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44일

27 장 — 신앙 부흥과 참된 회개

신앙 부흥과 죄의 자각

하나님의 말씀이 충실히 전해진 곳은 어디에서나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증명하는 결과들이 뒤따랐다. 하나님의 영이 그분의 종들이 전하는 기별과 함께 하였으므로 그 말씀에 권능이 있었다. 죄인들은 그들의 양심이 각성됨을 깨달았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이 그들의 마음의 비밀을 비추고 어두운 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었다. 그들의 정신과 마음에 깊은 확신이 생겼다. 그들은 죄와 의와 장차 올 심판을 깨달았다. 그들은 여호와의 의를 깨달음과 동시에 그들의 죄와 부정 가운데서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일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번민 중에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었다.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무한한 희생을 지불한 갈바리의 십자가가 분명히 나타나자 그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그들의 죄를 충분히 속 (贖) 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믿음과 겸손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받아들였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들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 그들은 믿고 침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생애를 하기 위하여 일어났다. 그들은 전에 행하던 그들의 정욕을 따라 자기 자신들을 꼴 짓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주님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그들 자신을 깨끗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에 미워하던 것을 이제는 사랑하고, 전에 사랑하던 것을 이제는 미워하게 되었다. 교만하고 자기 주장만 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 허영적이고 교만한 사람들이 착실하고 조심성 있게 되었다. 불경 (不敬) 한 자가 경건해지고 술주정뱅이가 술을 끊고, 방탕하던 자가 순결해졌다. 세상의 허영은 버려졌다. 그리스도인들은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3, 4) 는 권면을 따르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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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부흥은 마음을 깊이 살피는 일과 겸비한 정신을 주었다. 그 부흥들은 죄인에 대한 엄숙하고 열렬한 호소로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산 영혼들에 대한 애절한 동정으로 특징지어졌다. 남녀들은 기도하고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과 씨름하였다. 그와 같은 신앙 부흥의 결과로 극기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난과 시련 받는 것을 합당히 여기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생애에 나타난 변화를 바라보았다. 지역 사회는 그들의 감화로 유익을 얻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모이고 성령으로 씨를 뿌리고 영생을 거두었다.

그들은 “근심함으로 회개”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후 7:9~11).

그릇된 신앙 부흥

그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하신 결과이다. 개혁이 따르지 않으면 참된 회개가 아니다. 죄인이 서약한 것을 이행하고, 도둑질한 것을 돌려주고,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과 화친한 증거를 보인 셈이다. 이전에 있었던 종교적 각성에 뒤따랐던 결과들은 이러하였다. 그들이 맺은 열매로써 그들은 사람을 구원하고 인류를 향상시키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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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근래에 행하여지는 신앙 부흥은 하나님의 종들의 활동에 수반되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과는 아주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광범위하게 흥미가 고조되고, 많은 사람이 회심을 고백하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참된 영적 생명이 그만큼 향상된 것을 보증할 만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타오르는 불길은 오래지 않아 꺼져 버리고 흑암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심해진다.

인기 있는 신앙 부흥은 너무도 흔히 사람의 상상력에 호소하고 감정을 자극하며 새롭고 놀랄 만한 것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회개한 자들은 성경의 진리에 별반 귀를 기울이고자 아니하고 선지자와 사도들의 증언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아니한다. 종교 집회에 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특성이 없으면 그들은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냉철한 이성에 호소하는 기별은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들의 영원한 유익과 직접 관련되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에도 그들은 유의하지 않는다.

참으로 회개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영원한 사물에 대한 관계는 인생의 큰 주제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 인기 있는 교회에 하나님께 헌신하는 정신이 있는가? 회심하였노라고 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교만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들은 회개하기 전과 다름없이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종교인으로 자처하면서도 그 원칙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 때문에 종교는 무신론자들과 회의론자들의 놀림감이 되어 버렸다. 경건의 능력은 많은 교회에서 거의 떠나갔다. 야유회, 연극, 자선시 (慈善市), 굉장한 건축, 개인들의 사치 등이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제거해 버렸다. 토지와 재산과 세속적 직업이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서 영원한 이익에 속한 사물을 거의 주목해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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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교회에 대한 사단의 공격

믿음과 경건의 보편적인 퇴보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를 진실히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세상에 내리기 전에 주님의 백성 중에는 사도 시대 이래 일찍이 목격하지 못한 근본적인 경건의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과 권능이 그분의 자녀들 위에 부어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대신에 이 세상을 사랑하는 그러한 교회들에서 분리되어 나올 것이다. 목사들과 신자들을 막론한 많은 사람들이 주의 재림을 위하여 백성을 준비시키고자 이 시대에 전파되고 있는 큰 진리를 즐거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원수는 이 일을 방해하려고 이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가짜 운동을 꾸며 냄으로써 이를 막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의 기만의 세력 아래 모이는 교회들 가운데는 마치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내린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적 큰 부흥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도록 나타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실상은 전혀 다른 영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놀라운 정도로 역사하고 계신다고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단은 종교의 가면을 쓰고 자기의 세력을 모든 그리스도교계에 확장하기에 진력할 것이다.

