 전혀 없다. 또한 바울도 그런 기별을 전한 일이 없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형제들에게 주님의 재림이 먼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개혁자들도 그 기별을 전하지 아니하였다. 마틴 루터도 심판은 그 당시부터 약 300년 후에 있을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798년 이후로 다니엘서가 개봉되고, 예언의 지식은 증가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심판이 가까웠다는 엄숙한 기별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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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위대한 종교 개혁처럼 재림운동도 각 그리스도교국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믿음이 독실하고 기도의 생애를 사는 사람들이 예언을 연구하고,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하는 중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세계 각처에 있는 개별적인 그리스도교 단체들이 제각기 성경 연구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큰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요셉 볼프의 소년 시대

1821년, 밀러가 심판의 때를 가리키는 예언의 해석을 한 지 3년 후에 “세계의 선교사”라고 불리는 요셉 볼프가 주님의 재림이 절박함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볼프는 히브리인의 혈통을 받은 사람으로서 독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의 랍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는 매우 어렸을 때에, 그의 집에 경건한 히브리 사람들이 모여서 유대 민족의 희망과 기대와 오실 메시야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하는 대화들을 부지런히, 그리고 열렬한 마음으로 듣게 되었다. 어느 날 나사렛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분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는 “매우 재간 있는 한 유대인이었는데, 자칭 메시야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유대의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그는 다시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유가 무엇이며, 우리가 자유를 잃은 백성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슬프다, 슬프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선지자를 죽였기 때문이다”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자 그 소년의 마음에는 갑자기 “아마 예수님도 한 선지자였는데 유대인들이 죄 없는 그분을 죽였나보다” (Travels and Adventures of the Rev.Joseph Wolff, vol.1, p.6)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 너무나 깊었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 교회에 출입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교회의 주위를 배회하면서 설교를 듣고자 하였다.

그가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 자기의 이웃에 사는 연로한 그리스도인에게 장차 메시야가 나타나게 되면 이스라엘이 승리를 얻을 것이라고 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친절하게 말하였다. “사랑하는 아이야, 누가 참 메시야인지 내가 일러 주마. 너희 조상들이 옛적의 선지자들에게 한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은 나사렛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시다. …집에 돌아가서 이사야서 53장을 읽어 보아라. 그리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Travels and Adventures of the Rev.Joseph Wolff, vol.1, p.7). 즉시 그에게 강한 확신이 생겼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그 성경 말씀을 읽어 보고, 그것이 너무도 정확하게 나사렛 예수님에게서 성취된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말이 참말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께 그 예언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주 무서운 표정으로 잠자코 있었으므로 다시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일은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더욱더 알아보고 싶은 욕망을 일으켰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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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들어온 때부터 외방 전도에 나서기까지

그가 얻고자 하는 지식을 이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일부러 그에게서 차단시켰다. 그러나 그는 열한 살 때에 자기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세상으로 나가 스스로의 힘으로 교육을 받는 한편 자기의 신앙과 평생의 사업을 택하게 되었다. 그는 한 때 친척의 집에서 지냈으나 오래지 아니하여 배교자로서 축출당하였다. 그는 주머니에 돈 한 푼 없는 고독한 신세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살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각처로 돌아다니면서도 부지런히 공부를 계속하였고, 히브리어를 가르쳐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한 가톨릭 교사의 감화를 받아 로마교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어 자기의 동족을 위하여 선교사가 되고자 목적을 세웠다. 몇 년 후에 그는 그 목적을 가지고 공부하고자 로마에 있는 프로파간다 대학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독자적인 사상과 솔직한 말 때문에 이단자란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교회의 여러 가지 잘못을 공격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비록 처음에는 법왕교의 고승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나 얼마 후에는 로마에서 퇴거당하였다. 그는 교회의 감시 아래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녔다. 마침내, 그를 로마의 속박 밑에 복종시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연해졌다. 그는 마침내 교정 불가능자라는 선고를 받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도록 방임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개신교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공회 (聖公會) 에 가입하였다. 2년간의 연구를 마친 다음 1821년에 그는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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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초림의 위대한 진리를 받아들인 한편, 예언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권능으로 재림하실 것도 분명히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동족들에게 나사렛 예수님이 바로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알려 주고, 그분의 초림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희생제물로서 겸비하게 되신 것임을 지적해 주는 한편 그분께서 왕으로, 또한 구원자로 재림하실 것을 가르쳤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참된 메시야이신 나사렛 예수님, 손과 발이 찔리셨고, 사지로 끌려가는 어린양 같으셨던 그분, 슬픔에 처한 자요 질고를 아는 자이셨던 그분, 홀이 유다를 떠나가고 법을 세우는 권세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난 후에 초림하셨던 그분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천사장의 나팔과 함께 재림하실 것이다” (Joseph Wolff, Researches and Missionary Labors, p.6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 서시고, 창세 후에 일단 아담이 맡았으나 잃어버린 그 통치권을 (창 1:26, 3:17) 다시 받으시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온 땅의 왕이 되실 것이다. 피조물의 슬퍼하고 탄식하는 소리는 그치고, 찬미와 감사의 노래만이 들리게 될 것이다. …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에…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살전 4:16; 고전 15:23).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첫째 부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때에 동물계는 그 본성이 변하고 (사 2:6~9), 예수님께 순복할 것이다 (시편 8편). 세계적 평화가 오게 될 것이다” (Journal of the Rev.378, 379). “주님께서는 세상을 다시 보시고, ‘심히 좋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Journal of the Rev.Joseph Wolff, p.294).

