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력한 친구들의 보호 아래 거기서 몇 개월 동안 안전하게 체류하면서 그는 여전히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프랑스의 복음화에 있었으므로, 그는 오랫동안 하는 일없이 지낼 수 없었다. 박해의 폭풍이 잔잔해지자마자 그는 포티어 (Poitiers) 에서 새로운 일터를 발견하였다. 거기에는 대학도 있었고, 복음주의가 호평을 받고 있었다.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공적인 설교는 하지 못하였지마는 칼빈은 고관의 집에서나 그의 숙소에서나 때로는 공원에서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영생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얼마 후에 청중이 늘어감에 따라 도시의 밖에서 모이는 것이 더욱 안전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깊고 좁은 산골짜기에 있는 동굴을 집회소로 택하였는데, 그 곳은 수목과 암석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더욱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다. 적은 무리들을 이루어 각각 다른 길로 시가를 벗어나 이곳으로 모였다. 그는 그 격리된 장소에서 성경을 읽고 설명하였다. 프랑스의 개신교도가 처음으로 성만찬 예식을 한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이 작은 교회에서 몇 사람의 충실한 복음 전도자들이 외부로 파견되었다.
칼빈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한 국가로서의 프랑스가 종교개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희망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업의 문호가 거의 닫히게 된 것을 알았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화형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독일로 가고자 작정하였다. 그가 프랑스에서 몰래 탈출하자마자 심한 폭풍우가 그 나라의 개혁파에게 엄습하였다. 그가 프랑스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그는 분명히 죽음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포 시대의 엄습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들은 자기들의 나라가 독일이나 스위스와 보조를 맞추어 나가는 것을 보고자 열망한 나머지 온 국민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로마교의 미신을 공격하여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미사를 공격하는 격문을 하룻밤 사이에 전국에 붙였다. 그러나 분별없이 열성만으로 행한 그 일은 개혁 사업을 전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 선동자들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의 개혁 신앙의 동지들에게까지 파멸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 일은 로마교도들이 오랫동안 소원하던 것, 곧 이단자들을 국가의 안녕 (安寧) 과 왕위의 확립을 위태롭게 하는 선동자들로 몰아 그들의 완전한 박멸을 요구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혹 분별력 없는 동지가 한 일인지, 교활한 원수가 한 일인지 전혀 분명치 않았으나, 한 장의 격문이 왕의 거실 (居室) 의 출입문에 붙어 있었다. 왕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 한 장의 종이 가운데는 다년간 존경을 받아 오던 미신을 무참하게 공격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처럼 기탄없는 놀라운 문구가 왕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의 격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너무도 놀란 왕은 얼마 동안 말없이 떨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분노에 사로잡힌 채 무서운 말을 터뜨렸다. “루터당이라고 의심되는 자는 차별 없이 체포하라. 나는 그들을 모두 박멸할 것이다” (D’Aubigne, b.4, ch.10).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왕은 로마의 편에 완전히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파리 시에서도 루터 파를 모두 체포하는 조치가 즉시 취해졌다. 개혁파의 한 사람으로서 비밀 집회에 신자들을 모으는 일에 능숙했던 빈곤한 한 직공이 체포되었다. 그는 즉시 화형에 처한다는 위협 하에, 법왕측의 사자들을 시내에 있는 모든 개신교도들의 집으로 인도해 주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는 전율하면서 그런 비열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회피하였지만 마침내 타오르는 화염을 보고 공포를 느낀 나머지 형제들을 배반하였다. 성병 (聖餠) 을 가진 자가 선두에 서고, 많은 신부들, 향로를 든 자들, 승려들, 군인들이 그를 에워싸고 나갔는데 왕실의 비밀 탐정인 모린 (Morin) 이 그 배반자를 데리고 가만가만히 시가를 빠져나갔다. 이 행렬은 미사를 더럽힌 개혁 교도들을 위하여 죄의 용서를 받게 하는 것이라고 함이 표면상 이유였다. 그러나 사실상 그 이면에는 무서운 목적이 감추어져 있었다. 어떤 루터교도의 집 맞은편에 이르자 그 배반자는 소리 내지 않고 어떤 암호를 하였다. 그러자 행렬은 정지되고 사람들이 그 집으로 달려 들어가 가족을 끌어내어 포박하고 다시 새로운 포획물을 찾아서 그 무서운 행렬은 움직였다. 그들은 “큰 집이나 작은 집을 막론하고 어떤 집이든지 그냥 지나지 않았다. 파리 대학과 같은 교육 기관까지도 엄습하였다. 그리하여 탐정 모린은 전 시중을 전율시켰다. …그것은 공포 시대였다” (D’Aubigne, b.4, ch.10).
