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장 — 성경과 프랑스 혁명
성경에 대한 로마교의 방침
16세기에 이르러 종교 개혁자들은 열린 성경을 백성들에게 공개하며 이를 유럽 각국에 보급시키기를 희망하였다. 어떤 나라들은 그것을 하늘에서 온 사자로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어떤 나라들에서는 로마교가 성경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일에 큰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성경의 지식에 속한 빛과 그 고귀한 감화를 거의 받지 못하였다. 한 나라에는 빛이 들어왔지만 암흑으로 인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세기에 걸쳐 진리와 오류가 서로 지배권을 갖고자 다투었다. 마침내 악이 승리를 얻고, 하늘의 진리는 물러나게 되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그러므로 그 나라는 자신이 택한 행위의 결과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악을 제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멸시한 백성들로부터 떠나가 버렸다. 그리하여 악은 성숙해지기까지 방임되었다. 드디어 온 세계는 고의적으로 빛을 거절한 결과가 어떠함을 보게 되었다.
여러 세기 동안 프랑스에서 계속하여 온 성경에 대한 투쟁은 프랑스 혁명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처럼 무서운 혁명이 일어난 것은 로마교가 성경을 억압함으로 초래된 당연한 결과에 불과했다 (부록 19 참조). 그 혁명은 법왕권의 시책이 실천된 결과를 보여 주는 가장 현저한 실례이며, 일천여 년 이상 로마교의 교훈의 경향이 무엇이었음을 보여 주는 예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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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왕이 최상권을 쥐고 있는 동안에 성경이 금지될 것에 관하여 선지자들은 이미 예언하였다.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죄악의 사람”의 통치로 말미암아 특히 프랑스에서 일어날 무서운 결과를 또한 지적하고 있다.
주님의 천사는 말하였다.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곳이니라…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계 11:2~11).
여기에 기록된 “마흔두 달 동안” 혹은 “일천이백육십일”이란 말은 같은 기간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로마교의 압박을 받을 기간을 나타낸다. 법왕권이 최상권을 쥐게 된 일천이백육십 년은 서기 538년에 시작되어 1798년 마치게 된다. 그 때에 프랑스 군대가 로마에 침입하여 법왕을 사로잡았는데, 그는 유배중에 죽었다. 얼마 후에 새 법왕이 선출되었으나 로마의 교권 (敎權) 은 전과 같은 세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예언된 로마교의 활동 기간
교회의 박해는 일천이백육십 년의 전 기간 계속되지는 않았다.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극렬한 시련의 시기를 단축시키셨다. 구주께서는 교회에 임할 “큰 환난”에 대하여 예언하시면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시리라” (마 24:22) 고 말씀하셨다. 사실상 박해는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1798년이 이르기 전에 이미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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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는 두 증인에 대하여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계 11:4) 라고 하였다. 또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구약과 신약 성경을 대표한다. 구약과 신약은 다 같이 하나님의 율법의 기원과 영속성 (永續性) 을 알려 주는 중요한 증인들이다. 그 두 성경은 또한 구원의 계획을 증거해 준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표상과 희생 제도와 예언들은 모두 장차 올 구주를 지적해 준다. 그리고 신약의 사복음서와 편지서는 표상과 예언을 통하여 미리 알려 준 그대로 조금도 틀림없이 강림하신 구주를 증언하고 있다.
“저희가 일천이백육십일을 베옷을 입고 예언하리라.” 그 기간의 대부분에 하나님의 증인은 모호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법왕권은 진리의 말씀을 백성들로부터 숨기고 그들 앞에 그 증언과 배치되는 거짓 증인을 세우고자 애를 썼다 (부록 20 참조). 성경이 종교와 세속의 권세에 의하여 추방되었을 때, 성경의 증거가 곡해되고, 사람들과 악마들이 성경으로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자 온갖 연구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성경의 거룩한 진리를 대담하게 증거하는 사람들이 수색당하고, 배신당하고,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믿음 때문에 순교를 당하거나 깊은 산속과 땅속의 동굴에 도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 충성된 증인들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일천이백육십 년의 전 기간을 통하여 증거하였다. 그들은 그처럼 가장 어두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열성을 다한 충성된 사람들이다. 충성된 그 종들에게는 그 전 기간에 하나님의 진리를 선언할 지혜와 능력과 권위가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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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수난 시대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계 11:5).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는 자들은 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두려운 선고의 의미는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밝혀져 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22:18, 19).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셨거나 명령하신 것은 어떠한 식으로든지 변경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시고자 사람들에게 주신 경고이다. 그 엄숙한 선언은 하나님의 율법을 경시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고 경박하게 말하는 자들은 그 선고 앞에 떨고 두려워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보다도 자기 자신의 의견을 높이는 모든 자들, 자기의 편의를 도모하거나 세속과 타협하기 위하여 성경의 분명한 의미를 변개코자 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두려운 결과를 가져오는 자들이다. 기록된 말씀, 곧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인류의 품성을 저울질하고 그 그릇됨이 없는 시험에 의하여 부족함이 드러나는 모든 자들에게 정죄의 선고를 내리게 될 것이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 곧 두 증인이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해야 할 시기는 1798년에 마쳤다. 그 두 증인이 비밀리에 그들의 사업을 마쳐 갈 때에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으로 표상된 세력이 그들을 향하여 싸움을 하게 될 것이었다. 여러 세기 동안에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교회와 국가를 지배한 세력들은 법왕권을 매개체로 사용한 사단에 의하여 통제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단의 세력이 새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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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는 성경을 존중하노라고 공언하면서 일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그것을 가두어 버리고 숨겨버리는 일을 그들의 방침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로마교의 지배 아래 그 증인들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이제 또 하나의 다른 세력, 곧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여 공공연하게 싸우고자 일어났다.
