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장 — 성경과 프랑스 혁명
성경에 대한 로마교의 방침
16세기에 이르러 종교 개혁자들은 열린 성경을 백성들에게 공개하며 이를 유럽 각국에 보급시키기를 희망하였다. 어떤 나라들은 그것을 하늘에서 온 사자로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어떤 나라들에서는 로마교가 성경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일에 큰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성경의 지식에 속한 빛과 그 고귀한 감화를 거의 받지 못하였다. 한 나라에는 빛이 들어왔지만 암흑으로 인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세기에 걸쳐 진리와 오류가 서로 지배권을 갖고자 다투었다. 마침내 악이 승리를 얻고, 하늘의 진리는 물러나게 되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그러므로 그 나라는 자신이 택한 행위의 결과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악을 제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멸시한 백성들로부터 떠나가 버렸다. 그리하여 악은 성숙해지기까지 방임되었다. 드디어 온 세계는 고의적으로 빛을 거절한 결과가 어떠함을 보게 되었다.
여러 세기 동안 프랑스에서 계속하여 온 성경에 대한 투쟁은 프랑스 혁명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처럼 무서운 혁명이 일어난 것은 로마교가 성경을 억압함으로 초래된 당연한 결과에 불과했다 (부록 19 참조). 그 혁명은 법왕권의 시책이 실천된 결과를 보여 주는 가장 현저한 실례이며, 일천여 년 이상 로마교의 교훈의 경향이 무엇이었음을 보여 주는 예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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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왕이 최상권을 쥐고 있는 동안에 성경이 금지될 것에 관하여 선지자들은 이미 예언하였다.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죄악의 사람”의 통치로 말미암아 특히 프랑스에서 일어날 무서운 결과를 또한 지적하고 있다.
주님의 천사는 말하였다.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곳이니라…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계 11:2~11).
여기에 기록된 “마흔두 달 동안” 혹은 “일천이백육십일”이란 말은 같은 기간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로마교의 압박을 받을 기간을 나타낸다. 법왕권이 최상권을 쥐게 된 일천이백육십 년은 서기 538년에 시작되어 1798년 마치게 된다. 그 때에 프랑스 군대가 로마에 침입하여 법왕을 사로잡았는데, 그는 유배중에 죽었다. 얼마 후에 새 법왕이 선출되었으나 로마의 교권 (敎權) 은 전과 같은 세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예언된 로마교의 활동 기간
교회의 박해는 일천이백육십 년의 전 기간 계속되지는 않았다.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극렬한 시련의 시기를 단축시키셨다. 구주께서는 교회에 임할 “큰 환난”에 대하여 예언하시면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시리라” (마 24:22) 고 말씀하셨다. 사실상 박해는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1798년이 이르기 전에 이미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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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는 두 증인에 대하여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계 11:4) 라고 하였다. 또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구약과 신약 성경을 대표한다. 구약과 신약은 다 같이 하나님의 율법의 기원과 영속성 (永續性) 을 알려 주는 중요한 증인들이다. 그 두 성경은 또한 구원의 계획을 증거해 준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표상과 희생 제도와 예언들은 모두 장차 올 구주를 지적해 준다. 그리고 신약의 사복음서와 편지서는 표상과 예언을 통하여 미리 알려 준 그대로 조금도 틀림없이 강림하신 구주를 증언하고 있다.