말없는 설교단이 된 화형주
그 희생자들은 잔인한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였는데, 화형을 집행할 때 그들의 고통을 더욱 연장시키기 위하여 그 화력을 약하게 하라는 특별한 지시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승리자들처럼 죽었다. 그들의 지조는 변함이 없었고, 그들의 평화에는 그늘이 없었다. 박해자들은 그들의 확고부동한 태도에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자신들이 패배한 것을 느끼었다. “단두대는 파리의 모든 거리에 세워지고 화형은 날마다 계속 집행되었는데, 이렇게 사형의 집행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 이단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복음이 최후의 승리를 얻었다. 파리의 모든 시민들은 이 새로운 주의가 어떠한 종류의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순교자를 화형시키기 위하여 쌓아올린 장작더미처럼 좋은 설교단은 다시없었다.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갈 때, 그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난 조용한 기쁨, 심한 불길 속에 서 있는 그들의 영웅적 태도, 모욕에 대한 그들의 온유하고 관대한 용서 등은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동정으로, 증오를 사랑으로 바꾸어 주었고, 저항할 수 없는 웅변으로 복음을 옹호하는 방편이 되었다” (Wylie, b.13, ch.20).
신부들은 대중의 분노를 절정에 이르게 하고자 노력하였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하여 극도의 무서운 비난을 퍼부었다. 그들은 가톨릭교도를 학살하려고 음모하고,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하고, 왕의 암살을 도모하였다는 등의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들은 전혀 근거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처럼 무서운 무고는 하나의 예언으로 성취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프로테스탄트로 말미암아서가 아니고 전혀 다른 입장과 환경에 있는 자로 말미암아 전연 다른 원인에서 감행될 것이었다. 가톨릭으로 말미암아 죄 없는 프로테스탄트에게 가해진 만행은 그 보응의 무게를 더하였다. 그리고 후세에 이르러 이때에 그들이 왕에게 대하여, 정부에 대하여, 신하들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 일은 무신론자들로 말미암아, 그리고 법왕교도 자신들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3백년 후에 프랑스에 그처럼 비참한 재난이 초래된 것은 개혁주의의 수립 때문에 된 것이 아니고 가톨릭측이 개혁주의를 핍박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의심과 불신과 공포가 사회의 모든 계층에 편만해졌다. 이러한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교양 있고, 세력 있고, 품성이 고결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루터파의 교리가 얼마나 깊이 스며들고 있었는지 나타났다. 신임과 명예를 받고 있던 자리들이 갑자기 비게 되었다. 직공, 인쇄인, 학자, 대학 교수, 저술가, 심지어 왕궁에서 시종 드는 사람들까지도 모습을 감추었다. 이리하여 허다한 사람이 파리를 버리고, 국외로 피신하여 감으로써 복음파의 신앙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있었음을 처음으로 나타내었다. 법왕교도들은 그들과 같이 지내면서 의심을 받지 않고 지내온 이단자들을 생각하고 새삼스럽게 경이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분노는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보다 비천한 다수의 복음 교도들에게 쏟아졌다. 감옥은 차고 넘쳤다.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징벌하는 화형의 연기로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프란시스 1세의 신교 박멸책
프란시스 1세는 16세기 초엽에 일어난 문예부흥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영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학자들을 각 나라에서 자기의 궁전으로 모으기를 좋아하였다. 그가 종교 개혁파에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은 그가 학문을 사랑하고, 승려들의 무지와 미신을 경멸히 여긴 것이 그 동기의 일부가 되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학문을 숭상하던 그 사람도 일단 이단 박멸의 열정에 사로잡히자 드디어 프랑스 전국에 출판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프란시스 1세는 지적 교양이 종교적 편견과 핍박을 방어해 주는 보호의 수단이 안 된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많은 실례 중의 하나를 보여 준다.
