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시대의 대쟁투 – 21일

14 장 — 후기 영국의 개혁자들

성경 번역 사업의 발전

루터가 봉하여진 성경을 독일 백성들에게 열어 주고 있는 동안 틴덜 (Tyndale) 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영국에서 같은 일을 하였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위클리프가 라틴어 성경에서 이미 성경을 번역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잘못 번역된 데가 많았다. 그것은 또한 인쇄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이 대단히 비싸서 부자나 귀족이 아니면 가질 수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교회에서 그 성경을 엄격하게 금지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좁은 범위에 걸쳐서 보급되었다. 1516년, 곧 루터가 95개조를 공개하기 일 년 전에 에라스무스가 헬라어와 라틴어의 신약 성경을 발행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원어 (original tongue) 로 출판된 일이었다. 이 성경으로 말미암아 그전에 번역된 성경에서 잘못된 점이 정정되고 의미가 훨씬 더 분명하여졌다. 그리하여 교양 있는 사람들이 더욱 철저하게 진리의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고, 개혁 사업에 대하여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부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자기 나라의 백성들에게 성경을 보급함으로써 위클리프의 사업을 완성시키고자 한 사람이 곧 틴덜이었다.

근면한 학도요, 열렬한 진리의 탐구자였던 그는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깨달은 바를 두려움 없이 전파하고, 모든 교리를 성경에 비추어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교회가 성경을 주었기 때문에 오직 교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법왕교도들의 주장에 대하여 틴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너희는 누가 독수리에게 먹을 것을 찾도록 가르쳐 주었는지 아느냐?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굶주린 자녀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아버지를 찾아내도록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성경을 우리에게 주기는커녕 우리에게서 감추고 있는 사람들은 너희들이다.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을 화형시키는 사람들은 너희들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할 수만 있으면 성경 자체까지도 불살라 버릴 것이다” (D’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b.18, ch.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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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덜의 영어 신약 성경

틴덜의 설교는 큰 흥미를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부들도 끊임없이 경성하여 그가 전도하던 장소를 떠나기만 하면 곧 위협과 무고 (誣告) 로써 그의 사업을 무너뜨렸다. 그리하여 여러 번 그들은 그 일에 성공하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그는 부르짖었다. “내가 한 곳에서 씨를 뿌리고 있는 동안 원수는 이미 씨를 뿌린 밭을 망가뜨려 버린다. 나는 동시에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나라의 말로 된 성경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궤변자들을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없이는 일반 신자들을 진리 안에 굳게 세울 수 없다” (D’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b.18, ch.4).

이제 새로운 목적이 그의 마음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는 말하였다. “이스라엘 사람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시편을 송영한 것은 이스라엘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영국 말로 복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가?…교회는 대낮에 새벽빛보다 더 희미한 빛을 가져야 할 것인가?…그리스도인들은 신약 성경을 반드시 자국어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의 박사들과 교사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오직 성경으로써만 사람들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박사의 의견을, 다른 사람은 저 박사의 의견을 지지한다. … 저자 (著者) 들은 피차에 의견이 합하지 않는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누가 바르고 누가 그릇된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이다” (D’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b.18, ch.4).

그 일 후 오래지 않아서 학식 있는 로마교의 한 박사는 그로 더불어 논쟁하면서 “우리는 법왕의 율법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틴덜은 “나는 법왕과 그의 모든 율법을 무시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보전하여 주신다면 오래지 아니하여 나는 밭을 갈고 있는 소년이 그대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도록 할 것이다” (Anderson, Annals of the English Bible, p.19) 고 대답하였다.

