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10일

음산한 옥중에서 그는 참된 신앙의 승리를 미리 보았다. 꿈 가운데 그는 자기가 복음을 전하던 프라하의 교회당으로 돌아가서 그가 벽에 그렸던 그리스도의 그림들을 법왕과 주교들이 지워 버리는 것을 보았다. “이 광경은 그를 괴롭게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 그는 더욱 많은 화가들이 더욱 찬란한 채색으로 더욱 많은 그림들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일을 마치자마자 그 화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 이제는 법왕이든지 감독이든지 와 보라. 그들이 더 이상 다시는 이 그림들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고 부르짖었다. 개혁자는 그가 꾼 꿈에 관하여 ‘나는 그리스도의 상 (像) 을 결단코 지워 버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들은 그것을 소멸시켜 버리고자 했지만 나보다 훨씬 더 유력한 전도자들로 말미암아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롭게 그려질 것이다’고 말하였다” (D’Aubigne, b.1, ch.6).

후스의 장렬한 최후

후스는 마지막으로 큰 회의에 소환되었다. 그것은 실로 규모가 크고도 엄숙한 집회였다. 황제와 왕공과 사신과 추기경들과 감독과 신부들이 열석하고, 밖에는 허다한 방청자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한 긴 투쟁에서 최초의 큰 희생자를 목격하고자 그리스도교국의 각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후스는 최후의 결심을 표명하도록 요구받았을 때, 자기의 견해를 철회하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는 약속한 바를 아무런 가책 없이 깨뜨려버린 황제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나는 여기 임석한 황제의 신의 (信義) 와 공공연한 보호 아래 내 자신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대회의에 출석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Bonnechose, vol.2, p.84) 라고 언명하였다. 그러자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황제에게 집중되었으며, 시기스문트는 얼굴을 붉혔다.

선고가 언도되고, 지위를 박탈하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감독들은 그 죄수에게 승려와 같은 옷을 입혔다. 후스는 승복을 손에 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치욕을 받으실 때에 흰옷을 입으시고 헤롯에게서 빌라도에게로 호송되셨다” (Bon-nechose, vol.2, p.86) 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권고를 다시 받게 되자 그는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순결한 복음을 전한 저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들의 구원을 이제 죽기로 작정된 불쌍한 나의 몸 이상으로 귀중하게 여긴다.” 그의 제복 (祭服) 은 하나씩 차례로 벗겨졌는데, 그럴 때마다 의식을 행하고, 열석한 감독들은 차례대로 저주를 선언하였다. 드디어 그의 머리 위에는 모자 곧 피라미드 모양으로 만든 종이 고깔이 씌워졌는데, 거기에는 악마의 무서운 형상이 그려져 있고 대이단자라는 글자가 그 앞면에 뚜렷하게 쓰여 있었다. 후스는 ‘주 예수여 이 종은 더할 수 없는 기쁨으로 당신을 위하여 치욕의 관을 쓰나이다. 나를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주 예수여!’ 하고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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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식을 행한 후에 “주교는 ‘네 영혼을 마귀에게 주노라’고 말하였다. 그 때에 얀 후스는 하늘을 우러러, ‘오, 주 예수여! 당신이 나를 구원하셨으니, 나는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고 말하였다” (Wylie, b.3, ch.7).

그 후에 그는 세속적 권세에 맡겨져 처형장으로 끌려나갔다. 그의 뒤에는 많은 군중, 몇백 명의 무장한 사람들, 아름다운 의복을 입은 신부와 주교들, 콘스탄스 성의 주민들이 따랐다. 그가 화형주에 결박되고 불을 붙일 수 있는 준비가 다 갖추어졌을 때에 그 순교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그의 오류를 취소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무슨 오류를 취소하라고 하는가?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술한 것과 전파한 것은 모두 사람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저술하고 전파한 진리를 나의 피로써 확인하기를 매우 기뻐한다” (Wylie, b.3, ch.7). 이윽고 불을 붙이매 그는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찬미를 그의 목소리가 영영히 그쳐질 때까지 불렀다.

