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망 – 29일

27장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동방에 알려진 모든 질병 중에 문둥병은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그 불치성과 전염성, 그리고 그 병이 희생자에게 끼치는 끔찍스러운 결과 등은 가장 용기 있는 사람조차도 공포로 가득 차게 했다. 유대인들 간에 이 질병은 죄 때문에 받는 심판으로 여겨졌으므로 “하나님의 치심” 혹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불려졌다. 그것은 뿌리 깊고 근절할 수 없는 치명적인 병이어서 죄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의문의 법에 의하여 문둥병자는 부정하다고 선고되었다. 이미 죽은 사람처럼 그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격리되었다. 무엇이든지 그가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였다. 공기는 그의 호흡에 의해 불결하여졌다. 이 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자신을 제사장에게 보여야 하며 제사장은 진단을 하여 그의 상태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만일 문둥병이라는 선언을 받으면 그는 그의 가족에게서 격리되며, 이스라엘 회중으로부터 끊어져서 자기와 같은 병에 걸린 자들과만 사귀도록 운명지어졌다. 그 법은 그 요구에 있어서 융통성이 없었다. 비록 왕과 통치자일지라도 면제되지 않았다. 이 두려운 질병에 걸린 군주는 홀을 버리고 사회에서 도피해야 했다.

문둥병자는 그의 친구와 인척을 떠나서 이 질병의 저주를 견뎌야 하였다. 그는 자신의 재앙을 공표하고, 그의 옷을 찢고, 경고의 소리를 질러 오염시키는 존재로부터 도망가도록 모든 사람에게 경고해야 하였다. 외로운 추방자로부터 슬픈 음조로 들려오는 “부정하다. 부정하다”라는 부르짖음은 공포와 혐오의 신호로 들렸다.

그리스도께서 봉사하시던 지방에 이런 병자들이 많았다. 그분의 사업에 대한 소식이 그들에게 이르러 한 줄기 빛나는 소망을 불붙여 주었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사의 시대 이래로 이 질병에 결박된 자가 정결함을 입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떤 사람에게도 하지 않은 일을 그들을 위해 하시리라고는 감히 기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중의 한 문둥병자의 마음속에 믿음이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님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랐다. 이웃 사람들과의 접촉을 금지당한 그가 어떻게 치료자 앞에 자기 몸을 내보일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과연 자기를 고쳐 주실까 하고 의심하였다. 그분이 과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고통을 받고 있는 자라고 여겨지는 자를 굽어보실까? 그분도 바리새인과 의사들과 같이 자기에게 저주를 선언하고 사람 사는 곳에서 도피하라고 하지 않을 것인가? 그는 예수님에 관하여 자기가 들어온 모든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분의 도움을 구한 자 중에 한 사람도 그냥 돌아간 자는 없었다. 이 불행한 사람은 구주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동네에서 격리는 되었지만 혹시 산길들 가운데 있는 어떤 샛길에서 그분과 마주치거나 마을 밖에서 가르치실 때에 그분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난관은 많았지만 이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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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둥병자는 구주께로 인도된다. 예수께서는 호숫가에서 가르치시고 사람들이 그분 주위에 모여 있다. 문둥병자는 멀찍이 서서 구주의 입술에서 나오는 몇 마디 말씀을 주워 듣는다. 그는 예수께서 당신의 손을 앓는 자 위에 얹으시는 것을 본다. 그는 절름발이와 눈먼 자와 중풍병자와 기타 각색 질병으로 죽어 가는 자들이 건강한 몸으로 일어나서 구원받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본다. 그의 마음속에 믿음이 강해진다. 그는 점점 모인 군중에게로 가까이 나아간다. 그에게 가해진 제한들, 사람들의 안전, 모든 사람이 그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공포, 이런 것들은 잊혀진다. 그는 치유에 대한 복스러운 소망만을 생각한다.

그의 몰골은 몸서리칠 만큼 처절하다. 그 병마는 무섭게 잠식해 있어서 그의 썩어 가는 육체는 보기에도 두려웠다. 그를 보자 사람들은 무서워서 뒤로 물러난다. 그들은 그와의 접촉을 피하기 위하여 기를 쓰고 서로 밀쳐낸다. 어떤 사람은 그가 예수께 가까이 나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하여 힘쓰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그는 그들을 보지도,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는다. 그들의 혐오하는 표정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을 본다. 그는 죽어가는 자에게 생명을 말씀하시는 그 음성만을 듣는다. 그는 예수께로 달려와 그의 발아래 자기 몸을 던지면서 이렇게 부르짖는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 8:3)고 하시며 예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손을 얹으셨다.