프랑스는 엄숙하고 공공연한 의식을 통하여 프로테스탄트주의를 박멸하기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신부들은 개혁파들이 미사를 정죄함으로 높으신 하나님을 모욕한 것을 피로써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서는 왕이 국민을 대신하여 이러한 전율할 행위를 공중 앞에서 재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드디어 1535년 1월 21일에 그 무서운 의식이 집행되도록 정해졌다. 미신적인 공포와 융통성 없는 증오심이 온 국민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파리는 부근의 각 읍에서 몰려온 군중들로 가득 찼다. 당일에는 당당한 일대 행진을 거행할 예정이었다. “행렬이 지나가는 집들에는 상장 (喪章) 이 내어 걸리고 곳곳에 제단이 설치되었다.” 모든 집 문 앞에는 거룩한 의식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횃불이 세워져 있었다. 날이 새기 전에 왕궁에서 행진의 대열이 형성되었다. “선두에는 각 교구의 깃발들과 십자가들이 서고, 그 다음에는 시민들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횃불을 들고 따라갔다.” 그 뒤에는 네 계급의 교단승 (敎團僧) 이 각자 독특한 승의 (僧衣) 를 입고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가지각색의 거룩한 유물들을 가지고 갔고, 자색과 홍색 옷을 입고 보석으로 단장한 위풍당당한 성직자들이 따랐다.
“성병 (聖餠) 은 파리의 감독이 가지고 갔는데, 네 사람의 왕족이 화려한 일산 (日傘) 으로 그 위를 가리고 있었다. 왕은 그 성병의 뒤를 따랐다. 프란시스 1세는 그날에 왕관과 왕복을 착용하지 아니하였다.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땅을 내려다보고, 손에 작은 촛불을 들고 가는 프란시스 왕은 참회자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Wylie, b.13, ch.21). 그는 제단 앞에 이를 때마다 몸을 굽혀 꿇어 엎드렸는데, 이는 그의 마음을 더럽힌 죄악이나, 그의 손을 더럽힌 무죄한 자의 피 때문에서가 아니고 대담하게도 미사를 정죄한 자기의 신하들의 무서운 죄 때문에서였다. 왕비와 국가의 고관들은 두 사람씩 나란히 서서 각각 횃불을 손에 들고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날의 행사의 하나로서 왕은 감독의 저택의 넓은 방에서 국내의 고관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였다. 그는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그들의 앞에 나타나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웅변으로 그 나라에 다가온 “범죄와 모독과 슬픔과 치욕의 날”에 대하여 깊이 탄식하였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를 멸망시키고자 위협하고 있는 그 파괴적인 이단을 박멸하는 데 있어서 모든 충성된 신하들에게 조력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여러분! 내가 여러분들의 임금됨이 사실인 것처럼, 만일 나의 사지 중의 하나가 이 더럽고 추악한 이단설로 더러워졌거나 썩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 같으면 나는 그것을 꺾어버리도록 여러분들에게 내어 맡기리라. …또한 그뿐 아니라 나의 자녀 중의 하나가 그와 같은 병에 감염된 것을 발견한다면 나는 그를 결단코 아끼지 아니하리라. …나는 직접 그를 잡아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리리라”고 그는 말하였다. 눈물이 왕의 말문을 막았다. 그러자 온 회중은 감격하여 울면서 다 같은 마음으로 “우리는 가톨릭교를 위하여 살고 가톨릭교를 위하여 죽겠습니다” (D’Aubigne, b.4, ch.12) 고 외쳤다.