심지어 그의 원수들까지도 그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열광적인 법왕당의 한 사람은 후스와 그 후에 있은 제롬의 순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두 사람은 다같이 최후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화형을 받기 위하여 나아가기를 마치 혼인 잔치에 나아가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들은 아무런 고통의 부르짖음도 발하지 않았다. 불길이 일어날 때에 그들은 찬미를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그 불길의 기세도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그치게 할 수 없는 듯하였다” (Wylie, b.3, ch.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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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의 몸이 다 타버린 다음에 그들은 그 재와 흙을 모아서 라인 강에 던져 대해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의 핍박자들은 그가 전한 진리를 근절한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날에 던져진 재가 대해로 흘러가서 각 나라에 씨를 뿌리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까지 진리를 증거하는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질 것을 그들은 거의 생각지 못하였다. 콘스탄스의 회의장에서 부르짖은 그의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그 후 각 시대를 통하여 쉼없이 울려 퍼질 것이었다. 후스는 이미 가고 없으나 그가 생명을 바쳐서까지 옹호한 그 진리는 결코 멸절될 수 없었다. 그의 신앙과 충성의 모본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문과 사망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의 처형 (處刑) 은 횡포한 로마의 잔인성을 전 세계에 드러내 보이는 일이 되었다. 진리의 원수들은 자기들이 없애 버리려고 한 그 사업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히려 발전시키는 결과를 빚어내게 되었다.

제롬의 옥중 생활

이제 또 하나의 화형주가 콘스탄스 성에 세워질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의 증인의 피가 진리를 위하여 증거하여야 할 것이었다. 제롬은 후스가 대회의에 나아갈 때에 그와 작별하면서 그에게 용기와 확고한 태도를 가지라고 권면하고 만일 그에게 위험이 있을 때에는 즉시 도와주겠노라고 하였다. 개혁자의 투옥 (投獄) 소식을 듣자 충실한 그 제자는 곧 약속을 이행하려 하였다. 그는 통행권도 가지지 않고 한 동료를 데리고, 콘스탄스 성을 향하여 떠났다. 그는 그 곳에 도착하자, 후스를 구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성에서 피하였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그는 붙잡히어 쇠사슬에 매여 일단의 군인들에 의하여 호송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회의에 끌려나와 그에 대한 소송에 답변을 하고자 했을 때 그는 “화형에 처하라, 화형에 처하라”는 부르짖음을 듣게 되었다 (Bonnechose, vol.1, p.234). 그는 큰 고통을 느끼도록 쇠사슬에 결박된 채로 투옥되어 있었는데, 먹을 것이라고는 물과 빵뿐이었다. 옥중에서 너무나 가혹한 대우를 받았으므로 제롬은 병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원수들은 그가 그대로 죽을 것을 염려하여 약간 관대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그는 약 1년간 옥중에 그대로 갇히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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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의 죽음은 법왕당에게 있어서 기대한 것만큼의 효과가 없었다. 후스의 통행권에 대한 침해가 심한 분노와 물의를 일으켰으므로, 더 안전한 방법으로, 대회의는 제롬을 화형에 처하는 대신에 할 수 있는 대로 그를 강요하여 그의 주장을 취소하게 하고자 결정하였다. 그는 회의장에 끌려나와 오류를 취소하든가, 화형으로 죽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가 당한 무서운 고난을 생각해 보면 수감 초기에 죽는 것이 도리어 그에게는 동정 깊은 처사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제 옥중에서 당한 고통으로 얻은 질병 때문에 기력이 쇠하여졌고, 근심과 불안에서 오는 괴로움, 친구들과의 이별, 후스의 죽음으로 인한 낙심 등과 같은 일들로 말미암아 제롬의 용기는 꺾이어 마침내 그는 회의에 굴복하였다. 그는 가톨릭의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서약하고, 위클리프와 후스가 가르친 교리 중 소위 “신성한 진리” (Bonnechose, vol.2, p.141) 이외의 것을 정죄한 회의의 결의를 수락하였다.

