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장 — 신앙 부흥과 참된 회개
신앙 부흥과 죄의 자각
하나님의 말씀이 충실히 전해진 곳은 어디에서나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증명하는 결과들이 뒤따랐다. 하나님의 영이 그분의 종들이 전하는 기별과 함께 하였으므로 그 말씀에 권능이 있었다. 죄인들은 그들의 양심이 각성됨을 깨달았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이 그들의 마음의 비밀을 비추고 어두운 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었다. 그들의 정신과 마음에 깊은 확신이 생겼다. 그들은 죄와 의와 장차 올 심판을 깨달았다. 그들은 여호와의 의를 깨달음과 동시에 그들의 죄와 부정 가운데서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일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번민 중에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었다.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무한한 희생을 지불한 갈바리의 십자가가 분명히 나타나자 그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그들의 죄를 충분히 속 (贖) 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믿음과 겸손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받아들였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들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 그들은 믿고 침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생애를 하기 위하여 일어났다. 그들은 전에 행하던 그들의 정욕을 따라 자기 자신들을 꼴 짓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주님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그들 자신을 깨끗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에 미워하던 것을 이제는 사랑하고, 전에 사랑하던 것을 이제는 미워하게 되었다. 교만하고 자기 주장만 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 허영적이고 교만한 사람들이 착실하고 조심성 있게 되었다. 불경 (不敬) 한 자가 경건해지고 술주정뱅이가 술을 끊고, 방탕하던 자가 순결해졌다. 세상의 허영은 버려졌다. 그리스도인들은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3, 4) 는 권면을 따르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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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부흥은 마음을 깊이 살피는 일과 겸비한 정신을 주었다. 그 부흥들은 죄인에 대한 엄숙하고 열렬한 호소로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산 영혼들에 대한 애절한 동정으로 특징지어졌다. 남녀들은 기도하고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과 씨름하였다. 그와 같은 신앙 부흥의 결과로 극기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난과 시련 받는 것을 합당히 여기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생애에 나타난 변화를 바라보았다. 지역 사회는 그들의 감화로 유익을 얻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모이고 성령으로 씨를 뿌리고 영생을 거두었다.
그들은 “근심함으로 회개”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후 7:9~11).
그릇된 신앙 부흥
그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하신 결과이다. 개혁이 따르지 않으면 참된 회개가 아니다. 죄인이 서약한 것을 이행하고, 도둑질한 것을 돌려주고,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과 화친한 증거를 보인 셈이다. 이전에 있었던 종교적 각성에 뒤따랐던 결과들은 이러하였다. 그들이 맺은 열매로써 그들은 사람을 구원하고 인류를 향상시키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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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근래에 행하여지는 신앙 부흥은 하나님의 종들의 활동에 수반되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과는 아주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광범위하게 흥미가 고조되고, 많은 사람이 회심을 고백하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참된 영적 생명이 그만큼 향상된 것을 보증할 만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타오르는 불길은 오래지 않아 꺼져 버리고 흑암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심해진다.
인기 있는 신앙 부흥은 너무도 흔히 사람의 상상력에 호소하고 감정을 자극하며 새롭고 놀랄 만한 것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회개한 자들은 성경의 진리에 별반 귀를 기울이고자 아니하고 선지자와 사도들의 증언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아니한다. 종교 집회에 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특성이 없으면 그들은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냉철한 이성에 호소하는 기별은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들의 영원한 유익과 직접 관련되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에도 그들은 유의하지 않는다.
참으로 회개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영원한 사물에 대한 관계는 인생의 큰 주제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 인기 있는 교회에 하나님께 헌신하는 정신이 있는가? 회심하였노라고 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교만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들은 회개하기 전과 다름없이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종교인으로 자처하면서도 그 원칙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 때문에 종교는 무신론자들과 회의론자들의 놀림감이 되어 버렸다. 경건의 능력은 많은 교회에서 거의 떠나갔다. 야유회, 연극, 자선시 (慈善市), 굉장한 건축, 개인들의 사치 등이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제거해 버렸다. 토지와 재산과 세속적 직업이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서 영원한 이익에 속한 사물을 거의 주목해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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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교회에 대한 사단의 공격
믿음과 경건의 보편적인 퇴보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를 진실히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세상에 내리기 전에 주님의 백성 중에는 사도 시대 이래 일찍이 목격하지 못한 근본적인 경건의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과 권능이 그분의 자녀들 위에 부어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대신에 이 세상을 사랑하는 그러한 교회들에서 분리되어 나올 것이다. 목사들과 신자들을 막론한 많은 사람들이 주의 재림을 위하여 백성을 준비시키고자 이 시대에 전파되고 있는 큰 진리를 즐거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원수는 이 일을 방해하려고 이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가짜 운동을 꾸며 냄으로써 이를 막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의 기만의 세력 아래 모이는 교회들 가운데는 마치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내린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적 큰 부흥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도록 나타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실상은 전혀 다른 영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놀라운 정도로 역사하고 계신다고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단은 종교의 가면을 쓰고 자기의 세력을 모든 그리스도교계에 확장하기에 진력할 것이다.