반개혁파의 시위 행렬
진리의 빛을 거부한 그 나라의 암흑은 두려운 형편에까지 이르렀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이미 나타났었지만 프랑스는 그 은혜의 권능과 거룩함을 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서 온 미덕에 이끌리고 각 도시와 촌락이 그 빛으로 교화된 것을 목격하면서도 그것을 거절하고 빛보다 어둠을 택하였다. 하늘에서 온 선물이 제공되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하여 마침내 스스로 자아기만의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지금은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분의 백성을 박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지라도, 그러한 실정이 그들을 무죄하다고 해줄 수는 없었다. 그들은 기만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고, 그들의 영혼을 피흘린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빛을 고의로 거절하였다.
이단을 박멸하겠다는 엄숙한 맹세가 큰 전당에서 이루어졌는데, 바로 그 장소에서 약 삼백년 후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에 의하여 “이성 (理性) 의 여신”이 경배를 받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행렬이 정돈되었으므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러 사람들은 그들이 맹세한 그 일에 착수하였다. “가까운 거리에 몇 사람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산 채로 화형시킬 화형주들이 세워져 있었다. 왕이 가까이 접근하는 순간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고 행렬이 정지되어 그 처형의 모습을 쳐다보도록 준비가 되어 있었다” (Wylie, b.13, ch.21). 그 때에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것이었으나 그들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다. 신앙을 취소하라는 권면을 받게 되자, 그 중의 한 사람은 “나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이미 전한 것과 모든 성도들이 믿는 것만을 믿는다. 나의 믿음은 음부의 모든 권세를 이기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D’Aubigne, b.4, ch.12) 고 대답하였다.
여러 번 행렬은 처형당하는 장소들에서 멈추었다. 그들이 처음 출발했던 왕궁에 도착하자 군중은 해산되고, 왕과 주교들은 그날의 행사에 매우 만족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피차에 축하를 나누며 지금 시작한 이단 박멸 작업을 끝까지 계속하기로 하였다.
피비린내나는 공포 시대의 재현
프랑스에서 거절한 평화의 복음은 분명히 뿌리까지 뽑혔지마는 그 결과는 또한 무서운 것이 될 것이었다. 프랑스가 개혁자들을 완전히 박해하기로 한 바로 그날부터 258년이 지난 1793년 1월 21일에는 전연 다른 목적으로 또 하나의 다른 행렬이 파리 시를 통과하였다. “다시 왕이 주요한 인물로 등장하였고, 다시 소동과 부르짖음이 일어났고, 다시 더욱 많은 희생자들을 요구하는 소리가 들렸고, 다시 검은 단두대가 서게 되었다. 다시금 그날의 활극은 무서운 사형 집행으로 끝을 맺었다. 루이 16세는 간수와 사형 집행자들 사이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단두대 앞으로 끌려가서 도끼가 내려오기까지 붙들려 있었다. 마침내 잘려진 그의 머리는 단두대 위에서 굴렀다” (Wylie, b.13, ch.21). 피의 희생 제물이 된 것은 왕만이 아니었다. 피비린내나는 공포 시대 동안에 바로 그 근방에서 단두대에 의하여 처형된 사람은 2천8백 명이나 되었다.
종교개혁은 세상 사람들에게 성경을 펴서 보여 주고, 하나님의 율법을 공개하고, 그 요구를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하였다. 무한한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법규와 원칙을 공개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 4:6) 고 말씀하셨다. 프랑스는 하늘로부터 온 선물을 거절함으로 무정부 상태와 멸망의 씨를 뿌렸고, 그 필연적인 결과로 혁명과 공포 시대를 거두었다.