자기 나라의 말로 된 신약 성경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마음속에 간직하기 시작했던 틴덜의 목적은 한층 더 굳어졌다. 그리하여 그는 곧 그 사업에 몰두하였다. 그는 박해로 인하여 집에서 쫓겨나서 런던으로 갔다. 그는 얼마 동안 그 곳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그의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는 법왕교도들의 폭동으로 다시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온 영국이 그에 대하여 봉쇄된 듯하였으므로 그는 독일에서 피난처를 찾고자 결심하였다. 거기서 그는 영어 신약 성경의 인쇄를 시작하였다. 두 번이나 그의 사업은 정지를 당하였으나 이 도시에서 인쇄할 수 없으면 저 도시로 가고, 저 도시에서 인쇄할 수 없으면 또 다른 도시로 갔다. 마침내 그는 보름스를 향하여 갔는데, 그 곳은 몇 년 전에 국회에서 루터가 복음을 옹호한 곳이었다. 이 고대 도시에는 개혁 사업의 친구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틴덜은 더 이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그의 사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3천부의 신약 성경이 출판되었으며, 같은 해에 다시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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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큰 열심과 인내로써 사업을 계속하였다. 영국 당국자들이 물샐틈없이 각 항구를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런던으로 몰래 건너가게 되었고, 거기서 다시 전국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법왕교도들은 진리를 억압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지마는 모두 허사가 되었다. 한 번은 더햄 (Durham) 의 감독이 성경을 판매하는 틴덜의 동료로부터 성경을 있는 대로 다 샀다. 그는 그 성경들을 없애 버림으로 개혁 사업을 크게 방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그 감독이 낸 돈이 아니었다면 발행할 수 없었던 새롭고 더욱 좋은 신판을 낼 수 있는 재료를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 틴덜이 체포당하였을 때, 그는 성경 인쇄의 비용을 대어 준 사람의 이름을 알려 주면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욱 많은 보조를 해준 사람이 더햄의 감독이었다고 대답하였다. 그 감독이 막대한 금액으로 성경을 사들인 까닭에 틴덜은 한층 용기를 얻어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틴덜은 배반자로 인하여 원수들의 손에 잡히어 여러 달 동안 감옥에서 고생을 하였다. 그는 마침내 순교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그가 마련해준 무기는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통하여 복음의 군병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전쟁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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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개혁자들이 많이 나옴

래티머 (Latimer) 는 성경을 자기 나라의 말로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설교단에서 힘있게 주장하였다. 그는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 자신이며”, 성경은 그 저자의 능력과 영원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어떤 왕이나 황제나 장관이나 통치자든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순종할 의무에서 벗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곁길로 들어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를 받도록 하자.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간 길이나 행한 일을 따르거나 행하고자 할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하여야 한다” (Hugh Latimer, “First Sermon Preached Before King Edward VI”).

틴덜의 친구 반즈 (Barnes) 와 프리드 (Frith) 가 진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일어났다. 그리고 리들리즈 (Ridleys) 와 크랜머 (Cranmer) 가 또 그 뒤를 이어 일어났다. 영국의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학식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중의 대부분이 로마교에서 열성과 경건으로 크게 존경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법왕교를 반대하게 된 것은 법왕청의 잘못을 안 결과였다. 그들은 바벨론의 비밀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욱 큰 능력으로 그것에 항거하는 증언을 하였다.

래티머는 말하였다. “나는 지금 하나의 이상한 질문을 하겠다. 온 영국에서 누가 가장 충성스러운 주교이며 감독이냐?…내가 부르는 사람의 이름을 명심해서 들어라. …나는 말하노니 그는 악마이다. …그는 그의 교구 밖을 결코 나가지 않는다. 언제든지 부르고 싶을 때에 그를 불러보라. 그는 항상 집에 있다. …그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그대는 그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으리라고 나는 보증한다. …악마가 사는 곳에서는…책을 치워 버리고 촛대를 놓고 있으며 성경을 치워 버리고 염주를 세고 있으며 복음의 빛을 버리고 대낮에도 촛불을 높이 들며,…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넘어뜨리고 돈을 빼앗는 연옥 (煉獄) 을 세우며,…헐벗고,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에게 옷을 입히는 대신에 여러 가지 재료와 보석으로 우상을 장식하며, 하나님의 전통과 그분의 가장 거룩한 말씀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과 율법을 높인다. …아! 우리의 승려들도 마치 사단이 잡초와 가라지를 뿌리려고 부지런히 애쓰는 것처럼 좋은 교리의 씨를 부지런히 뿌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Hugh Latimer, “Sermon of the pl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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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혁자들이 주장한 위대한 원칙은 왈덴스인들과 위클리프와 얀 후스와 루터와 츠빙글리와 그들과 연합했던 동지들이 주장한 원칙들과 똑같은 것으로, 그것은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 되는 성경이 절대무류 (絶對無謬) 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원칙이었다. 그들은 법왕과 종교 회의와 교부들과 왕들이 종교 문제로 사람의 양심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그들의 권위는 성경이었으므로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여 모든 교리와 모든 주장을 시험하였다. 그 거룩한 사람들은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하나님과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지탱되었다. 래티머는 그와 함께 곧 화형에 처해질 그의 동료에게 이렇게 부르짖었다. “안심하라. 내가 믿기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서 결단코 소멸되지 않을 촛불을 우리는 켤 것이다” (Works of Hugh Latimer, vol.1, p.Xiii).