그 증인들이 죽임을 당하여 그 시체가 거리에 놓여 있는 그 큰 성은 “영적으로” 애굽이었다. 성경의 역사에 기록된 모든 나라 가운데서 애굽처럼 대담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실존을 부인하고 그분의 명령을 거역한 나라는 없다. 또한 애굽의 왕처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노골적이고도 오만한 태도로 반항한 임금은 없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바로에게 기별을 보냈을 때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 5:2) 고 오만하게 말하였다. 그것은 무신론이다. 그러므로 애굽으로 표상된 나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명령을 부정하는 일에 애굽과 유사한 말을 하고, 애굽과 마찬가지의 불신과 반역 정신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또 “그 큰 성”은 “영적으로” 소돔에 비유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데 있어서의 소돔의 부패는 특별히 음란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이 성경의 기록을 성취시킬 나라의 뚜렷한 특성은 또한 소돔과 똑같은 죄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무신론 사상의 만연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1798년 조금 전에 어떤 극악한 성격의 세력이 일어나 성경을 대항하여 싸우게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두 증인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그 나라에서 바로의 무신론과 소돔의 음란이 나타날 것이었다.
이 예언은 프랑스의 역사에서 가장 정확하고 현저하게 성취되었다. 1793년 프랑스 혁명 당시에 “문명국에서 출생하여 교육을 받고, 유럽의 나라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나라를 통치하는 권리를 가진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에서 사람의 마음에 받아들인 가장 엄숙한 진리를 이구동성으로 부인하고 만장일치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예배를 부인하는 음성을 세계는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Sir Walter Scott, Life of Napopeon, vol.1, ch.17). “우주의 창조주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반역의 손을 든 국가로서 믿을 만한 기록을 남긴 나라는 세계에서 오직 프랑스뿐이다. 영국, 독일, 스페인,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계속해서 많이 존재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의회의 결의로써 무신론을 선언했고, 수도 (首都) 의 모든 인구와 그 밖의 모든 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남녀를 막론하고 그 결의를 수락하고, 기쁨으로 노래하며 춤을 춘 유일의 국가로서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Blackwood’s Magazine, November 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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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특히 소돔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던 특징을 드러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옛날의 평원 (平原) 의 도시들을 멸망시켰던 것과 똑같은 도덕적 타락과 부패가 편만했다. 그리고 역사가는 예언에 기록된 그대로 프랑스의 무신론과 음란한 상태를 기록해 놓았다. “종교에 영향을 끼친 법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결혼의 경시였다. 사람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계약이며 사회의 견고한 기초에 가장 강력한 역할을 하는 결혼 제도가 당사자 두 사람이 마음대로 결합하였다가 다시 헤어질 수 있는 일시적인 성격을 띤 단순한 민간 계약으로 전락해 버렸다. …악마들이 인류의 가정생활에 있어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고, 영구적인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파괴해 버리고, 그들이 목적한 해독을 대대로 영속시키고 성취하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한다면, 결혼 제도를 무너뜨리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묘한 말을 잘하기로 유명한 여배우 소피 아놀드 (Sophie Arnoult) 는 프랑스의 혁명 시대의 결혼을 ‘간음의 예식 (禮式) ’으로 평하였다” (Scott, vol.1, ch.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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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는 예언은 글자 그대로 프랑스에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 대한 적의 (敵意) 가 이 나라에서보다 더욱 현저히 나타난 나라는 없다. 진리를 이 나라에서보다 더욱 맹렬하고 잔혹하게 반대한 나라도 없다.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함으로 프랑스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프랑스의 위그노
성도의 피는 여러 세기에 걸쳐 흘렀다. 왈덴스교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위하여” 피에몽 산에서 그들의 생명을 버렸을 때, 프랑스에서는 그들의 형제인 알비젠스 (Albigens) 들이 진리에 대하여 동일한 증거를 하였다. 종교개혁 당시에 그 교도들은 참혹한 고문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왕과 귀족들과 상류 계급의 부인들과 연약한 처녀들과 그 나라의 교만한 사람들과 무사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용감한 위그노 (Huguenot) 들은 사람의 양심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권위를 옹호하기 위하여 싸움을 계속하고, 많은 치열한 전쟁터에서 피를 흘렸다. 개신교도들은 법률상 보호에서 제외된 자로 인정되어 그들의 머리에는 현상금이 붙게 되었고, 그들은 들짐승들처럼 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도인들 중의 소수의 후예들로서 18세기 당시까지 프랑스의 남방 산중에 숨어서 거주하고 있던 “광야 교회”는 여전히 조상들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밤을 틈타서 그들이 산중턱이나 적막한 들에서 몰래 집회를 열고자 할 때, 그들은 갑작스런 용기병 (龍騎兵) 들의 추격으로 붙잡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예나 죄수들이 노를 저어 다니는 갤리선 (galleys) 에서 죽는 날까지 고역을 당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순수하고, 기품 있고, 지성적인 사람들은 강도들과 살인자들 사이에 섞여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쇠사슬에 매여 있게 되었다 (Wylie, b.22, ch.6 참조). 좀 더 자비로운 처분을 받은 사람들은 아무런 무장도 없이 속절없는 형편에서 기도하고자 무릎을 꿇었을 때 참혹하게 사격을 당하였다. 수백 명의 나이 많은 남자들, 방비 없는 여자들, 천진한 어린이들이 그들의 집회 장소에서 살해되어 그대로 내버려졌다. 그들이 평소에 집회를 하던 산 중턱이나 산림 속을 지나갈 때 시체가 풀밭 사방에 흩어져 있거나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는 일은 별로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나라는 “검과 도끼와 나무 (화형에 쓰는 장작) 로써 황량하여졌고, 하나의 쓸쓸하고 큰 광야로 바뀌고 말았다.” “이처럼 흉악한 사건은…암흑시대에 행하여진 것이 아니라 루이 14세의 찬란한 시대에 자행되었다. 그 당시에 과학은 발달되고 문예가 부흥되고, 궁궐과 수도에 사는 성직자들은 유식하고 말 잘하는 변사들이며, 겸손과 자비의 미덕을 사랑하는 자들로 인정받고 있었다” (Wylie, b.22, ch.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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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의 참혹한 목록 가운데서 가장 암흑한 것, 곧 각 세기를 통하여 자행된 잔인무도한 일 중에서 가장 끔찍스런 만행은 성 바돌로매 제일 (祭日) 대학살이다. 세상은 오늘날도 여전히 그 잔인하고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습격의 광경을 공포와 전율로써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왕은 로마교의 승려와 주교들의 강요로 그 흉악한 행위를 묵인하였다. 그리하여 사방이 고요한 한밤중의 적막을 깨뜨리고 울려 퍼진 왕궁의 큰 종소리는 학살에 대한 신호가 되었다. 수천 명의 개신교도들은 왕의 명예를 건 약속만을 신뢰하고 각자의 집에서 평안히 자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끌려 나가 무참하게 살육을 당하였다.