파렐이 스위스에서 기초를 닦음
벽보 사건으로 박해의 불이 아직 일어나기 오래 전에 용감하고 열렬한 파렐은 불가불 자기의 고향을 피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스위스로 가서 츠빙글리의 사업을 원조하여 개혁 사업을 유리하게 호전시키고 있었다. 그는 그의 여생을 거기서 보낼 작정이었지만 프랑스에서 진행되는 종교개혁의 사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계속해서 노력하였다. 그의 망명 생활의 초기에는 특히 자기의 고국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애를 썼다.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국경 지역에 사는 고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언제나 끊임없이 경계하면서 고국의 분쟁을 주시하고, 격려와 권고의 말로써 저들을 도와주었다. 그는 다른 망명자들의 도움을 얻어서 독일 개혁자들의 저서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프랑스어 성경도 동시에 많이 출판하였다. 그 저서들은 문서 전도자들을 통하여 프랑스 국내에 널리 전해졌다. 그런데 문서 전도자들은 그 저서들을 싼 값으로 공급받았으므로 그들은 그 이득을 가지고 계속해서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파렐은 스위스에서 한 사람의 교사로서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한적한 한 교구로 가서 아동 교육에 몰두하였다. 그는 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신중하게 성경의 진리를 소개함으로 아동을 통하여 그 부모들에게 진리를 전하고자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믿는 사람들이 몇 사람 생겼다. 그러나 신부들이 와서 그 사업을 방해하게 되자 미신적인 시골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 사업을 반대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전파함으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Wylie, b.14, ch.3) 고 신부들은 주장하였다. 그는 초기의 제자들처럼, 이 성읍에서 박해를 만나면 저 성읍으로 피하여 다녔다. 그는 추위와 피곤을 무릅쓰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성 저 성으로 걸어 다녔는데 어디를 가든지 그의 생명은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는 시장에서, 교회에서 때로는 성전의 설교단에서 진리를 전하였다. 어떤 때에는 청중이 한 사람도 없을 때도 있었고, 어떤 때에는 설교하는 중에 고함 소리와 조롱으로 방해를 받은 적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설교단에서 난폭하게 끌려 내려오는 봉변도 당하였다. 여러 번 폭도들의 공격을 받아 거의 죽을 정도로 매를 맞은 일도 있었다. 그럴지라도 그는 앞으로 전진하였다. 때때로 배척을 당하였을지라도 물러서지 아니하고 공격에 대항하여 가는 동안에 점차로 법왕교의 요새로 되어 있던 성읍들이 복음에 대하여 그들의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처음에 그가 활동하였던 작은 교구는 오래지 않아서 개신교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모라 (Morat), 뉴사텔 (Neuchatel) 등의 도시들도 로마교의 의식들을 버리고 우상을 제거해 버렸다.
파렐은 제네바에 개신교의 깃발을 꽂고자 오랫동안 열망해 왔다. 그 곳에 진리가 전파되면, 그 곳은 프랑스와 스위스와 이태리를 위한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될 것이었다. 그는 그 목적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한 결과로 그 주위의 많은 도시들과 작은 마을들을 얻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한 사람의 동료만을 데리고 제네바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밖에는 설교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신부들은 정부의 권위를 가지고 그를 정죄코자 하였으나 그 일이 허지로 돌아가게 되자, 그를 성직자들의 회의에 불러 놓고 무기를 감추고 가서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 회의장 밖에는 격노한 폭도들이 곤봉과 검을 가지고 대기하고 있었으며, 만일 그가 회의 장소에서 피하여 나오게 되면 그를 살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사 (知事) 와 무장한 군대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그는 자기의 동료와 함께 호수 건너편의 안전지대로 안내되었다. 그리하여 제네바를 복음화시키고자 한 그의 첫 번째 활동은 끝났다.
제네바의 칼빈
그 다음에 택함을 입은 사람은 더욱 비천한 사람이었다. 그 젊은이는 너무도 볼품이 없었기 때문에 개혁 사업의 동료들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마저도 냉담한 취급을 받았다. 파렐도 거절을 당한 그 성읍에서 그런 인물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가장 강하고 가장 용감한 사람도 피해 갈 수밖에 없었던 그 성읍에서 용기로나 경험으로나 빈약한 그와 같은 인물이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7, 25).
프로멘트 (Froment) 는 교사로서 일을 시작하였다. 그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친 진리를 아이들은 집에서 다시 이야기하였다. 얼마 후 학부형들이 성경의 강해 (講解) 를 들으러 오게 되었는데 열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로 교실이 마침내 차고 넘쳤다. 신약 성경과 전도용 소책자들이 많이 배부되었으며, 그것들은 새 교리를 공공연하게 들으러 오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다. 얼마 후에 그 전도자 역시 피해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르친 진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있었다. 개혁 사업의 씨는 뿌려졌고, 계속해서 튼튼하게 확장되어 갔다. 전도자들은 돌아왔으며, 그들의 노력을 통하여 개신교의 사업은 마침내 제네바에서 견고해졌다.