과거 반세기 동안에 일어난 신앙 부흥의 대부분에는 다소간 그와 같은 영향이 활동해 왔던바 장래에는 더욱 광범위한 운동들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진리와 허위가 혼합된 감정적 흥분이 있으며 그것은 오도되기 쉽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속임을 받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보면 그런 운동의 내용을 분별하기가 결코 어렵지 않다. 무릇 사람이 성경의 증거를 등한히 하고, 극기하고 세속을 버리도록 요구하는 분명하고 심령을 살피게 하는 진리에서 돌아설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마 7:16) 라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신 법칙에 의하면 이런 종류의 운동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이 분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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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진리를 통하여 당신 자신에 관한 계시를 주셨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사단의 속임수에서 보호를 받는다. 오늘날 일반 종교계에 널리 퍼져 있는 악이 들어오도록 문이 열린 것은 진리들을 등한히 한 결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의 특성과 중요성은 대부분 상실되었다. 하나님의 율법의 성격과 영속성과 그 의무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 회개와 성화의 관계에 대한 오류를 가져왔고 그 결과로 교회내의 경건의 표준이 낮아졌다. 우리 시대의 신앙 부흥 가운데 하나님의 영과 권능이 결핍된 원인이 여기에 있다.
교회의 미지근한 상태
오늘날 각 교파에서 경건한 신자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고 개탄하고 있다. 에드워드 에이 파크 교수는 종교계가 당면한 위기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위험의 한 가지 원인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강조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강단이 양심의 소리가 메아리치는 곳이었다. …우리의 가장 유명한 설교자들은 주님의 본을 따라 강단에서 율법과 그 교훈과 그 엄숙한 명령을 명백히 가르쳐 줌으로써 언제나 놀랄 만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항상 두 가지 큰 원리를 반복하여 말하였으니 곧 율법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나타내는 사본이며 율법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복음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두 가지의 큰 원리를 반복하였다. 왜냐하면 율법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참 품성을 반사하는 하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이 율법을 사랑하지 않는 위험은 죄의 흉악성, 죄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죄의 결점들을 과소평가하는 위험을 가져온다. 율법을 거역함으로 조성되는 악은 그 율법이 지닌 의에 비례된다. …
이미 언급한 위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과소평가하는 위험이다. 오늘날 강단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경향은 하나님의 공의를 하나님의 자비와 분리시키고 그 자비를 원칙으로 높이지 않고 하나의 감정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른바 신신학 (新神學) 은 하나님께서 결합시켜 놓은 것을 산산조각으로 해체시켜 버렸다. 하나님의 율법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물론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도 선한 것이다. 왜냐하면 공의는 율법을 집행하게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 인간의 불순종과 죄의 범위를 과소평가하는 습관 때문에 사람들은 죄를 속하기 위하여 마련된 은혜도 과소평가하는 습관을 이루기 쉽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서 복음의 가치와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미구에 성경 자체까지도 내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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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율법관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으로 율법을 폐하셨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 사람이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마치 무거운 멍에처럼 나타내고 율법의 속박과 복음 아래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대조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윗은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시 119:45) 라 하였다. 사도 야고보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에 십계명을 “최고한 법” 또한 “온전한 율법”이라고 말하였다 (약 2:8, 1:25). 또한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반세기 후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 (영어 흠정역 성경에는 ‘계명을 지키는 자’로 번역되었음) 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함이로다” (계 22:14) 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율법을 폐하셨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다. 만일 하나님의 율법이 변경되거나 폐지될 수 있었다면 사람을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을 폐지하기는커녕 율법의 불변성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 (사 42:21 난외 주석) 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 (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7, 18) 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시 40:8) 고 언명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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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그 본질상으로 불변이다. 그것은 율법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품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그분의 율법도 사랑이다. 율법의 두 가지 큰 원칙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게 대한 사랑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 (롬 13:10) 다. 하나님의 품성은 의며 진리이다. 그의 율법의 본질도 마찬가지이다.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 (시 119:142, 172) 니이다고 말한다. 또한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2) 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의 표현이므로 그 창시자와 같이 영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람을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과 일치되게 해줌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해주는 것이 회개와 성화의 사업이다. 태초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과 본성에 완전히 조화를 이루었다. 의의 원칙이 그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죄가 창조주와 사람을 분리시켰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과 반대되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7).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창조주와의 조화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져야 하고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와같은 변화는 새로 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율법과 신앙과의 관계
하나님과 화목하는 첫째 계단은 죄를 깨닫는 것이다.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죄인이 죄를 깨달으려면 먼저 자기의 품성을 하나님의 위대한 의의 표준에 비추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의로운 품성의 완전함을 보여 주는 거울로서 죄인에게 그의 결함을 분별하게 해준다.