과거 반세기 동안에 일어난 신앙 부흥의 대부분에는 다소간 그와 같은 영향이 활동해 왔던바 장래에는 더욱 광범위한 운동들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진리와 허위가 혼합된 감정적 흥분이 있으며 그것은 오도되기 쉽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속임을 받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보면 그런 운동의 내용을 분별하기가 결코 어렵지 않다. 무릇 사람이 성경의 증거를 등한히 하고, 극기하고 세속을 버리도록 요구하는 분명하고 심령을 살피게 하는 진리에서 돌아설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마 7:16) 라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신 법칙에 의하면 이런 종류의 운동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이 분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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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진리를 통하여 당신 자신에 관한 계시를 주셨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사단의 속임수에서 보호를 받는다. 오늘날 일반 종교계에 널리 퍼져 있는 악이 들어오도록 문이 열린 것은 진리들을 등한히 한 결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의 특성과 중요성은 대부분 상실되었다. 하나님의 율법의 성격과 영속성과 그 의무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 회개와 성화의 관계에 대한 오류를 가져왔고 그 결과로 교회내의 경건의 표준이 낮아졌다. 우리 시대의 신앙 부흥 가운데 하나님의 영과 권능이 결핍된 원인이 여기에 있다.

교회의 미지근한 상태

오늘날 각 교파에서 경건한 신자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고 개탄하고 있다. 에드워드 에이 파크 교수는 종교계가 당면한 위기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위험의 한 가지 원인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강조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강단이 양심의 소리가 메아리치는 곳이었다. …우리의 가장 유명한 설교자들은 주님의 본을 따라 강단에서 율법과 그 교훈과 그 엄숙한 명령을 명백히 가르쳐 줌으로써 언제나 놀랄 만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항상 두 가지 큰 원리를 반복하여 말하였으니 곧 율법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나타내는 사본이며 율법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복음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두 가지의 큰 원리를 반복하였다. 왜냐하면 율법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참 품성을 반사하는 하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이 율법을 사랑하지 않는 위험은 죄의 흉악성, 죄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죄의 결점들을 과소평가하는 위험을 가져온다. 율법을 거역함으로 조성되는 악은 그 율법이 지닌 의에 비례된다. …

이미 언급한 위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과소평가하는 위험이다. 오늘날 강단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경향은 하나님의 공의를 하나님의 자비와 분리시키고 그 자비를 원칙으로 높이지 않고 하나의 감정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른바 신신학 (新神學) 은 하나님께서 결합시켜 놓은 것을 산산조각으로 해체시켜 버렸다. 하나님의 율법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물론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도 선한 것이다. 왜냐하면 공의는 율법을 집행하게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 인간의 불순종과 죄의 범위를 과소평가하는 습관 때문에 사람들은 죄를 속하기 위하여 마련된 은혜도 과소평가하는 습관을 이루기 쉽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서 복음의 가치와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미구에 성경 자체까지도 내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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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율법관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으로 율법을 폐하셨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 사람이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마치 무거운 멍에처럼 나타내고 율법의 속박과 복음 아래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대조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윗은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시 119:45) 라 하였다. 사도 야고보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에 십계명을 “최고한 법” 또한 “온전한 율법”이라고 말하였다 (약 2:8, 1:25). 또한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반세기 후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 (영어 흠정역 성경에는 ‘계명을 지키는 자’로 번역되었음) 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함이로다” (계 22:14) 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율법을 폐하셨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다. 만일 하나님의 율법이 변경되거나 폐지될 수 있었다면 사람을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을 폐지하기는커녕 율법의 불변성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 (사 42:21 난외 주석) 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 (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7, 18) 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시 40:8) 고 언명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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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그 본질상으로 불변이다. 그것은 율법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품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그분의 율법도 사랑이다. 율법의 두 가지 큰 원칙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게 대한 사랑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 (롬 13:10) 다. 하나님의 품성은 의며 진리이다. 그의 율법의 본질도 마찬가지이다.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 (시 119:142, 172) 니이다고 말한다. 또한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2) 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의 표현이므로 그 창시자와 같이 영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람을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과 일치되게 해줌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해주는 것이 회개와 성화의 사업이다. 태초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과 본성에 완전히 조화를 이루었다. 의의 원칙이 그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죄가 창조주와 사람을 분리시켰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과 반대되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7).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창조주와의 조화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져야 하고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와같은 변화는 새로 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율법과 신앙과의 관계

하나님과 화목하는 첫째 계단은 죄를 깨닫는 것이다.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죄인이 죄를 깨달으려면 먼저 자기의 품성을 하나님의 위대한 의의 표준에 비추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의로운 품성의 완전함을 보여 주는 거울로서 죄인에게 그의 결함을 분별하게 해준다.

율법이 사람에게 그의 죄를 나타내 보여 주기는 하지만 죄를 치료해주지는 못한다. 율법은 순종하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해 주는 반면에 율법을 범하는 것이 죽음임을 선고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죄의 선고와 더러움에서 사람을 해방시킬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으므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그의 속죄 제물로 믿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용서를 받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양자의 영을 받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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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여도 무방한가?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2) 라고 말한다.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고 하였다. 새로 남으로써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됨과 동시에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 위대한 변화가 죄인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면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성결로, 범죄와 반역에서 순종과 충성으로 옮겨지게 된다. 하나님과 멀어져 있던 옛 생애는 끝나고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화목의 생애가 시작된다. 그리하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롬 8:4) 한다. 그 때에 심령에서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시 119:97) 고 외치게 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시 19:7) 한다. 율법이 없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성성과 순결, 그리고 자기 자신들의 죄와 불결에 대하여 올바른 관념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로서의 그들의 속절없는 상태를 알지 못하고 속죄하는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함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도, 생애의 개혁도 없이 구원의 소망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피상적인 회개가 보편화되고 결코 그리스도와 연합한 경험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된다.

각 시대의 대쟁투 pp. 46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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