이와 같은 임기응변의 수단으로 제롬은 양심의 소리를 침묵시키고 절박해 오는 죽음을 면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감방의 적막 속에서 그는 자기가 한 일이 무엇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후스의 충성과 용기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것과 비교해서 진리를 거부한 자기의 무가치한 행동을 숙고하였다. 그는 자기가 섬기기로 서약한 거룩하신 주님,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까지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였다. 신앙을 취소하기 전에는 온갖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확증으로 말미암는 위로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의 마음속에 오직 후회와 의혹과 고민만이 남아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로마교와 화해하려면 아직도 여러 번 신앙의 취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나아가는 길은 완전한 배도로 끝날 것이었다. 그는 잠깐 동안의 고난을 면하기 위하여 자기의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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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의 뒤를 따른 제롬

곧 그는 다시 회의에 끌려나왔다. 그의 재판관들은 그의 굴복으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피에 목마른 저들은 후스의 죽음으로 자극을 받아 새로운 희생자를 요구하게 되었다. 제롬은 진리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제롬은 그 신앙을 고백하는 동시에 자기의 형제 순교자의 뒤를 따라 화형을 당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는 지난번의 말을 취소하고, 죽음을 각오한 사람으로서 변명할 기회를 달라고 엄숙히 요구하였다. 그의 말이 끼치게 될 영향을 두려워한 주교들은 그에게 대한 고소에 대해서만 가부간에 대답하라고 강요하였다. 제롬은 이와 같이 잔혹하고 불의한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항의하였다. “너희들은 나를 무서운 감옥, 불결하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곳에서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은 채 3, 40일간 구금하였다. 그리고 나를 너희 앞에 끌어내어 나를 죽이려는 원수들의 말은 들어 주면서 나의 증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만일 너희들이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들이고 전 세계의 광명이라 자처한다면 정의에 대하여 범죄치 않도록 조심하라. 나는 다만 하나의 연약한 인간이다. 나의 생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불의한 선고를 하지 않도록 너희들에게 권고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보다 너희들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Bonnechose, vol.2, p.146, 147).

그의 요구는 마침내 수락되었다. 제롬은 재판관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령이 자기의 생각과 말을 제어해 주심으로써 주님을 욕되게 하거나 한 마디라도 진리에 어그러지는 말을 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이날에 그에게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에게 주신바 언약, 곧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 10:18~20) 고 하신 그 언약이 성취되었다.

제롬의 말은 그의 원수들까지도 경탄케 하고 놀라게 했다. 그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번민 속에서 1년 동안 감옥에 갇힌 채로 보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마치 그가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처럼 분명하고 능력이 있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불의한 재판관들에 의하여 정죄의 선고를 받았던 성도들을 일일이 열거하였다. 그는 어떠한 시대에든지 그 시대의 백성들을 계몽하려고 힘쓴 자들이 비난을 받고 배척을 당하였으나 후에는 영광을 받은 것과 그리스도 자신도 불의한 법관에게 악인으로 정죄를 받으신 사실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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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취소하였을 때 제롬은 후스가 정죄를 받은 것을 당연하다고 동의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회개를 선포하였으며 그 순교자의 무죄와 성결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나는 그를 어렸을 때부터 알았다. 그는 의롭고 거룩하며 가장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죄 없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나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 언젠가는 아무도 속일 수 없는 크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기만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될 나의 원수들과 거짓 증인들이 마련해 놓은 고통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Bonnechose, vol.2, p.151).

법관들 앞에서 행한 제롬의 신앙 고백

그는 자기가 진리를 부인한 사실에 자책감을 느끼면서 계속해서 말하였다. “청년 시대 이후로 내가 범한 모든 죄악 중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괴롭게 한 것은 내가 이 흉악한 장소에서 범한 죄이다. 이곳에서 나는 나의 스승이요 친구인 거룩한 순교자 얀 후스와 위클리프에 대하여 내린 간악한 선고를 시인하였다. 그러나 나는 충심으로 그 일을 참회한다. 나는 불명예스럽게도 죽음을 두려워하여 두 사람의 교리를 부인한 것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여러 가지 죄를 용서해 주시되, 가증한 이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원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는 재판관들을 가리키면서 엄숙하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위클리프와 얀 후스에게 정죄의 선고를 내렸는데, 그들이 교회의 교리를 침해한 연고에서가 아니고, 그들이 성직자들의 비행과 추문, 곧 그들의 허식과 교만, 주교와 신부들의 온갖 죄악들을 적발하여 공격하였기 때문이었다. 위클리프와 후스가 말한 반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하여 나 역시 너희들을 규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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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은 저지되었다. 주교들은 격분하여 떨면서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한가?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가장 완고한 이단자를 직접 목격하고 있다”고 부르짖었다.