율법이 사람에게 그의 죄를 나타내 보여 주기는 하지만 죄를 치료해주지는 못한다. 율법은 순종하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해 주는 반면에 율법을 범하는 것이 죽음임을 선고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죄의 선고와 더러움에서 사람을 해방시킬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으므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그의 속죄 제물로 믿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용서를 받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양자의 영을 받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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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여도 무방한가?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2) 라고 말한다.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고 하였다. 새로 남으로써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됨과 동시에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 위대한 변화가 죄인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면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성결로, 범죄와 반역에서 순종과 충성으로 옮겨지게 된다. 하나님과 멀어져 있던 옛 생애는 끝나고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화목의 생애가 시작된다. 그리하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롬 8:4) 한다. 그 때에 심령에서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시 119:97) 고 외치게 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시 19:7) 한다. 율법이 없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성성과 순결, 그리고 자기 자신들의 죄와 불결에 대하여 올바른 관념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로서의 그들의 속절없는 상태를 알지 못하고 속죄하는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함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도, 생애의 개혁도 없이 구원의 소망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피상적인 회개가 보편화되고 결코 그리스도와 연합한 경험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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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에 이르는 길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을 등한히 하고 부인하는 데서 생기는 그릇된 성화에 대한 이론들이 오늘날의 종교 운동에서 현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이론은 교리상으로 거짓될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있어서도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그런 것이 일반에게 환영을 받는 사실을 볼 때 이 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명백히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요긴한 일임을 깨닫게 된다.
참된 성화는 성경상 교리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 4:3) 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고 기도하였다. 성경은 성결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가르쳐 준다. 구주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 고 기도하셨다. 바울은 신자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 (롬 15:16) 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 (요 16:13)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구현되어 있는 의의 큰 원칙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며, 완전하신 하나님을 그대로 나타내주므로 그런 율법에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품성도 또한 거룩하여진다. 그리스도는 그런 품성의 완전한 모본이시다. 그분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 (요 15:10, 8:29)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과 같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그분의 거룩한 율법의 원칙과 일치한 품성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이다.
이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의 내재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서만 성취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2, 13) 라고 권고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것을 대항하여 싸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될 때 믿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 (고전 15:57) 라고 부르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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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성화의 과업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짐을 분명히 알려 준다. 죄인이 회개하여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해질 때부터 그리스도인 생애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그는 “완전한 데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야 한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3, 14) 고 말하였다. 그리고 베드로도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성화를 얻는 계단을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그는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벧후 1:5~10) 고 말하였다.
성화의 의미
성경상 성화를 체험한 사람은 겸손한 정신을 나타낼 것이다. 성결의 두려운 위엄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세처럼, 무한하신 하나님의 순결하심과 완전하심에 비하여 그들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된다.
선지자 다니엘은 참된 성화의 모본이었다. 그의 긴 일생은 그의 주님을 위하여 바친 고상한 봉사로 가득 차있었다. 그는 하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단 10:11) 이었다. 그러나 이 존경받는 선지자는 자신의 순결과 성결을 주장하는 대신에 자신을 죄 많은 이스라엘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하였다.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그는 다시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나이다고 하였다. 그 후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서 교훈을 주셨을 때에 그는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다고 하였다 (단 9:18, 15, 20,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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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도 폭풍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 42:6) 고 부르짖었다. 또 이사야는 스랍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하고 창화하는 소리를 듣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사 6:3, 5) 고 크게 외쳤다. 바울은 셋째 하늘로 이끌려가서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은 후 자기 자신을 가리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 (고후 12:2; 엡 3:8) 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사랑을 받은 요한은 그분의 영광을 보고 천사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것같이 되었다 (계 1:17 참조).