스코틀랜드 종교계의 형편

콜룸바 (Columba) 와 그의 동역자들로 말미암아 스코틀랜드에 뿌려진 진리의 씨는 완전히 멸절되지 아니하였다. 영국의 교회들이 로마 법왕에게 복종한 이후에도 수백 년 동안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2세기에 이르러 법왕교가 이 나라에 세워지게 되자 다른 어떤 나라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절대권을 휘둘렀다. 이곳처럼 암흑이 심한 곳은 다른 어떤 곳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도 빛이 비치어 가려진 암흑을 뚫고 내일을 약속해 주었다. 성경과 위클리프의 교리를 가지고 영국에서 온 롤라드인들 (Lollards) 은 복음의 지식을 보존하게 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여러 세기 동안 복음의 증거자와 순교자를 배출해 내게 되었다.

대종교 개혁이 시작됨과 동시에 루터의 저서가 들어오고, 다시 틴덜의 영어 신약 성경이 전해졌다. 이러한 저서들은 교권의 감시를 받지 않고 조용히 산과 골짜기들을 넘어서 스코틀랜드에서 거의 꺼져가던 진리의 등불에 새로운 생기를 주었다. 그리하여 4백 년간의 압박이 이루어 놓은 로마의 사업을 무너뜨렸다.

또한 순교자의 피가 그 운동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사업이 위협을 당하게 된 것을 깨닫자, 즉시로 스코틀랜드의 가장 고귀하고 명망 있는 사람 중의 몇을 화형에 처하였다. 그런데 로마교의 당국자들은 그들에게 강단 (講壇) 을 만들어 주었으며, 거기서 나오는 죽어가는 증인들의 임종의 말이 온 나라에 울려 퍼져서 사람들의 마음에 로마의 굴레를 벗어나야겠다는 불멸의 목적을 갖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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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턴 (Hamilton) 과 위샤트 (Wishart) 두 사람은 가문도 좋고 인격도 고상한 사람들이었는데 겸손한 많은 제자들과 함께 화형주에서 그들의 생명을 마쳤다. 그러나 위샤트의 화형주로부터 불꽃으로도 침묵시킬 수 없는 사람, 곧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스코틀랜드의 법왕교를 몰락시킬 한 인물이 나타났다.

존 녹스 (John Knox) 는 로마교의 전설과 신비주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위샤트의 가르침을 통하여 로마교를 벗어나고자 확고하게 결심하고 박해를 받는 개혁자들에게 가담하게 되었다.

개혁의 선봉자 녹스

그는 동료들로부터 복음의 사자가 되라는 권고를 받았을 때에 그 책임의 중요성을 두려워하여 오랫동안 주저하였다. 그는 여러 날을 집안에 틀어박혀 생각하고 번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단 그 일을 맡게 되자 그는 확고한 결심과 불굴의 용기로써 생명이 다할 때까지 전진하였다. 이 충성되고 열렬한 개혁자는 사람의 낯을 전연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박해의 불꽃은 그의 열성을 더욱 가중시키는 촉진제가 될 뿐이었다. 압제자의 도끼가 그의 머리를 위협하면서 들려 있을지라도 그는 자기의 자리에 굳게 서서, 바른손으로는 강한 타격을 주고, 왼손으로는 우상 숭배를 분쇄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을 직접 대면했을 때 개혁파의 지도자들 중에는 그들의 열성을 죽여 버린 자가 적지 않았으나 존 녹스는 진리를 위하여 확고히 증거하였다. 그는 무마책으로 매수당하지 않았고, 위협으로 위축당하지도 않았다. 여왕은 그에게 이단자라는 죄를 선고하였다. 여왕은 그가 국가에서 금지하는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그로 인하여 위에 있는 자를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녹스는 확실하게 대답하였다.