“저희가 일천이백육십일을 베옷을 입고 예언하리라.” 그 기간의 대부분에 하나님의 증인은 모호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법왕권은 진리의 말씀을 백성들로부터 숨기고 그들 앞에 그 증언과 배치되는 거짓 증인을 세우고자 애를 썼다 (부록 20 참조). 성경이 종교와 세속의 권세에 의하여 추방되었을 때, 성경의 증거가 곡해되고, 사람들과 악마들이 성경으로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자 온갖 연구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성경의 거룩한 진리를 대담하게 증거하는 사람들이 수색당하고, 배신당하고,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믿음 때문에 순교를 당하거나 깊은 산속과 땅속의 동굴에 도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 충성된 증인들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일천이백육십 년의 전 기간을 통하여 증거하였다. 그들은 그처럼 가장 어두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열성을 다한 충성된 사람들이다. 충성된 그 종들에게는 그 전 기간에 하나님의 진리를 선언할 지혜와 능력과 권위가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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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수난 시대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계 11:5).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는 자들은 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두려운 선고의 의미는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밝혀져 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22:18, 19).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셨거나 명령하신 것은 어떠한 식으로든지 변경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시고자 사람들에게 주신 경고이다. 그 엄숙한 선언은 하나님의 율법을 경시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고 경박하게 말하는 자들은 그 선고 앞에 떨고 두려워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보다도 자기 자신의 의견을 높이는 모든 자들, 자기의 편의를 도모하거나 세속과 타협하기 위하여 성경의 분명한 의미를 변개코자 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두려운 결과를 가져오는 자들이다. 기록된 말씀, 곧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인류의 품성을 저울질하고 그 그릇됨이 없는 시험에 의하여 부족함이 드러나는 모든 자들에게 정죄의 선고를 내리게 될 것이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 곧 두 증인이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해야 할 시기는 1798년에 마쳤다. 그 두 증인이 비밀리에 그들의 사업을 마쳐 갈 때에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으로 표상된 세력이 그들을 향하여 싸움을 하게 될 것이었다. 여러 세기 동안에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교회와 국가를 지배한 세력들은 법왕권을 매개체로 사용한 사단에 의하여 통제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단의 세력이 새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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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는 성경을 존중하노라고 공언하면서 일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그것을 가두어 버리고 숨겨버리는 일을 그들의 방침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로마교의 지배 아래 그 증인들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이제 또 하나의 다른 세력, 곧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여 공공연하게 싸우고자 일어났다.
그 증인들이 죽임을 당하여 그 시체가 거리에 놓여 있는 그 큰 성은 “영적으로” 애굽이었다. 성경의 역사에 기록된 모든 나라 가운데서 애굽처럼 대담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실존을 부인하고 그분의 명령을 거역한 나라는 없다. 또한 애굽의 왕처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노골적이고도 오만한 태도로 반항한 임금은 없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바로에게 기별을 보냈을 때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 5:2) 고 오만하게 말하였다. 그것은 무신론이다. 그러므로 애굽으로 표상된 나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명령을 부정하는 일에 애굽과 유사한 말을 하고, 애굽과 마찬가지의 불신과 반역 정신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또 “그 큰 성”은 “영적으로” 소돔에 비유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데 있어서의 소돔의 부패는 특별히 음란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이 성경의 기록을 성취시킬 나라의 뚜렷한 특성은 또한 소돔과 똑같은 죄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무신론 사상의 만연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1798년 조금 전에 어떤 극악한 성격의 세력이 일어나 성경을 대항하여 싸우게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두 증인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그 나라에서 바로의 무신론과 소돔의 음란이 나타날 것이었다.