성 바돌로매 제일 (祭日) 의 대학살
애굽의 속박에서 백성들을 구원해 내실 때에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지도자가 되셨던 것처럼 사단은 무수한 순교자를 내는 무서운 일에 있어서 그의 부하들을 지휘하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학살은 파리에서 7일간 계속되었는데, 최초의 3일간은 특히 광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그리고 그 일은 왕의 특명에 의하여 파리 시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신교도들이 거주하는 모든 도시와 촌락에까지 퍼져 나갔다. 그 일은 연령과 성별을 구별하지 않았다. 천진한 어린아이들과 백발노인도 가리지 않았다. 귀족과 농부, 노인과 청년, 어머니와 아이, 그 모든 사람들을 함께 살육하였다. 프랑스 전국에서 학살이 2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국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7만 명이나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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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보도가 로마에 이르자 성직자들의 기쁨은 한이 없었다. 로렌의 추기경은 그 사자에게 1천 크라운을 상급으로 주었고, 성 안젤로에서는 축포를 쏘았고, 모든 교회의 첨탑에서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축화 (祝火) 는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법왕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추기경과 중요한 승려들을 데리고 큰 행렬을 지어 성 루이의 교당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 로렌의 추기경이 테 데움 (Te Deum) 을 낭송했다. …또 이 학살을 기념하는 메달이 주조되었고, 바티칸 궁전에서는 바사리 (Vasari) 의 솜씨로 석 장의 벽화, 곧 제독 (提督) 을 습격하는 장면, 학살을 음모하는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왕, 실제로 학살을 하고 있는 장면들이 그려졌다. 그레고리우스 법왕은 카알 황제에게 황금 장미를 보냈으며,…그 학살 4개월 후에…그는 한 프랑스 신부의 설교를 만족한 마음으로 들었다. …그 신부는 그 학살의 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날에 가장 거룩한 신부 (神父) 가 무한한 행복과 기쁨으로 보고를 받으며, 그는 위엄을 갖추고 하나님과 성 루이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나아갔다.’” (Henry White, The Massacre of St.Bartholomew, ch.14, Par.34).
성 바돌로매 대학살을 하도록 충동한 바로 그 정신은 프랑스 혁명에도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기꾼으로 선언하고, 프랑스의 무신론자들은 소리를 높여 “염치 없는 자를 박멸하자”고 부르짖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었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대담한 모독과 가증한 악이 서로 손을 맞잡았으며, 가장 비루한 인물, 잔인하고 사악하기 더할나위 없는 자, 비인도적인 자들이 무한한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일에 있어서 사단에게 최고의 존경이 주어졌다. 그와 반면에 진리와 순결과 이타적 사랑으로 특징지어 있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프랑스 국민과 이성 (理性) 의 여신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이리라.” 프랑스 혁명과 공포 시대 동안에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던 무신론의 세력은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대하여 싸움을 벌였는데, 그것은 세계가 일찍이 목격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국회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그리고 성경을 모아다가 될 수 있는 대로 모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공중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하나님의 율법은 유린당하고 성경에 명시된 제도들은 폐지되었다. 매주의 휴일은 경시되어 버렸고 그 대신에 10일마다 휴식하되, 그날은 연락하고 모독적인 일을 하는 데 바쳐졌다. 침례식과 성찬 예식은 금지되었고, 묘지에는 눈에 띄게, 사망은 영원한 잠이라는 표지가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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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과는 전연 다르게 그것을 어리석음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자유와 국가를 예배하는 일 이외에는 모든 예배가 금지되었다. “파리의 한 주교는 국민의 대표들 앞에서 연출한 가장 건전치 못하고 추잡한 연극의 주역 배우로 출연하였다. …그는 맨 앞에 나와서 회중을 향하여 선언하기를 자기가 오늘날까지 여러 해 동안 가르쳐 온 것은 어느 점으로 보든지 한갓 종교적 책략이었고 역사나 거룩한 진리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는 정중하고 명백한 어조로 하나님의 실존을 부인하고,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헌신하여 왔으나 장래에는 자유와 평등과 도의를 숭배하는 일에 자신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하였다. 그는 자기가 차고 있는 주교의 장식물들을 떼어서 책상 위에 놓고, 그 회를 주최한 회장과 익살스러운 포옹을 하였다. 또 몇 사람의 배교한 신부들이 그 주교의 본을 따랐다” (Scott, vol.1, ch.17).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무신론의 프랑스는 하나님의 두 증인의 책망하는 소리를 침묵시켜 버렸다. 진리의 거룩한 말씀은 시체가 되어 그 길거리에 넘어져 있었고, 하나님의 제재와 요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기뻐 날뛰었다.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하늘의 왕을 모독하였다. 그들은 옛날의 죄인들처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시 73:11) 고 부르짖었다.