“바른 종교는 세상 임금에게서 세력이나 권위를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므로 어떤 백성들도 자기들의 종교를 임금의 기호에 따라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임금들 중에는 하나님의 참 종교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보다도 한층 더 무지한 사람이 흔히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의 후손이 모두 오랫동안 속하여 있던 바로의 종교를 받아들였을 것 같으면 이 세상에는 어떠한 종교가 남아 있겠습니까? 혹은 사도 시대의 모든 사람이 로마 황제의 종교를 받아들였다면 오늘날의 세상에는 어떠한 종교가 있게 되었겠습니까? …비록 백성들은 임금들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을지라도 여왕 전하여, 신교 (信敎) 에 있어서는 백성들이 그 왕들의 종교에 매여 있지 않음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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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 메리는 말하였다. “너는 성경을 이런 의미로 해석하고, 그들 (로마교의 교사들) 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면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며, 누가 판단을 해줄 것인가?”

“여왕 전하께서는 성경이 밝히 말한 하나님을 믿으시면 그만입니다. 거룩한 말씀이 여왕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는 이편 말이나 저편 말이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분명합니다. 만일 애매한 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될 경우에라도 하나님과 결코 상치되지 않는 성령께서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 점을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짐짓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무지한 데 묻히지 않는 한 의심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David Laing, The Collected Works of John Knox, vol.2, pp.281, 284).

그 개혁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의 앞에서 그와 같은 진리를 말하였다. 그는 똑같은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목적을 향하여 나아갔고, 스코틀랜드가 법왕권으로부터 해방되는 날까지 기도하면서 거룩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개혁 운동에 호의를 보인 영국

영국에서는 개신교를 국교로 한 결과 박해의 세력이 미약하여지기는 하였으나 전연 없어지지는 않았다. 로마교의 교리는 대부분 폐지되었으나 그 형식들이 적지 않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법왕의 절대권은 부인되었으나 그 대신에 임금이 교회의 머리가 되었다. 교회의 예배는 여전히 복음의 순결성과 단순성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종교 자유의 대원칙도 아직까지 이해되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국왕들은 로마교가 일찍이 이단에 대하여 과한 그러한 잔혹한 일은 하지 않았을지라도 각 사람이 자기의 양심의 지시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에는 이르지 아니하였다. 모든 사람은 국교가 정한 교리를 인정하고 그 예배 형식을 준수하도록 요구를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박해로 인하여 적지 않은 고난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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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는 수천 명의 목사들이 해직되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인정한 것 이외의 어떠한 종교 집회에도 참석하지 못하도록 금지당하였는데, 그 일을 범하는 때에는 중한 벌금과 투옥과 추방의 어려움을 당하였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것을 회피할 수 없었던 충성된 사람들은 어두운 뒷골목, 침침한 다락, 밤중의 수풀 속 등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박해를 받던 주님의 자녀들은 깊은 산림 속, 곧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성전에 모여 그들의 마음을 열어 놓고 기도하며 찬미를 불렀다. 그러나 그처럼 조심하였지만 많은 사람이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감옥은 꽉 찼고, 가족들은 헤어졌다. 또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 그러므로 핍박이 그들의 증언을 침묵시킬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대서양 건너편 미국으로 쫓겨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곳에서 지금껏 그 나라의 영광과 보루로 삼아온 정치와 종교의 자유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사도 시대와 같이 박해는 다시금 복음의 발전을 돕는 수단이 되었다. 온갖 방탕자와 무서운 죄인들이 섞여 있는 누추한 옥중에서도 존 번연 (John Bunyan) 은 바로 천국의 분위기를 호흡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멸망의 세상에서 천국 도성에까지 이르는 순례자의 여행에 관한 위대한 이야기를 저술하였다. 그 후 2백년이 넘도록 베드포드 (Bedford) 옥중에서 나온 그 소리는 큰 능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다. 번연의 두 저서 “천로역정”과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는 많은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