볼프와 재림문제

볼프는 재림이 박두하였다는 사실을 믿었다. 예언적 기간에 대한 그의 해석에 의하면, 그 위대한 소원이 성취되는 날은 밀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불과 몇 년밖에 안 남았다.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라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재림의 임박성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볼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과연 그날과 그 때를 결코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가? 주님께서는 마치 무화과나무의 잎사귀가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는 (마 24:32) 것처럼 우리에게 재림의 절박함을 알려 주기 위하여 때의 징조들을 주시지 아니하셨는가?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다니엘서를 읽고 그것을 이해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그 기간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인가? 그리고 다니엘서에서는 ‘마지막 때까지…이 글을 봉함하라’ (그것은 그의 시대를 가리킴) 고 하였고, 그 때에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시대를 관찰하고 생각하게 하는 히브리어의 한 표현 방법) ‘지식이 (시대에 관한) 더하리라’ (단 12:4) 고 기록되어 있지 않는가? 더욱이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결코 때가 가까움을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고 다만 정확한 ‘그날과 그때를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한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재림을 준비하도록 때의 징조를 알 수 있게 하시고자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Wolff, Researches and Mis-sionary Labor, pp.404, 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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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대한 통속적인 해석방법과 잘못 해석하는 폐단에 대하여 볼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대부분은 성경의 분명한 의미에서 벗어나서 불교도들의 환영적 (幻影的) 인 체계로 돌아섰다. 불교도들은 인류의 미래의 행복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것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말을 읽으면 이방인을 이해해야 하고, 예루살렘이라고 하면 교회로 해석한다. 또 지상 (地上) 이라고 하면 공중 (空中) 으로 알고 주님의 재림이라고 하면 각 전도 사업 단체의 발전으로 알고, 여호와의 집, 산에 오른다고 하면 감리교인들의 큰 총회처럼 해석한다” (Journal of the Rev.Joseph Wolff, p.96).

볼프의 모험적 선교 활동

1821년부터 1845년까지 24년간 볼프는 넓은 범위에 걸쳐 여행하였다. 그는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아비시니아, 아시아의 팔레스틴, 시리아, 페르샤, 보카라, 인도 등의 여러 나라를 순력 (巡歷) 하였다. 그리고 그는 북미 합중국도 방문하였는데, 지나는 길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전도하였다. 그는 1837년 8월에 뉴욕 시에 도착하여 그 도시에서 설교하였다. 그 후에 다시 필라델피아 시와 볼티모어 시에서 설교하고, 마지막으로 워싱턴 시에까지 갔다. 거기서 그는 말하였다. “한 의회에서 전 대통령 존 퀸시 애덤즈 씨가 제의한 동의에 의하여 내가 국회 의사당에서 강연을 하도록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 토요일에 전체 의원과 버지니아의 감독과 성직자들과 워싱턴 시민들이 참석한 데서 강연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와 같은 영광은 뉴저지 주와 펜실베이니아 주에서도 나에게 주어졌는데, 거기서 나는 아시아에서 한 나의 연구에 대하여 이야기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 통치에 대하여 말하였다” (Journal of the Rev.Joseph Wolff, pp.398,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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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 박사는 유럽의 어떤 권위의 보호도 받지 않고 많은 고난과 온갖 위험을 당하면서 대부분의 야만 나라들을 두루 다녔다. 그는 매를 맞기도 하고, 주리기도 하고, 노예로 팔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 번이나 사형 선고를 받았다. 도적들에게 포위당한 일도 있었고, 기갈로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또 한 번은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을 모두 빼앗기고, 걸어서 산을 넘어 수백 마일을 갈 수밖에 없었는데, 얼굴에 눈을 맞으면서 얼음으로 덮인 땅을 맨발로 걸었기 때문에 발이 감각을 잃게 된 일도 있었다.

