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08일

그는 세 번째의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국내의 최고 종교 재판소에서 받았다. 이곳은 이단자에게 아무런 유리한 판결이 내릴 수 없는 곳이다. 여기에서 로마교는 최후의 승리를 얻고, 개혁자의 활동은 정지되리라고 법왕교도들은 생각하였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그들의 목적을 성취할 수만 있다면 위클리프는 하는 수 없이 자기의 교리를 버리든지 화형의 선고를 받고 법정을 떠나가든지 할 것이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자기의 교리를 철회하지도 않고 숨기지도 않았다. 그는 두려움 없이 자기가 가르치는 바를 주장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비난을 반박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위치와 자기의 환경을 다 잊어버리고, 그의 청중들을 하나님의 심판정에 세워 놓고, 그들의 궤변과 기만을 영원한 진리의 저울로 달았다. 성령의 권능이 그 법정 안에 충만하였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상한 힘이 청중들에게 임하였다.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갈 힘이 없는 듯이 보였다. 개혁자의 말은 마치 하나님의 전통 (箭筒) 에서 나온 화살처럼 듣는 이들의 마음을 찔렀다. 그를 이단이라고 비난했던 그들의 고소를 그는 설복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이제 그 사람들에게 되돌렸다. 어찌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오류를 퍼뜨리고자 하였는가라고 그는 부르짖었다. “이 (利) 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상품화하고자?”

그는 또 마지막으로, “그대들은 누구와 더불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늙은이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대들은 진리, 곧 그대들보다 더욱 강하며 마침내 그대들을 이기고야 말 진리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것이다” (Wylie, b.2, ch.13) 라고 말하였다. 그렇게 말한 다음에는 법정을 나왔으나 그의 원수들 중에서 한 사람도 그를 막는 자가 없었다.

법왕에 대한 최후의 경고

위클리프의 사업은 거의 마쳐졌다. 오랫동안 쥐고 있던 진리의 깃발은 곧 그의 손에서 떠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복음을 위하여 증거할 것이었다. 그 진리는 바로 오류의 왕국의 본거지에서 선포되어야 할 것이었다. 위클리프는 심문을 받기 위하여 너무도 자주 성도들의 피를 앗아간 로마법왕의 재판정에 호출되었다. 그는 자기를 위협하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그 소환에 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침 그 때 그는 중풍으로 여행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육성으로는 로마에서 말할 수 없었을지라도 편지로는 말할 수 있었으므로, 그는 결국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자기의 목사관에서 법왕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는 예의바른 언사와 그리스도인적 정신이 나타나 있었으나 법왕청의 허식과 교만을 날카롭게 견책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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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모든 사람, 특히 로마 주교 (법왕) 에게 공개하여 주장할 수 있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이 신앙이 건전하고 참된 줄로 믿기 때문에 그는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내가 주장하는 신앙에 동의할 줄로 믿으며, 만일 그 신앙이 잘못된 것이라면 역시 교정하여 줄 줄로 믿는다.

나는 첫째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전부라고 믿는다. …로마 감독이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면,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복음의 율법에 결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서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세속적 위엄이나 명예에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태도에 가깝게, 또한 정확하게 따라가고 있는 점에서 그러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을 당시의 생애는 가장 빈곤하고, 모든 세속적 권력과 명예에서 떠난 생애였다.

어떤 신실한 사람도 법왕이나 어떤 성인을 따라갈 때, 그들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간 그 점에 있어서만 그를 따라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대신에 세속적 명예를 사모함으로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와 같은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

법왕은 자기의 모든 영토와 통치권을 세속적 권력에게 마땅히 넘겨주고, 또한 자기에게 속한 모든 교직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고, 특별히 그분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점들에 있어서 내게 잘못이 있으면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이를 정정 (訂正) 할 것이며, 만일 필요하다면 죽음이라도 사양치 아니할 것이다. 내 자신의 뜻과 소원대로 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로마 감독 앞으로 달려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와 반대로 다른 일이 내게 생기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사람을 순종하기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가르쳐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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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를 마쳤다. “우리 하나님께서 법왕 어반 6세의 마음을 감동하사 그가 친히 본을 보여 그의 교직자들과 함께 그 생활과 태도에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또한 그들이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쳐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신실히 주님을 따르게 되기를 우리는 기도하는 바이다” (John Foxe, Acts and Monu-ments, vol.3, pp.49, 50).