제롬은 소란한 중에서도 확고한 태도로 말하였다. “너희들은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줄로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과거 1년 동안 죽음보다 더욱 참혹하고 무서운 감옥 속에 나를 가두었다. 너희들은 나를 터키 사람들과 유대인들과 이교도들보다 더욱 잔혹하게 취급하였으므로 나의 살이 사실상 썩어서 나의 뼈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나는 불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탄식은 마음과 정신을 병약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그처럼 심한 만행 (蠻行) 을 감행하는 데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Bonnechose, vol.2, p.151~153).

다시 소동이 일어났으므로 제롬은 급히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그 때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는 그의 말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생명을 구원하려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제롬은 교회의 권력자들의 방문을 받고, 대회의의 결정에 복종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로마교에 대한 반대를 취소한다면, 그 보상으로 그의 앞에 가장 밝은 전망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영화가 주어지자 제롬은 그의 주님처럼 그것을 확고하게 물리쳤다.

“성경으로 나의 오류를 지적해 준다면, 나는 그것을 거리낌 없이 버리겠다”고 그는 단언하였다. “성경이라고? 그렇다면 만사를 다 그것으로만 판단해야 된단 말이냐?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지 아니하면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고 그를 유혹하는 자들 중의 한 사람은 부르짖었다. 이에 대하여 제롬은 대답하였다. “우리 구주의 복음보다도 사람의 유전이 신앙상으로 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느냐? 바울은 자기의 편지를 받을 사람들에게 사람의 유전을 들으라고 권하지 않고, 도리어 ‘성경을 상고하라’고 말하였다.”

“이단이다”라는 부르짖음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너를 위하여 그처럼 오랫동안 애원한 것을 나는 후회한다. 네가 악마의 충동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Wylie, b.3, ch.10).

드디어 그는 정죄의 선고를 받았다. 그는 후스가 죽임을 당한 바로 그 장소로 끌려 나갔다.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나갔는데, 그의 얼굴은 평화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죽음의 두려움이 없었다. 사형 집행자가 불을 붙이려고 그의 뒤로 돌아가자, 그 순교자는 “꺼릴 것 없이 앞으로 나와서 나의 눈앞에서 불을 붙여라. 내가 두려워했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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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이 그를 둘러싸자 그는 최후의 기도를 드렸다. “주여, 전능하신 아버지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언제나 당신의 진리를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시나이다” (Bon-nechose, vol.2, p.168) 고 그는 외쳤다. 마침내 그의 소리는 그쳤으나 기도하는 그의 입술은 그치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불길이 그치자 그 순교자의 재는 거기에 남아 있는 흙과 함께 후스의 재처럼 라인 강에 던져졌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들은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전파한 진리의 빛, 그들의 영웅적인 모본으로 남긴 광채는 소멸될 수 없었다. 바야흐로 세상에 다가오고 있는 여명 (黎明) 을 막으려는 것은 마치 사람이 태양을 돌아가는 궤도에서 역전 (逆轉) 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모한 것이었다.

지스카 장군의 분기 (奮起)