이 예언은 프랑스의 역사에서 가장 정확하고 현저하게 성취되었다. 1793년 프랑스 혁명 당시에 “문명국에서 출생하여 교육을 받고, 유럽의 나라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나라를 통치하는 권리를 가진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에서 사람의 마음에 받아들인 가장 엄숙한 진리를 이구동성으로 부인하고 만장일치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예배를 부인하는 음성을 세계는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Sir Walter Scott, Life of Napopeon, vol.1, ch.17). “우주의 창조주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반역의 손을 든 국가로서 믿을 만한 기록을 남긴 나라는 세계에서 오직 프랑스뿐이다. 영국, 독일, 스페인,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계속해서 많이 존재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의회의 결의로써 무신론을 선언했고, 수도 (首都) 의 모든 인구와 그 밖의 모든 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남녀를 막론하고 그 결의를 수락하고, 기쁨으로 노래하며 춤을 춘 유일의 국가로서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Blackwood’s Magazine, November 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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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특히 소돔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던 특징을 드러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옛날의 평원 (平原) 의 도시들을 멸망시켰던 것과 똑같은 도덕적 타락과 부패가 편만했다. 그리고 역사가는 예언에 기록된 그대로 프랑스의 무신론과 음란한 상태를 기록해 놓았다. “종교에 영향을 끼친 법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결혼의 경시였다. 사람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계약이며 사회의 견고한 기초에 가장 강력한 역할을 하는 결혼 제도가 당사자 두 사람이 마음대로 결합하였다가 다시 헤어질 수 있는 일시적인 성격을 띤 단순한 민간 계약으로 전락해 버렸다. …악마들이 인류의 가정생활에 있어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고, 영구적인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파괴해 버리고, 그들이 목적한 해독을 대대로 영속시키고 성취하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한다면, 결혼 제도를 무너뜨리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묘한 말을 잘하기로 유명한 여배우 소피 아놀드 (Sophie Arnoult) 는 프랑스의 혁명 시대의 결혼을 ‘간음의 예식 (禮式) ’으로 평하였다” (Scott, vol.1, ch.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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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는 예언은 글자 그대로 프랑스에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 대한 적의 (敵意) 가 이 나라에서보다 더욱 현저히 나타난 나라는 없다. 진리를 이 나라에서보다 더욱 맹렬하고 잔혹하게 반대한 나라도 없다.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함으로 프랑스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프랑스의 위그노
성도의 피는 여러 세기에 걸쳐 흘렀다. 왈덴스교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위하여” 피에몽 산에서 그들의 생명을 버렸을 때, 프랑스에서는 그들의 형제인 알비젠스 (Albigens) 들이 진리에 대하여 동일한 증거를 하였다. 종교개혁 당시에 그 교도들은 참혹한 고문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왕과 귀족들과 상류 계급의 부인들과 연약한 처녀들과 그 나라의 교만한 사람들과 무사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용감한 위그노 (Huguenot) 들은 사람의 양심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권위를 옹호하기 위하여 싸움을 계속하고, 많은 치열한 전쟁터에서 피를 흘렸다. 개신교도들은 법률상 보호에서 제외된 자로 인정되어 그들의 머리에는 현상금이 붙게 되었고, 그들은 들짐승들처럼 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도인들 중의 소수의 후예들로서 18세기 당시까지 프랑스의 남방 산중에 숨어서 거주하고 있던 “광야 교회”는 여전히 조상들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밤을 틈타서 그들이 산중턱이나 적막한 들에서 몰래 집회를 열고자 할 때, 그들은 갑작스런 용기병 (龍騎兵) 들의 추격으로 붙잡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예나 죄수들이 노를 저어 다니는 갤리선 (galleys) 에서 죽는 날까지 고역을 당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순수하고, 기품 있고, 지성적인 사람들은 강도들과 살인자들 사이에 섞여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쇠사슬에 매여 있게 되었다 (Wylie, b.22, ch.6 참조). 좀 더 자비로운 처분을 받은 사람들은 아무런 무장도 없이 속절없는 형편에서 기도하고자 무릎을 꿇었을 때 참혹하게 사격을 당하였다. 수백 명의 나이 많은 남자들, 방비 없는 여자들, 천진한 어린이들이 그들의 집회 장소에서 살해되어 그대로 내버려졌다. 그들이 평소에 집회를 하던 산 중턱이나 산림 속을 지나갈 때 시체가 풀밭 사방에 흩어져 있거나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는 일은 별로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나라는 “검과 도끼와 나무 (화형에 쓰는 장작) 로써 황량하여졌고, 하나의 쓸쓸하고 큰 광야로 바뀌고 말았다.” “이처럼 흉악한 사건은…암흑시대에 행하여진 것이 아니라 루이 14세의 찬란한 시대에 자행되었다. 그 당시에 과학은 발달되고 문예가 부흥되고, 궁궐과 수도에 사는 성직자들은 유식하고 말 잘하는 변사들이며, 겸손과 자비의 미덕을 사랑하는 자들로 인정받고 있었다” (Wylie, b.22, ch.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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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의 참혹한 목록 가운데서 가장 암흑한 것, 곧 각 세기를 통하여 자행된 잔인무도한 일 중에서 가장 끔찍스런 만행은 성 바돌로매 제일 (祭日) 대학살이다. 세상은 오늘날도 여전히 그 잔인하고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습격의 광경을 공포와 전율로써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왕은 로마교의 승려와 주교들의 강요로 그 흉악한 행위를 묵인하였다. 그리하여 사방이 고요한 한밤중의 적막을 깨뜨리고 울려 퍼진 왕궁의 큰 종소리는 학살에 대한 신호가 되었다. 수천 명의 개신교도들은 왕의 명예를 건 약속만을 신뢰하고 각자의 집에서 평안히 자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끌려 나가 무참하게 살육을 당하였다.