박스터 (Baxter), 플래블 (Flavel), 올린 (Alleine), 그 밖에 재능 있고 교양 있고 깊은 그리스도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일어섰다. 그 사람들이 이룬 업적은 비록 이 세상의 위정자들에게서는 배척을 받고 도외시되어도 결코 없어질 수 없다. 플래블이 저술한 “생명의 샘”과 “은혜의 역사”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심령을 그리스도께 계속적으로 바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박스터의 저서 “개혁 목사”는 하나님의 사업의 부흥을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인정되었고, 또한 그의 저서 “성도의 영원한 안식”은 영혼들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남겨 둔 안식”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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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형제

그로부터 백년 후, 곧 영적 암흑시대에 휫필드 (Whitefield) 와 웨슬리 (Wesley) 형제는 하나님의 빛을 전하는 사람들로 나타났다. 당시의 영국 사람들은 국교회 (國敎會) 의 통제 아래 이교도와 거의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적으로 쇠퇴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성직자는 자연 종교를 즐겨 연구하였으므로 그들의 대부분의 신학은 그런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상류 계급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냉소하였고, 소위 그들이 광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위에 있다고 자랑하였다. 하류 계급은 심한 무지 상태에서 부도덕에 빠져 있었다. 그와 반면에 교회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진리의 사업을 지탱할 힘이나 믿음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루터가 그렇게도 분명히 가르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는 이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로마교의 교리가 그 대신 자리를 차지하였다. 국교회의 교인이었던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찾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경건한 생활과 종교적 의식을 모두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한 번은 찰스 웨슬리 (Charles Wesley) 가 병이 들어 죽음이 다가오는 것처럼 생각되었을 때, 그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무엇에다 두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나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다”고 대답하였다. 그 질문을 한 친구가 그 대답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나의 노력이 소망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못 된다는 말인가? 나의 노력을 하나님께서 절취하신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달리 신뢰할 만한 것이 없다” (John Whitehead, Life of the Rev.John Wesley, p.102). 그와 같이 짙은 암흑이 교회를 덮고 있었으므로, 속죄를 가려 버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고, 사람들의 마음을 구원의 유일한 희망, 곧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피에서 떠나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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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은 참된 종교는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은 말과 행동에는 물론이요, 생각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외부에 나타나는 행위의 바름뿐 아니라 마음의 성결이 또한 필요한 것을 확신하였으므로 새 생애에 들어가기를 힘썼다. 그들은 가장 근면하고 경건한 노력으로 그들의 육신적 마음의 사악함을 극복하고자 애를 썼다. 그들은 극기와 박애와 겸비의 생애를 살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게 해주는 성결, 곧 그들의 가장 열망하는 것을 얻는 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방법을 매우 엄밀하고 정확하게 준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였다. 정죄의 상태에서 놓여나고 죄의 세력을 깨뜨리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허지로 돌아갔다. 그것은 바로 루터가 에르푸르트의 외로운 방에서 경험한 것과 똑같은 투쟁이었다. 그것은 그의 심령을 괴롭게 했던 문제, 곧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욥 9:2) 고 한 바로 그 문제였다.

개신교의 제단에서 거의 꺼져간 거룩한 진리의 불꽃은 보헤미아의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여러 세대 동안 전하여 내려온 고대의 횃불로부터 다시 밝혀져야 했다. 종교개혁 후에 보헤미아의 개신교는 로마의 세력에 여지없이 짓밟혔다. 그리하여 진리를 포기하기를 거절한 모든 사람들은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의 더러는 작센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거기서 옛날의 신앙을 보전하였다.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이 진리의 빛을 받은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인들의 후손으로부터였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생긴 일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선교 사업을 위하여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모라비아 교도들과 일행이 되어 배를 타게 되었다. 그들은 항해 중에 심한 폭풍우를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웨슬리는 그 때에 아직 자기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의 보증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자기가 맛보지 못한 신뢰와 평안을 그 독일인들은 나타냈다.

각 시대의 대쟁투 pp. 24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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