갈바리 십자가의 그늘 밑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자고하거나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으스대는 주장을 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열시킨 고뇌의 원인이 자기들의 죄였다는 것을 느끼며, 그런 생각이 그들을 스스로 겸비하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생애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죄악과 약점을 가장 분명히 깨닫고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날의 종교계에서 성화를 두드러지게 논의하고 있지만 자아를 높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정신과 병행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성경의 종교와는 거리가 먼 상태에 놓여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성화가 순간적인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완전한 성결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믿기만 하면 축복은 네 것이다”고 말한다. 받는 자 편에서는 그 이상의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듯이 생각한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를 부인하고 그들이 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쁨을 돌리는 일이 됨과 동시에 그분의 품성과 뜻의 표현이 되는 원칙에 조화되지 않으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품성과 뜻에 일치하는 성결을 이룰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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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투쟁도, 극기도, 세속적인 어리석음도 버리는 일을 요구하지 않는 안이한 종교를 믿고자 하는 욕망이 필경 믿음만으로 이루어진 교리, 곧 통속적인 믿음의 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사도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약 2:14~24).
거룩한 산 제물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은 이와 같이 사람을 유혹에 빠뜨리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교리를 반대한다. 은혜를 받는 데 필요한 조건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참람된 억측이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성경의 약속과 법도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요구 중 한 가지를 고의적으로 범하면서 거룩해질 수 있다는 신조를 가지고 스스로 속지 말라. 죄인 줄 알면서 범하게 되면 깨우쳐 주는 성령의 음성을 침묵케 하고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가게 한다. “죄는 불법이며”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 (요일 3:4, 6) 다. 요한은 그의 편지서들을 통하여 사랑을 충분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생애를 하면서도 거룩하게 될 수 있노라고 주장하는 부류에 속한 사람들의 참 모습을 나타내기에 주저하지 아니한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 (요일 2:4, 5) 느니라. 여기에 모든 사람의 신앙 고백을 검토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서 성결의 표준으로 정해 주신 유일의 척도로 재어 보지 않고서는 어떤 사람도 성결하다고 할 수 없다. 도덕적 율법의 가치를 느끼지 않는 자들, 하나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거나 등한히 여기는 자들,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범하고 또 그렇게 남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눈에 존중히 여겨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주장이 근거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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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없노라고 주장하는 그 자체가 성결에서 참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순결과 성결에 대한 진정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품성과 일치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할 때, 또한 예수님의 순결과 고상한 모습, 그리고 사악하고 지독한 죄의 성질에 대하여 진정한 개념을 깨닫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성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이 자기와 그리스도와의 거리를 멀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품성과 그분의 요구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자신이 자기 자신의 눈에 의롭게 보인다.
성경에서 설명한 성화는 전인, 곧 영과 혼과 몸을 다 포함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고 기도하였다. 그는 또한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고 편지하였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희생 제물들은 모두 엄밀히 검사되었다. 만일 제물로 드려진 짐승에게서 어떤 결점이 발견되면 그것은 거절당하였다. 왜냐하면 제물은 “흠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능력들을 최선껏 양호한 상태로 유지하여야 한다. 마음과 몸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를 위한 봉사에 부적당하게 만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이 아닌 것을 드릴 때에 기뻐하실까? 그리스도께서는 “네 마음을…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로써 하나님께 최선의 봉사를 하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능력을 촉진시켜 줄 율법과 조화되고자 그들의 모든 역량을 다하여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정욕이나 식욕에 빠짐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제물을 약화시키거나 더럽히지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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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와 일상 생애
베드로는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1) 고 말한다. 죄악적인 갈망을 만족시킬 때마다 신체의 기능이 마비되고 영적·지적 감각력이 죽고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령의 감화는 마음에 빈약한 인상을 끼칠 수밖에 없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후 7:1) 고 말했다. 그는 또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 (갈 5:22, 23) 와 같은 성령의 열매에 “절제”를 부가시켰다.
영감으로 된 이런 말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유행을 따르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들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또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탐식과 음주와 금지된 쾌락을 통하여 그들의 고상한 인간성을 타락시키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를 견책하는 대신에 오히려 식욕을 돋우어 주고 물욕과 연락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공급할 수 없는 교회의 자금을 보충하기 위하여 너무도 흔히 악을 권장한다. 만일 예수님께서 오늘날의 교회에 오셔서 종교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고 있는 연회와 부정한 거래들을 보신다면 그분께서는 일찍이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쫓으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런 자들을 내쫓지 아니하시겠는가?