새로운 제도에 의하여 임명된 한 승려는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독적인 언사로 말하였다. “하나님이여, 만일 당신이 참으로 존재하면 당신의 훼손된 이름을 위하여 복수해 보라. 나는 당신께 도전한다. 당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구려. 당신은 감히 격노치 못하는군. 이제 후로 누가 당신의 존재를 믿겠는가?” (Lacretelle, History, vol.11.p.309; in Sir Archivald Alison, History of Europe, vol.1, ch.10). 그것은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들으리오 여호와는 나의 알 바 아니라”고 한 바로의 말이 그대로 반향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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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 14: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왜곡시키는 자들에 대하여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딤후 3:9) 고 말씀하신다. 프랑스는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 (사 57:15) 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거절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 소위 이성 (理性) 의 여신이라는 열등한 우상숭배로 전락하였는데, 방탕한 한 여자가 그 여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은 국민의 대표적 집회에서, 행정 및 입법의 최고의 권위에 의하여 결정되었던 것이다. 어느 역사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광란 (狂亂) 의 시대에 행한 의식 (儀式) 중의 하나는 허망한 일과 불경한 일을 혼합시킨 점에서 달리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음악대를 선두에 둔 도시의 관리들은 활짝 열린 의장 (議場) 의 문을 통하여 장중한 행렬을 지어 나와서 자유의 노래를 높이 부르면서 그들이 바야흐로 경배하려는 대상, 곧 그들이 이성의 여신이라고 부르는 면사포를 쓴 한 여자를 수행하였다. 그 행렬이 식장 안에 들어가자 이성의 여신은 면사포를 벗어 이것을 회장 (會長) 의 오른편에 두었다. 그 때에 여자는 오페라단의 한 무희로 밝혀졌다. …프랑스의 국민 의회는 그 여자를 그들이 숭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성이라고 하여 그에게 공적인 경배를 하였다.”
“이 불경건하고 어리석은 의식은 특수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이성의 여신의 제막식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혁명의 모든 세력에 공명한다는 뜻을 표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것을 재연하거나 모방해서 거행하였다” (Scott, vol.1, ch.17).
피에 취한 국민 의회
이성의 예배를 소개한 한 변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입법 의원 여러분, 광신은 이성 앞에 길을 양보했습니다. 그 흐린 눈으로는 빛의 광채를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무수한 군중이 고딕식 둥근 천장 아래 모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진리를 다시 반향 (反響) 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프랑스 국민은 유일의 참 예배, 곧 자유와 이성에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여기서 공화국의 군대의 성공을 위하여 기원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물체 곧 자연의 걸작품인 이성의 여신을 취하기 위하여 생기 없는 우상을 버렸습니다” (M.A.Thiers,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vol.2, pp.370,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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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이 식장에 들어가자마자 변사는 그의 손을 잡고 회중을 향하여 말하였다.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공포심이 만들어낸 무력한 하나님의 분노 앞에서 더 이상 떨지 말라.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성 이외는 아무것도 신으로 인정치 말라. 나는 여러분에게 이성의 가장 숭고하고 순결한 상 (像) 을 여기서 보여 준다. 만일 여러분이 반드시 우상을 가져야 한다면 이와 같은 우상에게만 제사를 드려라. 자 이성의 여신의 제막식을 자유의 의회 앞에서 거행한다.”
“여신은 의회장의 포옹을 받은 후 화려한 수레에 태워져, 많은 군중들 사이를 통과하여 노트르담 성당으로 인도되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여 높은 제단 위에 앉아 참석한 모든 자들의 경배를 받았다” (Alison, vol.1, ch.17).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공중 앞에서 성경을 불태워 버리는 일이 있었다. 어떤 회합에서는 박물관 서민 협회의 사람들이 “이성 만세”를 부르면서 시 (市) 의 공회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막대기 끝에다가 반쯤 불타다 남은 몇 권의 책들을 꿰뚫어 메고 갔다. 그 책들 중에는 천주교의 성무일과 (聖務日課), 미사서, 신구약 성경 등이 있었는데, 의장은 그 책들에 대하여 “인류에게 온갖 어리석은 일을 행하게 하였으므로 큰 불로 보응을 받았다” (Journal of Paris, 1973, No.381.Quoted in Buchez-Roux, Collection of Parliamentary History, vol.30, pp.200, 201) 고 말하였다.