성 바돌로매 제일 (祭日) 의 대학살
애굽의 속박에서 백성들을 구원해 내실 때에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지도자가 되셨던 것처럼 사단은 무수한 순교자를 내는 무서운 일에 있어서 그의 부하들을 지휘하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학살은 파리에서 7일간 계속되었는데, 최초의 3일간은 특히 광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그리고 그 일은 왕의 특명에 의하여 파리 시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신교도들이 거주하는 모든 도시와 촌락에까지 퍼져 나갔다. 그 일은 연령과 성별을 구별하지 않았다. 천진한 어린아이들과 백발노인도 가리지 않았다. 귀족과 농부, 노인과 청년, 어머니와 아이, 그 모든 사람들을 함께 살육하였다. 프랑스 전국에서 학살이 2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국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7만 명이나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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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보도가 로마에 이르자 성직자들의 기쁨은 한이 없었다. 로렌의 추기경은 그 사자에게 1천 크라운을 상급으로 주었고, 성 안젤로에서는 축포를 쏘았고, 모든 교회의 첨탑에서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축화 (祝火) 는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법왕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추기경과 중요한 승려들을 데리고 큰 행렬을 지어 성 루이의 교당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 로렌의 추기경이 테 데움 (Te Deum) 을 낭송했다. …또 이 학살을 기념하는 메달이 주조되었고, 바티칸 궁전에서는 바사리 (Vasari) 의 솜씨로 석 장의 벽화, 곧 제독 (提督) 을 습격하는 장면, 학살을 음모하는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왕, 실제로 학살을 하고 있는 장면들이 그려졌다. 그레고리우스 법왕은 카알 황제에게 황금 장미를 보냈으며,…그 학살 4개월 후에…그는 한 프랑스 신부의 설교를 만족한 마음으로 들었다. …그 신부는 그 학살의 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날에 가장 거룩한 신부 (神父) 가 무한한 행복과 기쁨으로 보고를 받으며, 그는 위엄을 갖추고 하나님과 성 루이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나아갔다.’” (Henry White, The Massacre of St.Bartholomew, ch.14, Par.34).
성 바돌로매 대학살을 하도록 충동한 바로 그 정신은 프랑스 혁명에도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기꾼으로 선언하고, 프랑스의 무신론자들은 소리를 높여 “염치 없는 자를 박멸하자”고 부르짖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었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대담한 모독과 가증한 악이 서로 손을 맞잡았으며, 가장 비루한 인물, 잔인하고 사악하기 더할나위 없는 자, 비인도적인 자들이 무한한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일에 있어서 사단에게 최고의 존경이 주어졌다. 그와 반면에 진리와 순결과 이타적 사랑으로 특징지어 있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프랑스 국민과 이성 (理性) 의 여신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이리라.” 프랑스 혁명과 공포 시대 동안에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던 무신론의 세력은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대하여 싸움을 벌였는데, 그것은 세계가 일찍이 목격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국회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그리고 성경을 모아다가 될 수 있는 대로 모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공중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하나님의 율법은 유린당하고 성경에 명시된 제도들은 폐지되었다. 매주의 휴일은 경시되어 버렸고 그 대신에 10일마다 휴식하되, 그날은 연락하고 모독적인 일을 하는 데 바쳐졌다. 침례식과 성찬 예식은 금지되었고, 묘지에는 눈에 띄게, 사망은 영원한 잠이라는 표지가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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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과는 전연 다르게 그것을 어리석음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자유와 국가를 예배하는 일 이외에는 모든 예배가 금지되었다. “파리의 한 주교는 국민의 대표들 앞에서 연출한 가장 건전치 못하고 추잡한 연극의 주역 배우로 출연하였다. …그는 맨 앞에 나와서 회중을 향하여 선언하기를 자기가 오늘날까지 여러 해 동안 가르쳐 온 것은 어느 점으로 보든지 한갓 종교적 책략이었고 역사나 거룩한 진리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는 정중하고 명백한 어조로 하나님의 실존을 부인하고,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헌신하여 왔으나 장래에는 자유와 평등과 도의를 숭배하는 일에 자신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하였다. 그는 자기가 차고 있는 주교의 장식물들을 떼어서 책상 위에 놓고, 그 회를 주최한 회장과 익살스러운 포옹을 하였다. 또 몇 사람의 배교한 신부들이 그 주교의 본을 따랐다” (Scott, vol.1, ch.17).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무신론의 프랑스는 하나님의 두 증인의 책망하는 소리를 침묵시켜 버렸다. 진리의 거룩한 말씀은 시체가 되어 그 길거리에 넘어져 있었고, 하나님의 제재와 요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기뻐 날뛰었다.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하늘의 왕을 모독하였다. 그들은 옛날의 죄인들처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시 73:11) 고 부르짖었다.