후스의 처형 (處刑) 은 보헤미아에 분노와 공포의 불길을 일으켰다. 온 국민들은 후스가 승려들의 적의 (敵意) 와 황제의 배신으로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충성된 진리의 교사였음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그에게 사형 언도를 내린 대회의는 살인죄를 범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교리는 어느 때보다 더욱 큰 관심을 끌었다. 법왕은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정죄하고 불태워 버리라는 조서를 내렸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그 저서들 중에서 소멸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을 그것들이 숨겨져 있던 곳에서 가져와 성경전서나 혹은 사람이 구할 수 있는 성경 중의 어떤 일부분과 대조하여 연구하였으며,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개혁자들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후스를 죽인 자들은 그의 운동이 승리하는 것을 조용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법왕과 황제가 연합하여 이 운동을 진압하려 하였으며, 시기스문트의 군대는 보헤미아를 향하여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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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에 한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는 개전 직후에 두 눈을 다 잃어버린 지스카 (Ziska) 로서 당시에 가장 훌륭한 장군 중의 한 사람으로서 보헤미아군의 지휘관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들의 사업의 정당성을 신뢰하면서 사람들은 침공해 오는 가장 강력한 군대와 맞서 싸웠다. 황제는 여러 번 거듭하여 새로운 군대를 보내어 보헤미아를 공격하였으나 굴욕적이게도 격퇴를 당할 뿐이었다. 후스의 신봉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아무도 그들을 대적할 수 없었다. 개전 후 불과 수년 만에 그 용감한 장군 지스카는 죽었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용감한, 아니 어떤 점으로는 그보다도 더욱 훌륭한 장군인 프로코피우스 (Procopius) 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보헤미아인의 원수들은 그 눈먼 용사의 죽음을 알게 되자, 그들이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줄로 믿었다. 법왕은 후스의 신봉자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십자군을 보낼 것을 포고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급히 많은 군대를 보헤미아로 투입시켰으나 결국은 엄청난 패배를 당할 뿐이었다. 또다시 십자군의 파견이 선포되었다. 유럽에서 법왕을 지지하는 모든 나라들로부터 전쟁을 위하여 사람과 자금과 군수품들을 모았다. 허다한 무리들이 법왕의 깃발 아래 모여서 마침내 후스의 신봉자들인 이단을 멸절시키겠노라고 약속하였다. 필승의 신념으로 많은 군사들이 보헤미아로 쳐들어갔다. 보헤미아의 백성들도 그들을 격퇴시키기 위하여 집결하였다. 두 군대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 (對峙) 하였다. “십자군은 월등하게 우세한 군대였으며, 후스의 신봉자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참으로 먼 거리에서부터 왔기에 그 시내를 건너서 급히 돌진하거나, 그들과 접전하기보다는 조용히 서서 상대방의 전사들을 주목하여 바라보기만 하였다” (Wylie, b.3, ch.17). 그 때에 그들은 갑자기 기이한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세력에 의하여 쫓겨 가듯이 한 번 공격해 보지도 못하고, 그 대군은 깨어지고 흩어졌다. 무수한 군사들이 도망하다가 그들을 쫓아간 보헤미아군에게 살육을 당하고, 막대한 전리품이 승리자들의 손에 돌아갔다. 그리하여 그 전쟁은 보헤미아 사람들을 곤궁에 빠뜨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요하게 해주었다.

십자군의 파멸

수년 후에 다른 법왕이 십자군을 다시 일으켰다. 전과 같이 군대와 자금이 법왕권 하에 있는 온 유럽 각국에서 징집되었다. 이 위험한 일에 가담시키고자 권유하는 운동이 크게 전개되었다.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는 누구든지 아무리 가증한 죄를 범하여도 완전히 용서받는다는 것이 보증되었다. 전쟁에서 죽는 자들은 하늘에서의 큰 상이 약속되었고 살아남는 자들은 그 전쟁터에서 명예와 재물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보증되었다. 다시금 대군이 징모되어 국경을 넘어 보헤미아로 쳐들어왔다. 후스의 신봉자들은 그 대군 앞에서 퇴각하여 침략자들을 국내로 깊숙이 유인하여 들이고, 그들로 하여금 이미 승리한 줄로 생각하게 하였다. 드디어 프로코피우스의 군대는 퇴각을 정지하고, 원수들을 향하여 돌아서서 그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십자군은 그제야 그들의 실책을 깨닫고, 군대를 멈추고 그 자리에서 적군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십자군들은 적군이 접근해오는 소리를 듣자 후스파의 군대를 보기도 전에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왕족들과 장군들과 일반 군사들은 그들의 무기를 내어 버리고 사방으로 도망하였다. 침략군의 총지휘자인 법왕의 사절은 공포감에 눌려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고자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그는 온갖 노력을 다 하였지만 마침내 그 자신도 도망하는 무리들에게 휩쓸려가고 있었다. 침략군은 완전히 패배당하였고, 막대한 전리품이 다시 승리자의 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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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유럽의 가장 강력한 나라들로부터 파견된 용감하고 호전적이며, 전쟁을 위하여 훈련받고 무장한 무리로 이루어진 두 번째의 대군은 한 번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한 연약한 국민으로 편성된 소수의 방위군 앞에서 궤멸되고 말았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침략군은 초자연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를 궤멸시키고 기드온과 삼백 명의 용사 앞에서 미디안 군대를 도망하게 하시며, 하룻밤 사이에 교만한 앗시리아 군대를 쳐부수신 하나님께서 억압자의 세력을 꺾으시기 위하여 당신의 손을 다시 한 번 펴셨던 것이었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 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시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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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왕교의 지도자들은 무력으로 정복하는 일을 단념하고, 드디어 권모술수 (權謀術數) 를 쓰게 되었다. 표면으로는 보헤미아인들의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노라고 공언하면서 실지로는 그들을 로마의 권력에 넘겨주는 타협책을 쓰게 되었다. 보헤미아 사람들은 로마와 화해하는 조건으로 다음의 네 가지 점을 분명히 밝혔다. 성경을 강론하는 자유, 모든 교인들이 성만찬 예식에 참석하여 떡과 포도즙을 나눌 수 있고 예배 시간에 각각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 성직자가 모든 세속적인 직위와 권력에서 제외되는 일,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일반 법정의 사법권이 성직자나 일반인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취급하는 일 등이었다. 드디어 법왕측은 “후스의 신봉자들이 제출한 네 가지 조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 조문의 명확한 의미를 결정하는 해석권은 종교 회의 즉 법왕과 황제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Wylie, b.3, ch.18). 이러한 조건 아래 조약은 맺어지고, 로마는 투쟁으로 얻지 못한 것을 허위와 사기로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후스의 신봉자들이 제시한 조건들에 대하여서도 성경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저들이 독자적인 해석을 내림으로써 그들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그 조문들의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보헤미아인들은 그 조약이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불화와 분열이 생기고 나중에는 투쟁과 유혈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 내란으로 인하여 고상한 프로코피우스 장군은 죽고, 보헤미아인의 자유는 없어졌다.