제네바가 이미 개혁 사업을 선언한 후에야 칼빈은 각처로 유랑하여 여러 가지 경험을 겪고 그 성읍에 들어왔다. 그는 자기가 출생한 고향을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바젤 (Basel) 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런데 고향으로 가는 직로가 카알 5세의 군대에게 점령당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불가불 제네바를 거쳐서 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방문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파렐은 인정하였다. 비록 제네바가 개혁주의의 신앙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그 곳에는 아직도 성취되어야 할 큰 사업이 남아 있었다. 사람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며 단체적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중생 (重生) 의 사업은 회의의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 마음과 양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제네바의 주민들은 로마교의 권력에서는 벗어났지만 로마교의 통치 하에 만연되어 있는 악은 쉽사리 버리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곳에 복음의 순결한 원칙을 확립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시는 직위를 훌륭하게 감당하는 일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파렐은 칼빈이 그 사업을 위하여 자기와 협력할 수 있는 사람임을 확신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청년 전도자에게 그 곳에 머물러 일하라고 정중히 간청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 일을 사양하였다. 겁이 많고 평화를 사랑하는 그는 용감하고 독립심이 강하고 과격한 성질을 가진 제네바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두려워하였다. 천성적으로 연구에 몰두하기를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건강도 좋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는 글로써 개혁 사업에 최선껏 봉사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나머지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서 인쇄물을 통하여 교회를 가르치고 세워 나가고자 희망하였다. 그러나 파렐의 엄숙한 권고는 하늘에서 온 소명처럼 느껴졌으므로 그는 감히 그것을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손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자기를 붙들고 자기가 피하여 가려는 그 장소에 억지로 주저앉게 한 것” (D’Aubigne, b.9, ch.17) 처럼 느꼈다고 말하였다.
음험한 “제수이트”들의 책동
이때에 개혁 사업은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법왕은 제네바에 대하여 파문의 선고를 내렸고, 강국들은 제네바를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흔히 왕들과 황제들까지도 강제로 굴복시키던 그 강력한 교직 정치를 이 작은 도시가 어찌 능히 대항할 수 있으며, 그것이 세상을 정복한 큰 군대들을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모든 그리스도교국에서 개신교는 흉악한 원수들에게 위협을 당하였다. 개혁 사업의 최초의 승리는 지나갔다. 로마교는 개혁 사업을 진멸시키기 위하여 새 세력들을 구축하였다. 이때에 법왕교의 투사들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무법하고, 강력한 제수이트당이 조직되었다. 그들은 혈연적 관계와 인간적 사리도 무시하고, 인정의 요구와 이성 (理性) 과 양심에도 무감각하여 그것들을 완전히 배척해 버리고, 규율과 유대 관계도 무시하고, 오직 저들의 규칙에 의지하여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만 진력하였다 (부록 17 참조).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을 고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위험을 무릅쓰고 고난을 참게하고, 추위와 주림과 수고와 빈곤도 겁내지 않게 하고, 고문대와 감옥과 화형주 앞에서도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게 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 세력을 대항하기 위하여 제수이트당은 그 추종자들에게 광신을 불러일으켜서 온갖 위험들을 견딜 수 있게 하고, 각종 기만의 무기들로 진리의 세력을 반대하게 하였다. 그들은 아무리 큰 죄라도 범할 수 있었고, 아무리 저급한 거짓도 행할 수 있었고, 어떤 가장 (假裝) 도 어려움 없이 꾸밀 수 있었다. 항구적인 빈곤과 검소한 생활을 맹세하였지만, 그들의 목적은 부와 권력을 얻고, 개신교를 전복시키고, 법왕의 최상권을 재기시키는 데 있었다.