새로운 제도에 의하여 임명된 한 승려는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독적인 언사로 말하였다. “하나님이여, 만일 당신이 참으로 존재하면 당신의 훼손된 이름을 위하여 복수해 보라. 나는 당신께 도전한다. 당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구려. 당신은 감히 격노치 못하는군. 이제 후로 누가 당신의 존재를 믿겠는가?” (Lacretelle, History, vol.11.p.309; in Sir Archivald Alison, History of Europe, vol.1, ch.10). 그것은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들으리오 여호와는 나의 알 바 아니라”고 한 바로의 말이 그대로 반향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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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 14: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왜곡시키는 자들에 대하여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딤후 3:9) 고 말씀하신다. 프랑스는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 (사 57:15) 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거절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 소위 이성 (理性) 의 여신이라는 열등한 우상숭배로 전락하였는데, 방탕한 한 여자가 그 여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은 국민의 대표적 집회에서, 행정 및 입법의 최고의 권위에 의하여 결정되었던 것이다. 어느 역사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광란 (狂亂) 의 시대에 행한 의식 (儀式) 중의 하나는 허망한 일과 불경한 일을 혼합시킨 점에서 달리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음악대를 선두에 둔 도시의 관리들은 활짝 열린 의장 (議場) 의 문을 통하여 장중한 행렬을 지어 나와서 자유의 노래를 높이 부르면서 그들이 바야흐로 경배하려는 대상, 곧 그들이 이성의 여신이라고 부르는 면사포를 쓴 한 여자를 수행하였다. 그 행렬이 식장 안에 들어가자 이성의 여신은 면사포를 벗어 이것을 회장 (會長) 의 오른편에 두었다. 그 때에 여자는 오페라단의 한 무희로 밝혀졌다. …프랑스의 국민 의회는 그 여자를 그들이 숭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성이라고 하여 그에게 공적인 경배를 하였다.”
“이 불경건하고 어리석은 의식은 특수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이성의 여신의 제막식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혁명의 모든 세력에 공명한다는 뜻을 표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것을 재연하거나 모방해서 거행하였다” (Scott, vol.1, ch.17).
피에 취한 국민 의회
이성의 예배를 소개한 한 변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입법 의원 여러분, 광신은 이성 앞에 길을 양보했습니다. 그 흐린 눈으로는 빛의 광채를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무수한 군중이 고딕식 둥근 천장 아래 모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진리를 다시 반향 (反響) 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프랑스 국민은 유일의 참 예배, 곧 자유와 이성에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여기서 공화국의 군대의 성공을 위하여 기원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물체 곧 자연의 걸작품인 이성의 여신을 취하기 위하여 생기 없는 우상을 버렸습니다” (M.A.Thiers,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vol.2, pp.370,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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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이 식장에 들어가자마자 변사는 그의 손을 잡고 회중을 향하여 말하였다.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공포심이 만들어낸 무력한 하나님의 분노 앞에서 더 이상 떨지 말라.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성 이외는 아무것도 신으로 인정치 말라. 나는 여러분에게 이성의 가장 숭고하고 순결한 상 (像) 을 여기서 보여 준다. 만일 여러분이 반드시 우상을 가져야 한다면 이와 같은 우상에게만 제사를 드려라. 자 이성의 여신의 제막식을 자유의 의회 앞에서 거행한다.”
“여신은 의회장의 포옹을 받은 후 화려한 수레에 태워져, 많은 군중들 사이를 통과하여 노트르담 성당으로 인도되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여 높은 제단 위에 앉아 참석한 모든 자들의 경배를 받았다” (Alison, vol.1, ch.17).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공중 앞에서 성경을 불태워 버리는 일이 있었다. 어떤 회합에서는 박물관 서민 협회의 사람들이 “이성 만세”를 부르면서 시 (市) 의 공회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막대기 끝에다가 반쯤 불타다 남은 몇 권의 책들을 꿰뚫어 메고 갔다. 그 책들 중에는 천주교의 성무일과 (聖務日課), 미사서, 신구약 성경 등이 있었는데, 의장은 그 책들에 대하여 “인류에게 온갖 어리석은 일을 행하게 하였으므로 큰 불로 보응을 받았다” (Journal of Paris, 1973, No.381.Quoted in Buchez-Roux, Collection of Parliamentary History, vol.30, pp.200, 201) 고 말하였다.
그런데 무신론자들이 완성시키고 있었던 일을 시작한 것은 법왕권이었다. 프랑스를 급속히 멸망으로 밀어넣은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인 모든 상태는 로마교의 정책이 이루어 놓았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무서운 상태를 기술한 한 저자는 왕위와 교회가 그 극단적인 행동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부록 21 참조). 엄격히 비판하면 그것들은 모두 교회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법왕교는 종교개혁을 왕위의 적이요,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하는 불화의 요소라고 말함으로써 왕들의 마음을 자극하였다. 왕위를 통하여 가장 비참하고 잔인하며 가장 견딜 수 없는 압제와 박해를 행한 것은 그와 같은 모양으로 고취된 로마의 정신에 의한 것이었다.
각 시대의 대쟁투 pp. 265-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