그런데 무신론자들이 완성시키고 있었던 일을 시작한 것은 법왕권이었다. 프랑스를 급속히 멸망으로 밀어넣은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인 모든 상태는 로마교의 정책이 이루어 놓았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무서운 상태를 기술한 한 저자는 왕위와 교회가 그 극단적인 행동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부록 21 참조). 엄격히 비판하면 그것들은 모두 교회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법왕교는 종교개혁을 왕위의 적이요,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하는 불화의 요소라고 말함으로써 왕들의 마음을 자극하였다. 왕위를 통하여 가장 비참하고 잔인하며 가장 견딜 수 없는 압제와 박해를 행한 것은 그와 같은 모양으로 고취된 로마의 정신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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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정신은 성경과 병행하였다. 복음을 받아들인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람들의 마음이 각성되었다. 그들은 무지와 부도덕과 미신의 노예로 속박되어 온 질곡 (桎梏) 을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유인으로 생각하고 행하기 시작하였다. 왕들은 그러한 일들을 보고 저들의 전제 정치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로마는 왕들의 질투적 공포심을 자극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1525년에 법왕은 프랑스의 섭정 (攝政) 에게 말하였다. “이 종교광 (宗敎狂-프로테스탄트를 가리킴) 들은 종교계를 혼란케 하고 파괴할 뿐만 아니라 나라의 통치권, 귀족 계급, 법률, 질서, 계급 등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G.de F’elice, History of the Protestants of France, b.1, ch.2, Par.8). 불과 몇 년 후에 법왕 사절은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폐하여, 속지 마십시오. 프로테스탄트들은 종교의 질서는 물론이요, 국가의 질서도 모두 전복시킬 것입니다. 왕위는 제단 (祭壇) 과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새 종교가 들어오면 새 정부가 필연적으로 들어설 것입니다” (D’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Europe in the Time of Calvin, b.2, ch.36). 또한 신학자들은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하여 “사람들을 유인하여 신기한 것과 어리석은 일을 하게하며, 왕으로 하여금 신하들의 충성심을 잃어버리게 하여 교회와 나라를 다 같이 파괴시키는 자들이다”고 주장함으로 백성들의 편견에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로마교는 프랑스가 종교개혁 운동을 반대하게 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프랑스에서 박해의 칼을 처음으로 든 것은 왕위를 지탱하고, 귀족을 보호하고, 법률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Wylie, b.13, ch.4).
혁명이 일어난 근본 원인
프랑스 통치자들은 이 치명적인 정책의 결과를 거의 내다보지 못하였다. 성경의 교훈은 공평, 절제, 진리, 평등, 자애의 원칙들을 백성들의 마음에 심어 줄 것이었는데, 그러한 미덕들은 국가를 번영케 하는 유일한 초석이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잠 14:34, 16:12).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사 32:17).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사람은 국가의 법률도 가장 성실하게 순종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온갖 권위를 행사하는 나라의 왕을 공경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는 불행히도 성경을 금지하였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파문하였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원칙과 신조에 굳센 사람들, 예민한 지력과 도덕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 자기의 양심을 거스르지 않고 진리를 위하여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과 용기의 사람들, 그들은 갤리선의 노예로 고역을 당하거나 화형을 당하거나 감옥 속에서 신음하였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은 먼 곳으로 피하여 간신히 안전한 곳으로 갔다. 이와 같은 상태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250년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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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동안에 박해자들의 광적인 분노를 피하여 간 복음의 사도들이 일반적으로 현저히 뛰어난 지능, 미술, 공업, 질서 있는 생활 등을 통하여 그들이 피난 온 그 지방을 부요하게 한 사실들을 프랑스 사람들은 보지 못한 세대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와 같이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이주하여 가는 일과 비례하여 그들의 나라에는 그런 재간 있는 사람들이 차츰 줄어 갔다. 만일 이미 가 버린 그 사람들이 모두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면, 만일 그 3백 년 동안에 추방된 그 사람들의 공업 기술로써 프랑스 국토를 발전시켰다면, 또한 그들의 예술적 소질로써 창작에 힘썼을 것 같으면, 만일 그들의 천재적인 창작력과 분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그 문학을 발달시키고 과학을 육성시켰을 것 같으면, 만약 그들의 지혜로써 의회를 지도하고 그들의 용맹으로 싸우고, 그들의 공의로 나라의 법률을 제정하고, 성경의 종교로 백성들의 지능을 계발시키고, 양심을 다스리게 하였더라면, 오늘날 얼마나 찬란한 영광이 프랑스를 두르고 있을 것인가? 프랑스는 얼마나 위대하고, 번영되고 행복된 나라가 되었을까? 그 나라는 많은 나라들의 모본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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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맹목적이요,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프랑스는 모든 덕망 있는 교사들과 질서를 잘 지키는 우수한 사람들과 왕위를 충성스럽게 옹호해 주는 사람들을 나라 밖으로 몰아냈다. 그들의 나라를 세상에서 명성 있고 영광스러운 나라로 만들어 줄 사람들에게 화형이 아니면 추방을 택하라고 강요하였다. 드디어 국가의 쇠퇴는 극도에 달하여, 추방될 만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더 이상 남지 아니하였고, 화형주로 끌려갈 만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없어졌고, 나라 밖으로 추방할 만한 애국자들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Wylie, b.13, ch.20). 그리하여 마침내 무서운 혁명이 일어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혁명 전의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의 도피와 함께 일반적인 쇠퇴가 프랑스를 엄습하였다. 번화하던 생산 도시는 타락한 도시로 전락되고, 비옥하던 지방은 원시적인 황무지로 바뀌고, 이상한 진보를 보인 기간 후로 지적 부진과 도덕적 퇴폐가 계속되었다. 파리는 하나의 거대한 구빈원 (救貧院) 이 되었으며, 혁명이 일어나던 당시에 약 20만 명의 거지들이 왕의 손으로 구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제수이트 당원들만은 쇠퇴하여 가는 나라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교회와 학교와 감옥과 노예들이 노를 젓는 갤리선에서 무서운 독재를 행사하였다.
프랑스의 성직자들, 왕, 입법자들의 수완으로도 어쩔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온 나라가 무정부 상태와 파멸로 들어가게 만든 그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은 복음이 가져다 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백성들은 구주께서 가르쳐 주신 자아 희생과 무아 (無我) 의 사랑의 귀한 교훈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위하여 극기를 실행하지 않게 되었다.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여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았고,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고역과 압박에 대하여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부요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이기심은 더욱 극심하고 억압적으로 나타났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나타난 귀족들의 탐욕과 방탕은 농민들을 약탈하고 착취하기에 이르렀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를 미워했다.