야만인과 호전적인 종족들에게 무장을 하지 않고 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게 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무장하였다. 기도와 그리스도에 대한 열심과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신뢰로써 무장하였다.” 그는 “나는 또한 마음에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손에는 성경을 가지고 있다” (W.H.D.Adams, In Perils Oft, p.192) 고 말하였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히브리어와 영어 성경을 가지고 갔다. 그 후에 그가 여행한 한 가지 경험에 대하여 말하였다. “나는 성경을 펴 들었는데, 책 속에 힘이 있어서 그것이 나를 붙들어 주는 것 같았다” (W.H.D.Adams, In Perils Oft, p.201).

이와 같이 그는 심판의 기별이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상의 대부분에 전파되기까지 그의 활동을 중지하지 않았다. 유대인, 터키인 배화교도 (拜火敎徒), 힌두교도, 그 밖의 여러 종족과 민족 사이에서 그는 그 지방들의 언어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오래지 아니하여 메시야의 왕국이 건설될 것을 전파하였다.

서부 아시아 지역의 편력

그는 보카라를 여행하던 중에 어떤 유벽 (幽僻) 한 지방에 사는 한 부락민이 재림의 교리를 믿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예멘에 있는 아라비아 인들은 세에라 (Seera) 라고 하는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께서 영광중에 통치하실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1840년에 큰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기하고 있었다” (Journal of the Rev.Joseph Wolff, p.377). “나는 예멘에서 레갑의 후손들과 함께 6일간을 지냈다. 그들은 술도 마시지 않고 포도원도 재배하지 않고 곡식도 심지 않았다. 그들은 천막에 살며, 레갑의 아들 선한 여호나답을 기억한다. 나는 또한 이 족속 중에 메시야께서 속히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기를 레갑의 자손과 함께 고대하고 있는 단 족속인 이스라엘인의 후손이 있음을 보았다” (Journal of the Rev.Joseph Wolff,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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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다른 선교사는 그와 비슷한 신앙을 가진 자가 타타르 (Tatary) 지방에도 있음을 발견하였다. 타타르의 한 승려는 그 선교사에게 그리스도께서 어느 때쯤 재림하실 것이냐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그 선교사는 그 일에 대하여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하였더니 그 승려는 성경을 가르치노라고 공언하는 사람이 그 사건을 모른다는 것에 대하여 크게 놀라움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는 예언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1844년경에 재림하시리라는 자신의 소신을 말하였다.

영국에서의 재림운동

일찍이 영국에서는 1826년에 재림기별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곳의 운동은 미국과 같이 그렇게 분명한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재림의 정확한 시일은 일반적으로 그처럼 가르쳐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미구에 임하신다는 큰 진리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 진리는 다만 비국교도 (非國敎徒) 사이에서만 전파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저술가 무란트 브로크는 약 700명의 영국 국교회 성직자들도 이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연합하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1844년을 재림의 때라고 알려 주는 기별도 대영 제국에서 전파되었다. 미국에서 건너온 재림에 대한 간행물들이 널리 배포되었으며, 영국에서도 많은 서적과 잡지들을 재발행하였다. 그리고 1842년에는 미국에서 재림 신앙을 받아들인 로버트 윈터라는 영국인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주님의 재림을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업에 연합하였으며, 심판에 관한 기별이 영국 각처에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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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미개한 채 로마교의 정략 (政略) 에 사로잡혀 있던 남미주에도 한 스페인인이며 예수회 회원인 라쿤자라는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경고를 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사명감을 느꼈으나 로마교의 견책이 두려워서 자기의 이름을 랍비벤 에스라라고 고쳐서 마치 개종한 유대인인 것처럼 꾸며 가지고 자기의 견해를 출판하였다. 라쿤자는 18세기의 사람이었으나 그의 저서가 런던으로 가서 영어로 번역되기는 1825년경의 일이었다. 이 책의 발행은 영국에 있어서 이미 재림문제에 눈을 뜬 사람들의 관심을 깊게 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독일에서의 벵겔의 활동