이와 같이 위클리프는 법왕과 그의 추기경들에게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나타내 주었고 이들이 대표하고 있노라고 공언하는 주님과 그들 자신과의 현저한 차이를 그들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국에 나타내 보여 주었다.

위클리프의 신앙과 성경

위클리프는 자기가 하나님께 계속해서 충성한다면 자기의 생명이 희생당할 것이라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왕과 법왕과 감독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그는 늦어도 수개월 후에는 틀림없이 화형에 처하게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순교자의 면류관을 멀리서 찾고 있노라고 말하느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 교만한 주교들에게 전하라. 그리하면 순교는 틀림없이 오고 말 것이다. 살아서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결단코 안 될 말이다. 탄압하려거든 해보라. 나는 그 일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다” (D’Aubigne, b.17, ch.8).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여전히 당신의 종을 보호하였다. 자기의 온 생애를 통하여 날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담대히 진리를 옹호하고 있는 이 사람은 원수들의 증오의 희생물로 쓰러질 것이 아니었다. 위클리프는 전혀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지 아니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보호자가 되셨다. 바야흐로 그의 원수들이 틀림없이 그를 희생 제물로 삼을 수 있다고 느낀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손은 그들의 손이 미치지 못할 곳으로 그를 옮기셨다. 그는 루터워드에 있는 자기의 교회에서 성찬식을 집례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중풍병으로 쓰러졌는데 그 얼마 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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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위클리프에게 그의 사업을 지정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에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이 백성들에게 전해지게 하시고자 그의 신변을 지키셨다. 그리하여 개혁의 위대한 사업을 위한 기초가 놓일 때까지 그의 생명은 보호되고, 그의 활동은 연장되었다.

위클리프는 암흑시대의 흑암 속에서 나타났다. 그와 같이 개혁 사업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 그 전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침례 요한과 같이 그는 특수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일어난 새 시대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가 밝혀낸 진리의 체계는 그 후의 개혁자들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것들은 그 후 백년이 지나서도 미칠 수 없을 만큼 통일성과 완전성이 있었다. 그 기초는 넓고 깊으며, 그 구조는 튼튼하고 완전하므로 그 후에 나타난 사람들이 그것을 재건할 필요가 없었다.

위클리프가 착수한 위대한 운동, 곧 양심과 지성을 해방시켜 주고, 질곡 (桎梏) 에 속박되어 있던 여러 나라들에게 자유를 준 운동의 근원은 성경이다. 14세기 이래 각 시대를 통하여 마치 생명수처럼 흘러내린 축복의 근원은 바로 성경이었다. 위클리프는 단순한 마음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영감의 계시요, 믿음과 행실의 완전한 표준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일찍이 로마교회를 거룩하고 절대 무류의 권위를 가진 교회로 여기고, 천여 년 동안에 걸쳐서 확립된 그 교리와 관습을 절대적인 존경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들로부터 돌아섰다. 이 거룩한 말씀은 그가 백성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자 역설한 권위의 말씀이었다. 유일의 참 권위는 법왕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뜻의 완전한 계시인 동시에, 성령께서 성경의 유일한 해석자이므로 모든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연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본분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하여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법왕과 로마교회로부터 성경 말씀으로 돌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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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의 인격과 사업