많은 지방에서 토지들은 귀족들이 차지하였고, 노동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소작을 하는 데 불과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주의 자비에 의존되었고, 그들의 지나친 요구에도 복종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다. 교회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부담은 중류와 하류 계급에서 부담하였으므로, 그들에게는 집권자와 성직자들로부터 많은 세가 부과되었다. “귀족들은 쾌락을 제일로 생각하였고, 농부들이 굶어 죽는 것에는 전연 관심이 없었다. …백성들은 언제나 그들의 지주의 전적인 이익을 도모하여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농부들의 생활은 실로 끊임없는 수고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들이 불평을 말하면 그것은 오만한 모욕으로 취급되었다. 법정에서는 언제나 농민들의 호소보다는 귀족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일반 사회의 제도가 부패됨으로 말미암아 귀족들의 변덕스러운 주장이 법률과 같은 힘을 갖게 되었다. 평민들은 한편으로 세속적 권력자에게, 다른 한편으로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바치게 되었는데, 그 세금의 절반도 왕실이나 교회의 금고로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그 돈의 나머지 부분은 방탕한 자아 방종에 낭비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자기들의 동족들을 궁핍하게 만드는 그 사람들은 오히려 납세를 면제받고, 국가의 법률과 관례에 따라 여러 가지 중직에서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와 같은 특권계급의 사람들은 약 15만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하여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절망적이며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록 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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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와 무신론자
궁정은 사치와 방탕에 잠겼고, 백성들과 위정자들 사이에는 신임이 거의 없었다. 정부의 모든 처사는 언제나 모략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반세기 이상의 기간에 걸쳐서 루이 15세가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처럼 악한 시대에 있어서도, 나태하고 경박하고 음란한 임금으로 유명하였다. 부패하고 잔악한 귀족 정치, 가난하고 무지한 하류 계급, 국가의 재정적 곤란과 백성들의 격분, 이 모든 것들은 선지자의 안목이 아닐지라도 무서운 사변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왕은 그의 신하들의 경고에 대하여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이대로 버티고 나가 보자. 내가 죽은 후에 어떻게 되겠지”라고 언제나 대답하였다. 개혁의 필요를 아무리 역설하여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왕은 죄악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것을 혁신시킬 만한 용기도 능력도 없었다. 그의 나태하고 이기적인 대답, 곧 “재앙은 나의 죽은 뒤에”라는 말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는 프랑스의 운명을 여실히 표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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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는 왕들과 지배 계급의 질투심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노예 상태로 묶어 두도록 영향을 미쳤다. 로마교는 이와 같이 하여 나라가 약화되면 백성들과 통치자들이 모두 자기의 지배 아래 들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선견적 정책에 의하여 로마교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노예 상태가 되게 하려면 그들의 심령을 차꼬로 채워야 한다는 것과 그들이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억제하려면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상태에 놓아두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이 정책의 결과로 초래된 육체적 고통보다 천 배 이상 무서운 것은 도덕적 타락이었다. 성경은 박탈되었고, 고집과 이기적인 교훈으로 얽힌 백성들은 무지와 미신에 가려졌고, 악습에 빠져 버렸으므로 자제하기에 전연 부적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결과로 생긴 일은 로마교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로마교는 자기의 교리를 맹종하는 대중을 만들기는커녕 그들을 이교도와 혁명가들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로마교를 성직자의 정책이라고 멸시하였다. 그들은 성직자들을 그들을 압제하는 당파로 보았다. 그들이 알았던 유일한 신은 로마교의 하나님이었고, 그들이 알았던 유일의 종교도 로마교의 교리였다. 그들은 로마교의 탐욕과 잔인성을 바로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성경을 전연 무용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로마교가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되게 나타내고 그분의 율법을 왜곡시켜 버렸으므로 이제 사람들은 성경과 성경의 저자를 동시에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교리가 성경이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거기에 맹종하기를 요구하였다. 거기에 반응하여 볼테르 (Voltaire) 와 그의 동료들은 성경을 배척하고 무신론의 해독을 도처에 유포시켰다. 로마교는 그 쇠발굽으로 백성들을 짓밟았다. 그런데 이제는 대중이 타락하고 사나워져서 로마교의 학정에 대하여 반발을 일으켜 모든 속박을 끊어버렸다. 그들이 그처럼 오랫동안 공경하여 왔던 것이 찬란하게 보이는 속임수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은 분노한 나머지 참 것과 거짓 것을 둘 다 거절하게 되었다. 그릇된 방종을 자유로 오해하여 그들은 그들이 생각한 자유 안에서 죄악의 노예가 된 것을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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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초기에 왕의 양보로 백성측의 대표자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수를 합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그리하여 세력의 균형에 있어서 백성측이 우세하였으나, 그들은 그 힘을 지혜롭고 적당하게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이 당한 비행을 고쳐 놓기에 급급한 그들은 사회의 개조를 단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분노한 대중들은 학대받아 온 분노와 잊혀지지 않는 원한에 사무친 마음으로,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비참한 상태를 개혁하는 동시에 그들을 곤경에 빠뜨린 장본인들로 생각되는 계급에 대하여 보복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압제받던 자들은 학정 아래서 배운 교훈을 실천하여 과거에 자기들을 압박하던 자들에게 똑같이 압제하게 되었다.