후스와 제롬을 배반한 시기스문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으며, 그는 보헤미아인의 권리를 옹호하겠노라고 한 자신의 서약에도 불구하고 법왕권의 확립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그가 로마를 추종하므로 얻은 것은 별로 없었다. 20년간의 그의 생애는 수고와 위험으로 충만하였다. 오랫동안의 쓸데없는 전투로 그의 군대는 쇠잔하여졌고, 그의 재물은 고갈되었다. 그는 1년을 통치한 후에 국가를 내란 일보 직전에 버려둔 채 불명예로 낙인찍힌 이름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면서 죽었다.

보헤미아인의 인내와 기대

소란과 쟁투와 유혈 사태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외국의 군대가 다시 보헤미아에 침입하였고, 국내의 내분 (內紛) 은 계속적으로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끝까지 복음을 위하여 충성한 사람들은 지독한 박해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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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옛날의 형제들이 로마교와 조약을 맺어 그 오류의 영향을 받고 있을 때, 초기의 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은 “연합된 형제들”이라는 이름으로 특수한 교회를 조직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각층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확고한 태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산림과 동굴 속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함께 모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여러 나라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여기저기에 진리를 아는 자가 있는 것과, 그들은 비록 소수이지만 여러 읍과 촌에 흩어져 있으면서 그들처럼 박해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과, 또한 알프스 산 중에는 성경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교회가 있으며 그 곳에서 우상 숭배로 부패된 로마를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Wylie, b.3, ch.19). 이러한 정보는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으며, 그들은 왈덴스인들과 교통하게 되었다.

보헤미아인들은 복음을 굳게 지키면서 박해의 어두운 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가장 어두운 시간에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멀리 지평선 저쪽을 주목하여 보았다. “그들은 실로 어려운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후스에게서 처음으로 듣고, 제롬에게서 다시 반복하여 들은 말, 곧 새벽이 오려면 한 백년은 지나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말은 후스의 신봉자들에게 있어서 마치 애굽에 속박되어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 요셉의 유언, 곧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사 허락하신 땅에 돌아가게 하시리라’고 한 유언과 같았다” (Wylie, b.3, ch.19). “15세기 말엽이 되자 ‘연합된 형제들’의 교회는 더디기는 하였으나 확실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고난을 면한 것은 아니었으나 비교적 평화를 누렸다. 16세기 초엽에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그들의 교회가 약 200곳 정도 있었다” (Ezra Hall Gillett, Life and Times of John Huss, vol.2, p.570). “그러므로 불과 검의 멸망과 분노에서 벗어난 남은 자로서 후스가 예언한 그대로 새벽을 맞이한 사람들은 상당히 많았다” (Wylie, b.3, ch.19).

각 시대의 대쟁투 pp. 10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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