사도 야고보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성결”하다고 말한다. 만일 그분께서 담배로 더러워진 입술로써 예수님의 귀하신 이름을 부르는 자, 담배의 악취로 그 입김과 전신이 더러워져 있는 자, 하늘의 공기를 더럽히고 그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독기를 마시게 하는 자들을 만나신다면, 곧 복음의 순결성과 전연 반대되는 행위를 하는 자들과 만나신다면, 그들을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견책하지 아니하시겠는가? 담배의 종이 되어 있으면서도 완전한 성화의 축복을 받았노라고 주장하며 하늘의 소망을 가졌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 (계 21:27)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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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 20). 몸이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 된 사람은 해로운 습관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능력은 피로써 값을 지불하고 그를 사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 그의 소유물도 주님의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자본을 낭비할 때 어찌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막대한 금액을 쓸데없고 해로운 일들에 낭비하고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을 얻지 못하여 멸망해 가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와 헌금을 도둑질하는 한편,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거나 복음사업을 유지하는 일보다 더욱 많은 것을 그들을 멸망시키는 정욕의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버린다. 만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성화되었을 것 같으면 그들의 재물은 쓸데없고 해로운 방종에 낭비되지 아니하고 주님의 보고로 돌아가게 되었을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절제와 극기와 자아 희생의 모본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의 빛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특권
세상은 자아 방종에 빠져 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고상한 부르심을 받고 있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의하면, 세속적 만족과 죄악적 습관을 완전히 내어 버리지 않으면 성화가 진실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우리의 주장이 정당함이 입증된다.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조건에 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고후 6:17, 18) 고 약속하신다. 하나님께 속한 일에 풍부하고 풍성한 경험을 가지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의무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고 말씀하셨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 (잠 4:18) 른다. 믿음과 순종의 길은 매 걸음마다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세상의 빛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해준다. 의의 태양 되시는 그리스도의 밝은 빛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비칠 때 그들은 그분의 빛을 반사하게 된다. 마치 별들이 하늘에 큰 빛이 있어서 그 영광으로 저들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우주의 보좌에 찬양과 모본의 대상이 되기에 합당한 품성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의 은혜와 그분의 품성의 순결과 성결은 그분의 증인들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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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골로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풍성한 축복을 밝혔다. “우리도…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하시기를 원하노라” (골 1:9~11).
그는 또한 에베소 교회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깨닫기를 바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그들에게 가장 의미 깊은 말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소유할 놀라운 능력과 지식을 열어서 보여 준다. “성령으로 말미암아…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그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것이 그들의 특권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함으로 그 사도의 간구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엡 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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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높은 표준이 여기에 밝혀져 있다. 그리고 그 표준에 도달할 때 우리는 그분의 요구를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느뇨” (롬 8:32).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셨으므로 우리들도 그 영으로 충만함을 입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3).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4).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
그리스도인 생애는 겸손으로 특징지어져야 하지만 슬픔과 자아 열시 (自我劣視) 같은 것으로 특색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축복하시는 생애를 누리는 것이 각 사람의 특권이다. 우리가 언제나 죄의식과 흑암 아래 지내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머리는 숙이고 심중은 자아에 대한 생각으로 충만해 있으면 참된 겸손의 증거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가 깨끗하게 되고 율법 앞에 부끄러움과 가책 없이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 (롬 8:1) 느니라.
하나님에 의한 승리의 생애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 (히 2:11) 하신다. 그리스도인 생애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승리와 기쁨의 생애가 되어야 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믿음이니라” (요일 5:4). 하나님의 종 느헤미야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 8:10) 고 한 말은 진실한 말이다. 바울은 말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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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은 일들이 성경상 회개와 성화의 열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 밝혀진 의의 큰 원칙을 일반 그리스도교계에서 매우 등한히 여기게 되었으므로 이러한 결과는 아주 드물게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일찍이 신앙 부흥의 특징이 되었던 하나님의 성령의 심오하고 영속적인 역사를 거의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바라봄으로써 변화된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품성의 완전하심과 거룩하심을 사람들에게 밝히 보여주신 거룩한 원칙들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교훈과 이론에 집착할 때 교회 안에서 산 경건성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초래되는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주님께서는 “내 백성이…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렘 2:13) 고 말씀하셨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1~3). 하나님의 율법이 다시 그 정당한 위치를 회복할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초대 교회가 가졌던 믿음과 경건의 부흥이 일어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렘 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