대혁명이 일어남
불행한 프랑스는 자신이 심은 씨앗을 피로써 거두었다. 프랑스가 로마교의 지배하에 복종한 결과는 두려운 것이었다. 프랑스가 로마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의 초기에 최초의 화형주를 세웠던 그 곳에 프랑스의 혁명당들은 최초의 단두대를 세웠다. 16세기에 개신교의 신앙을 가진 최초의 순교자들이 화형을 받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18세기에는 최초의 희생자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는 자기 나라를 치료해 줄 복음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무신론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을 열었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재를 무시해 버릴 때 인간의 법률은 인간의 정욕이라는 강력한 물결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히 입증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반란과 무정부 상태로 휩쓸려 들어갔다. 성경에 대한 투쟁은 세계 역사에서 공포 시대라는 뚜렷한 한 시대를 초래하였다. 사람의 가정과 마음에서 평화와 행복이 사라졌다. 안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늘의 승리자가 내일에는 혐의를 받고 정죄를 받았다. 포악과 음란이 극도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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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흥분하고 미쳐서 날뛰는 군중들의 잔악무도한 행동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수하고자 갈망하는 그들은 왕을 처형함으로 한층 더 자극되었다. 그리고 왕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자들도 오래지 않아서 왕의 뒤를 이어 단두대로 끌려갔다. 혁명을 반대하는 것으로 혐의를 받은 자들은 다 살육되었다. 감옥들은 만원이 되었는데 한 때는 20만 명 이상의 검거자들이 수용되었다. 국내의 각 도시에 무서운 사건들이 일어났다. 혁명주의자들의 한 당이 다른 당과 싸우므로 프랑스는 드디어 하나의 커다란 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서로 싸우는 군중들의 분노와 격정은 온 세상을 흔들어 놓았다. “파리에서는 소동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시민들은 여러 당파로 나누어져서 피차에 서로 물고 뜯는 일밖에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였다.” 온 나라가 이와 같은 참상을 당한 외에도 구라파의 열강들을 상대로 오랫동안 황폐케 하는 전쟁에 휘말려 들었다. “나라는 거의 파멸 상태에 이르렀고, 군인들은 급료의 지불이 지연됨으로 소동하였고, 파리 시민들은 굶어 죽어갔으며, 각 지방들은 비적들로 말미암아 황폐되었고, 문화는 무정부 상태와 백성들의 방종으로 거의 사라질 지경까지 되었다.”
백성들은 로마교가 반복해서 가르쳐준 잔인과 고문의 본을 너무도 잘 받았다. 보응의 날은 드디어 오고 말았다. 옥에 갇히고 화형주에 달리는 사람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래 전에 죽임을 당하고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제 가혹한 로마교는 과거에 유혈 행위를 즐기도록 가르쳐 주었던 사람들의 무서운 세력을 느끼게 되었다. “프랑스의 로마교 성직자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서 실천해 온 박해가 이제는 그들 자신들에게 매우 혹독하게 보복되어 왔다. 단두대는 신부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일찍이 위그노 신도들로 채워졌던 갤리선과 감옥들이 이제는 그들을 핍박하던 자들로 채워졌다. 걸상에 붙들어 매어진 채로 노를 젓는 형벌을 당하고 있는 로마교의 성직자들은 일찍이 자기들의 교회가 소위 이단이라고 부르는 온유한 사람들에게 그처럼 임의로 과했던 그 형벌을 이제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부록 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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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무도한 학살
“모든 법 중에서 가장 흉악한 법이 어떤 법정보다 가장 흉악한 법정에서 적용되고, 극형을 받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이웃 사람에게 인사하거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없고, 도처에 밀정들이 잠복해 있고, 매일 단두대가 아침부터 장시간에 걸쳐 힘든 일을 하고, 노예선들이 차고 넘치는 것처럼 감옥들이 넘치고, 하수구의 도랑들이 피로 물들어 세느 (Seine)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그런 시대가 왔다. …처형될 희생자들을 실은 마차들이 날마다 파리 시의 도로를 지나 그 운명의 심판정으로 가고 있는 동안에 최고 의원들이 보낸 각 지방의 총독들은 실로 수도 파리에서조차 볼 수 없는 잔인무도한 일을 행하고 있었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단두대의 칼날은 그들이 살육할 분량에 비하면 너무도 느렸다. 길게 줄지어 서 있는 죄수들은 풀을 베듯 포도탄 (葡萄彈) 에 의하여 쓰러졌다. 사람이 가득히 탄 거룻배의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서 몰살시키기도 하였다. 리용은 황무지로 변했다. 아라에서는 죄수들을 신속히 죽이지 아니하고 천천히 죽이므로 그들을 더욱 괴롭게 하였다. 소뮈르로부터 바다에 이르는 노아르 강변에서는 나체로 된 시체들을 둘씩 둘씩 흉측스럽게 포옹하게 해놓고, 까마귀와 독수리들의 큰 무리들에게 뜯어 먹히게 하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무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 지긋지긋한 정치 아래 살육을 당한 17세가량의 소년 소녀들의 수는 수백 명 단위로 세어야 하였다. 자코뱅 당원들은 젖먹이들을 그 어머니들의 젖가슴에서 떼어내어 창 끝에 꽂아 가지고 이 창에서 던지면 저 창으로 받아 꽂기까지 한 적도 있다 (부록 24 참조). 10년의 짧은 세월에 실로 무수한 사람들이 살육되었다.
이 모든 일은 사단이 소원하던 일로서 그는 그 일을 여러 시대에 걸쳐서 계획하고 이루고자 노력하여 왔던 것이다. 그의 정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기만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의 단호한 목적은 사람들에게 저주와 불행을 가져다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파괴하고 욕되게 함으로 그분의 자비와 인애의 거룩하신 목적을 방해하여 하늘에 슬픔을 가져다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기만적인 술책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잘못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처럼 느끼게 하고, 자기가 가져온 모든 비참한 일들을 창조주의 계획의 결과처럼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단은 자기의 잔인한 세력에 의하여 타락하고 야수적으로 된 사람들이 자유를 얻을 때 그는 과격하고 흉악한 일을 하도록 그들을 충동한다. 그리고는 폭군들과 압제자들은 그 포악무도한 방종의 모습을 지적하면서 자유가 가져온 결과가 어떠함을 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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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단은 한 가지 가면이 폭로되면 다시 다른 가면을 거기에다 씌우게 되는데 많은 사람들은 첫 번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로마교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사단은 로마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도록 사람들을 이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로 하여금 모든 종교가 거짓이며 성경은 신화 (神話) 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게끔 충동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걷잡을 수 없는 죄악의 구덩이로 빠져 들어갔다.