독일에서는 18세기에 루터 교회의 한 목사요 성경학자요 평론가로 유명한 벵겔이라는 사람이 이 교리를 가르쳤다. 벵겔은 학업을 마치고 신학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그가 받은 초기의 교육과 훈련은 그의 마음에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엄숙한 생각과 종교적 기질을 깊게 하고 강하게 하였다. 그도 역시 고금을 막론하고 사고력 (思考力) 이 많은 다른 청년들처럼 종교적 의문과 어려운 문제들로 인하여 번민하였는데, 그는 감개무량한 가운데 “자기의 가련한 마음을 꿰뚫고 그 젊은 감정을 못 견디게 만들었던 허다한 화살들에 대하여 말하였다.” 비텐베르크의 종교 법원 (宗敎法院) 의 일원이 되자 그는 종교 자유를 부르짖었다. “그는 교회의 권리와 특권을 주장하는 한편, 양심을 위하여 교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누릴 온갖 자유를 위하는 옹호자가 되었다” (Encyclo-pedia Britannica, 9th ed., art.“Bengel”). 그와 같은 방침에서 나온 훌륭한 결과가 오늘날에도 그의 고향에 남아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진리가 벵겔의 마음에 확신을 준 것은 그가 강림절 (降臨節) 의 일요일에 사용할 설교의 준비를 위하여 요한계시록 21장을 연구하던 때이었다. 그는 이때에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을 과거 어느 때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그 예언에 나타난 광경이 너무도 중대하고 영광스럽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한동안 그 문제에 대한 명상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강단에서 설교를 하게 되자 그 생각은 다시 생생하게, 또한 능력 있게 그에게 나타났다. 그때부터 그는 예언서, 특히 요한계시록의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오래지 아니하여 그 예언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라고 확정한 연대는 그 후에 밀러가 주장한 연대와 비교하면 매우 근소한 차이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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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겔의 저서는 그리스도교국에 널리 전하여졌다. 예언에 관한 그의 견해는 그의 고향인 비텐베르크에서 일반적으로 잘 받아들여졌으며, 또한 독일의 다른 지방에도 전해졌다. 그리하여 그 운동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재림기별은 독일에서도 다른 나라들과 같은 시기에 전파되었다. 또한 초기의 신자들 중의 몇 사람이 러시아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이민단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그 나라의 독일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신앙을 존속시키고 있다.

프랑스와 스위스에서의 재림운동

빛은 프랑스와 스위스에도 비추어졌다. 일찍이 파렐과 칼빈이 종교개혁의 진리를 선포했던 제네바에서 가우센이 재림 기별을 전하였다. 학생시절에 가우센은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온 유럽을 휩쓸고 있던 합리주의 사상 (合理主義思想) 과 접촉한 적이 있으며, 그가 직접 전도에 종사하게 될 때에 그는 아직 참된 신앙을 알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회의론 (懷疑論) 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롤린이 저술한 “고대 역사”를 읽은 후, 그는 다니엘서 2장의 말씀을 주목하게 되었고, 그 사가 (史家) 가 기록한 그대로 성경의 예언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성취된 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실로 그것이 후년에 그가 위험 중에 처할 때 굳센 닻의 역할을 해주었고,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확신을 주었다. 드디어 그는 합리주의 사상에 만족할 수 없게 되었고, 성경을 연구함으로 더욱 분명한 빛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결국 적극적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예언을 연구하는 중에 주님의 재림이 절박하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위대한 진리의 엄숙하고 중대함을 절실히 느낀 그는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열망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다니엘의 예언은 오묘한 것이므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기 때문에 그의 사업은 큰 장애를 만났다. 그리하여 그는 일찍이 파렐이 제네바에서 전도할 때 사용한 방법, 곧 먼저 어린이들에게 전도하여 그들을 통하여 부모들에게 관심을 끌게 하는 방법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각 시대의 대쟁투 pp. 355-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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