그들의 단체에 속한 당원의 입장에 설 때에, 그들은 거룩한 의복을 입었고, 그들은 감옥과 병원을 방문하면서 병자와 불쌍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세상을 버렸노라고 공언하였고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노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외모로는 아무런 흠도 없이 보이는 그들이 때때로 가장 죄악적이요, 치명적인 목적을 감추고 있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는 것이 그 단체의 근본 원칙이었다. 이 원칙에 의하여 거짓말, 도적질, 거짓 증거, 암살 같은 것도 그것이 교회를 이롭게 하는 일일 때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칭찬받을 만한 일이 되었다. 제수이트 당원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장하여 나라의 공직자들이 되고 왕의 고문관들의 지위에도 올라가서 나라의 정책을 세우는 일들을 하였다. 그들은 정탐꾼 노릇을 하기 위하여 남의 종도 되었다. 그들은 왕족들과 귀족들을 위한 대학들과 평민들을 위한 학교들을 세워서 개신교도들의 자녀들로 하여금 법왕교의 의례 (儀禮) 를 지키도록 하였다. 외관상으로 화려하고 찬란해 보이는 로마교의 의식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고 상상력을 현혹시켰다. 그러므로 조상들이 수고하고 피 흘려 얻은 자유를 그 자녀들은 배반하였다. 제수이트당은 급격히 온 유럽에 퍼졌다. 그리하여 그들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법왕교의 부흥이 뒤따랐다.
개혁 운동 사상에 있어서의 칼빈의 위치
그들에게 더욱 큰 권력을 주기 위하여 종교 재판소를 다시 세우라는 교서가 내렸다 (부록 18 참조). 일반 사람들이 가증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 국가들에서까지도 부당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서운 재판소가 법왕교의 위정자들로 말미암아 설치되고, 백주에는 너무 무서워서 차마 볼 수 없는 고문이 아무도 볼 수 없는 옥중에서 반복하여 감행되었다. 많은 나라에서 국가의 꽃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 순결하고 고상한 사람들, 가장 지성적이고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 경건하고 헌신적인 목사들, 부지런하고 애국적인 시민들, 탁월한 학자들, 천재적인 예술가들, 기술 있는 직공들이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이 죽임을 당하거나 다른 나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교는 종교개혁의 빛을 꺼버리고, 인류에게서 성경을 빼앗고, 암흑시대의 무지와 미신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여러 가지 방책들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께서 루터를 이어서 일으켜 주신 고귀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개신교는 전복되지 아니하였다. 개신교의 힘은 왕족들의 호의나 권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가장 작고 비천하고 무력한 나라들이 그 요새 (要塞) 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승리를 얻은 나라들은 멸망을 도모하고 있는 강한 원수들에게 둘려 있는 작은 도시 제네바, 당시에 가장 크고 부요하였던 스페인의 학정에 항거하고 있던 네덜란드, 황량하고 메마른 스위스 등이었다. {GC 235.3}
칼빈은 약 30년간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다. 거기서 처음에는 성경상 원칙을 고수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하여, 그 다음에는 온 유럽에 종교개혁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공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행위와 그의 가르침에는 그릇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세계에 필요한 진리를 공포하고, 법왕교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서 개신교의 원칙을 지탱하고, 로마교의 교리에서 자라난 교만과 부패 대신에 단순하고 순결한 생명을 개혁 교회에 부식시켜 주는 도구가 되었다.
제네바에서부터 출판물들과 교사들이 개신교의 교리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나갔다. 거기에서 각국의 핍박자들은 교훈과 권면과 격려를 기대하였다. 칼빈의 시 (市) 제네바는 쫓겨 다니던 서유럽의 개혁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몇 세기에 걸쳐서 계속된 무서운 폭풍을 피하여 망명자들은 제네바를 찾아왔다. 굶주리고, 상처받고, 집과 친족을 잃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따뜻한 영접을 받고 친절한 보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안식처를 발견한 그들은 그들의 기능과 학식과 신앙을 활용함으로 그 도시를 복되게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피난처를 발견했던 많은 사람들은 로마교의 학정을 저항하기 위하여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개혁자 존 녹스, 영국의 많은 청교도들,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신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교도들은 모두 암흑한 본국들을 밝히기 위하여 제네바에서 진리의 횃불을 들고 나갔다.
각 시대의 대쟁투 pp. 224-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