위클리프는 가장 위대한 개혁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해박한 지식, 명석한 사고력, 진리를 주장할 때 보여준 확신, 그리고 진리를 옹호하기 위한 담력 등은 그보다 후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서도 그와 필적할 사람이 별로 없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지적으로 몽매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시대였지만, 이 최초의 개혁자의 봉사는 생애의 순결, 연구와 활동에 있어서의 근면, 매수되지 않는 청렴, 사업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과 충성 등으로 특징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위클리프의 인격은 성경이 사람을 교육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을 증명해 주는 좋은 예증이 된다. 과연 성경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인물이 되게 하였다. 계시에 나타난 위대한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노력은 모든 기능에 새로움과 활기를 준다. 그것은 마음을 넓혀 주고, 이해력을 예민하게 해주고, 판단력을 성숙하게 해준다. 성경 연구는 어떤 연구보다도 사상과 감정과 욕망을 더욱 정화 (淨化) 시켜 줄 것이다. 그것은 견인불발의 정신과 인내와 용기와 굳센 마음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품성을 세련시켜 주고, 심령을 거룩하게 만들어준다. 성경을 존중하고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의 마음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직접 접촉하게 되므로, 어떠한 인간적인 철학이 가져다주는 가장 훌륭한 결과보다 더욱 고상한 원칙은 물론이요, 더욱 강하고 적극적인 지성을 갖춘 인물이 되게 해줄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시 119:130) 고 말하고 있다.

위클리프가 가르친 교리는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널리 전해졌다. 그를 따르는 자들, 곧 위클리프 교도와 롤라드 교도라고 불리는 무리들은 영국에 복음의 지식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도 그것을 가지고 나아갔다. 이제 지도자는 없어졌으나 그 전도자들은 전보다도 더욱 큰 열성으로 일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개한 사람들 중에는 귀족도 있고 왕비도 있었다. 많은 곳에서 사람들의 생활 상태가 현저하게 개혁되었고, 로마교의 우상적 상징은 교회에서 제거되었다. 그러나 무자비한 박해의 폭풍이 성경을 그들의 지도자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곧 몰려왔다. 영국의 국왕들은 로마 법왕의 지지를 얻어 자기들의 권세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개혁자들을 희생시키는 일을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영국 역사상 최초로 복음의 사도들에 대하여 화형의 선고가 내렸다. 순교자가 계속하여 뒤를 이었다. 법률의 보호를 박탈당하고 고문에 시달리는 진리의 옹호자들은 만군의 여호와께 부르짖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들은 교회의 원수요 국가의 반역자로 누명을 쓰고 추격을 받으면서도 몰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빈궁한 자들의 집을 그들의 가장 좋은 은신처로 삼았고, 때때로 굴 속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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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타락한 종교의 세력을 대항하여 전개한 조용하고, 경건하고, 열렬하고, 꾸준한 반항은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일부분밖에 알지 못하였다. 마치 사도 시대의 제자들과 같이 여러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세상의 재물을 희생하였다. 다행히 가정에서 살도록 허락 받은 사람들은 추방당한 형제들을 기꺼이 숨겨 주었고, 그들 역시 추방을 당해야 할 경우에는 즐거이 그 운명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 중에는 박해자들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신앙을 희생하여 자유를 얻고, 참회자의 옷을 입고 감옥에서 나와 신앙의 취소를 선언한 자들도 수천 명이 있었다. 그러나 감옥과 롤라드탑 (塔) 에 갇히든지, 심지어는 고문과 화형을 받을지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두려움 없이 기쁨으로 진리를 위하여 증거한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빈궁하고 비천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귀족 출신의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종말

법왕교도들은 위클리프가 살아 있을 동안에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몸이 무덤에서 조용히 쉬고 있을 동안에도 그들의 증오심은 충족되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지 40여 년 후에 열린 콘스탄스 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그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태우고, 그 재를 그 근처에 흐르고 있는 시냇물에 던져 버렸다. 그 사실에 대하여 옛날의 한 저술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시냇물은 그 재를 아본 시내로, 아본 시내는 세버언 강으로, 세버언 강은 영국 해협으로, 영국 해협은 대양으로 옮겨 주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재는 오늘날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그의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 (T.Fuller, Church History of Britain, b.4, sec.2, par.54). 그의 원수들은 자신들의 악의에 찬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보헤미아의 얀 후스 (John Huss) 가 로마교의 많은 오류를 버리고 개혁 사업을 착수한 것은 위클리프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그 두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진리의 씨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뿌려졌다. 그 사업은 보헤미아에서 다른 나라로 확장되어 나갔다. 사람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손이 위대한 종교개혁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각 시대의 대쟁투 pp. 9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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