종교의 부인 (否認) 과 그 두려운 결과
프랑스 국민들이 이와 같이 치명적인 잘못을 범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 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위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다면 네 평안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사 48:18, 22; 잠 1:33).
무신론자들과 불신자들과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반대하고 부인한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의 결과는 인류의 복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배우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각 나라의 역사에서 배우게 되어 있다.
사단이 로마교를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하였을 때에도 그는 그의 일을 감추었다. 그러므로 그는 부패와 불행이 바로 범죄의 결과인 것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그의 일을 아주 교묘하게 가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력은 성령의 역사와 너무나 반대되었기 때문에 그의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는 일이 방지되었다. 사람들은 원인에서 결과를 찾고자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당하는 불행의 원인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당시에 하나님의 율법은 국민 의회에서 공공연하게 배척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에 계속된 공포 시대를 통하여 원인에서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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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부인하고 성경을 거절하였을 때 악인들과 악령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계획하여 오던 그대로 하나님의 율법으로 제재를 받지 아니하는 나라를 세운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악한 일에 대한 심판이 속히 이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 (전 8:11) 게 되었다. 그러나 공평하고 의로운 율법을 범하게 되면 불행과 파멸이 피할 수 없이 따라오게 된다. 비록 즉시 형벌을 당하지 않을지라도 사람의 악행은 반드시 파멸을 가져오고야 만다. 여러 세기 동안의 배신과 죄악이 심판 날의 진노를 쌓아두었다. 그리하여 그 죄악의 분량이 차면 하나님을 멸시한 자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긴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음을 늦어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잔인한 사단의 세력을 억제하고 무너뜨리던 하나님의 영이 거의 떠나가고 사람의 불행만을 즐겨 온 사단이 하고자 하는 대로 방치된다. 이러한 반역을 선택한 자들은 글로써 도저히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죄악이 땅에 충만하여질 때까지 그 반역으로 말미암아 생긴 결실을 거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황폐된 지방과 폐허가 된 도시들로부터 무서운 부르짖음, 곧 가장 쓰라린 고통의 부르짖음이 들렸다. 프랑스는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종교, 법률, 사회적 질서, 가정제도, 국가, 교회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대적한 불의한 손에 의하여 타도되었다. 현인의 말은 진실하였다.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하여 넘어지리라”, “죄인이 백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리라” (잠 11:5; 전 8:12, 13).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잠 1:29,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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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승리와 복음 사업의 발전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의 참람된 권력으로 말미암아 살해된 하나님의 충성된 두 증인은 오랫동안 잠잠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계 11:11). 그리스도교를 폐하여 버리고 성경을 금지한다는 법령이 프랑스 국민 의회를 통과한 것은 1793년이었다. 그러나 3년 반이 지난 후 그 결의를 무효로 만들고 성경을 용납하는 의안을 동일한 그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세계는 성경을 거절한 결과로 생긴 가증한 범죄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으며, 사람들은 덕행과 도덕의 기초로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 참으로 필요한 일임을 인정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니라” (사 37:23).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렘 16:21) 고 말씀하셨다.
그 두 증인에 대하여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계 11:12). 프랑스가 하나님의 두 증인에 대하여 도전하였으므로, 그 두 증인은 오히려 전에 없이 높임을 받았다. 1804년에 영국 성서 공회가 조직되었다. 그 후로 유럽 대륙에 이와 유사한 조직체들과 지부들이 형성되었다. 또한 1816년에는 미국 성서 공회가 창설되었다. 영국 성서 공회가 창설되었을 때에 성경은 50개의 국어로 인쇄되어 배부되었다. 그 후 성경은 수백 가지의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되었다 (부록 25 참조).
1792년 이전의 50년간은 외국 선교 사업에 대하여 거의 유의하지 않았다. 새로운 선교회의 조직이 거의 없었고, 이방 나라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한 교회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8세기의 말엽이 되자 갑작스런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은 합리주의의 결과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하나님의 계시와 체험 종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 때부터 외방선교 사업이 비상한 발전을 하였다 (부록 2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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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 기술의 발달은 성경을 보급시키는 사업에 활기를 주었다. 다른 나라들과의 교통수단의 발달은 옛날부터의 편견과 쇄국주의 (鎖國主義) 의 담을 헐어 버렸다. 그리고 로마의 법왕이 세속적 권력을 잃어버리게 되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 있는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해에 걸쳐서 로마의 거리에서도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고 성경이 판매되었으며, 오늘날은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성경이 보급되고 있다.
일찍이 무신론자 볼테르는 다음과 같이 장담하였다. “12명의 사람이 그리스도교를 세웠다는 말을 나는 지칠 정도로 반복하여 들어왔다. 그러나 이것을 무너뜨리는 데는 오직 한 사람으로 넉넉하다는 것을 나는 증명할 것이다.” 그가 죽은 후 여러 세대가 지나갔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성경을 대적하여 싸우는 투쟁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성경을 멸절시킬 수는 없었다. 볼테르 시대에 성경이 백권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날은 1만권, 아니 10만권의 성경이 있는 셈이다. 초기의 어떤 종교 개혁자는 그리스도 교회에 대하여 “성경은 마치 여러 쇠망치를 낡아지게 한 모루와 같다”고 기록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무릇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 (사 54:17)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사 40:8; 시 111:7, 8). 사람의 권위 위에 세워진 것은 무엇이나 전복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변함이 없는 말씀의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