그 문둥병자에게 즉시 변화가 스쳐갔다. 그의 육신은 건강하게 되고 신경은 예민해지고 근육은 견고해졌다. 문둥병의 특징인 거친 비늘 모양의 표면이 사라지고, 건강한 어린이의 피부색과 같은 불그스레한 색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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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리지 말고 곧바로 예물을 가지고 성전으로 가서 몸을 보이라고 명하셨다. 제사장들이 검사를 하고 그 사람의 질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선언하기까지는 이런 예물은 가납될 수 없었다. 그들이 이 의식을 이행하기를 아무리 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진단과 그 일의 결정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성경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에게 침묵할 것과 즉각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얼마나 긴급하게 분부하셨는지를 보여 준다.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하게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라. 제사장들이 이 문둥병자의 치유에 관한 사실을 알았다면 그리스도를 증오한 그들이 부정직한 판결을 내리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이적에 관한 어떤 소문도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그 사람이 성전에서 자기 몸을 내보이기를 원하셨다. 그래야 공정한 결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그 회복된 문둥병자는 가족과 친구들과 다시 한 번 결합하도록 허락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지키라는 명령을 하실 때에 고려하신 다른 목적들이 있었다. 구주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늘 당신의 사업을 제한하고 사람들을 당신에게서 돌이키려고 힘쓰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 예수께서는 문둥병자를 치료한 소식이 사방에 알려진다면 이 두려운 병에 걸린 다른 환자들이 그분의 주위에 모여들어서 사람들이 그들과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전염을 받을 것이라는 외침이 일어나게 될 것을 아셨다. 많은 문둥병자들이 건강의 선물을 그들 자신에게나 남에게 축복이 되도록 사용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문둥병자들을 당신 주위에 이끌므로 그분은 의문의 법의 규약을 무너뜨린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를 제공하는 것이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그분의 사업은 방해를 받게 될 것이었다.

그 사건은 그리스도의 경고가 옳았음을 나타냈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 문둥병자의 치유를 목격했으므로 제사장들의 결정을 몹시 알고 싶어 했다. 그 사람들이 자기 친구에게 돌아왔을 때에 커다란 흥분이 있었다. 예수께서 주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자기가 나은 사실을 감추려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을 감추기란 불가능하였을 것이지만 문둥병자는 그 사실을 사방에 공표하였다. 자기에게 이를 금지시키신 것은 다만 예수의 겸양에서 나온 것이라 상상하고 그는 이 위대한 치료자의 능력을 선포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는 이런 모든 선전이 제사장들과 장로들로 하여금 예수를 죽이려고 더욱 단단히 결심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건강을 회복한 그 사람은 건강의 은혜가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사람다운 활력을 되찾은 것과 그의 가족과 사회로 복귀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을 온전케 해준 그 의원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소문낸 그의 행위에 의해 구주의 사업에 지장이 생겼다. 이 일로 너무나 많은 무리들이 떼 지어 그분께 몰려왔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당분간 당신의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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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봉사하신 매 행위는 그 목적에 있어서 원대하였다. 그 행위는 그 자체에 나타난 것 이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문둥병자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한편 자기에게로 나오지 않은 자들에게도 복 주기를 열망하셨다. 예수께서는 세리들과 이방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끄시는 한편 편견과 유전에 의해 갇힌바 된 제사장들과 교사들과 접촉하기를 갈망하셨다. 그분은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다 쓰셨다. 예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이 나음을 입은 문둥병자를 보냄으로 그들의 편견을 제거시켜 주기 위해 의도된 증언을 그들에게 주셨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과 반대된다고 주장하였으나 깨끗함을 받은 그 문둥병자에게 율법에 따라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그분의 지시는 이러한 비난이 그릇됨을 증명하였다. 즐겨 깨닫기를 원하던 모든 자에게 그것은 충분한 증언이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사형에 처할 어떤 구실을 찾기 위하여 정탐꾼들을 파견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인류를 사랑하시며 율법을 존중하고 죄와 사망에서 건져낼 권세를 가졌다는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심으로써 응대하셨다. 그분은 그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증언하셨다.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시 109:5)도다. 산상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을 주신 그분께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마 5:44, 벧전 3:9) 비심으로써 그 원칙을 몸소 수범하셨다.

그 문둥병자를 추방하도록 선고한 바로 그 제사장들이 그가 나은 것을 확인하였다. 공적으로 선언되고 기록된 이 선고는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의 현저한 증언이었다. 그리고 나음을 받은 그 사람이 제사장들 자신에 의하여 질병의 흔적이 없다는 보증을 받아서 이스라엘 회중으로 회복되었으므로 그 사람이야말로 은혜 베푼 자에 대한 산 증인이었다. 그는 기쁘게 예물을 드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였다. 제사장들은 구주의 신적인 능력을 확신하였다. 그들에게 진리를 알고 그 빛에 의해 유익을 얻을 기회가 허락되었다. 거절하면 그 기회는 지나가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거절하였으나 헛되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얼마 동안은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 구주의 생애 동안 그분의 사명은 제사장들과 교사들에게서 사랑의 응답을 거의 불러일으키지 않은 듯이 보였으나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행 6:7)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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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병자를 그 무서운 질병에서 깨끗케 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영혼을 죄에서 깨끗케 하시는 그분의 사업에 대한 예증이다. 예수께 왔던 그 사람은 “온몸에 문둥병”이 있었다. 그 병의 무서운 독기가 그의 온몸에 스며들었다. 제자들은 그들의 주께서 그와 접촉하시지 않도록 막으려고 힘썼다. 왜냐하면 문둥병자를 만진 사람 자신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의 손을 문둥병자에게 댔지만 불결하게 되지 않으셨다. 그분의 접촉은 생명을 주는 능력을 나누어 주었다. 문둥병은 깨끗해졌다. 뿌리 깊고, 치명적이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정결케 될 수 없는 죄의 문둥병도 이와 같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사 1:5, 6)다. 그러나 인류 가운데 거하기 위해 오신 예수께서는 더럽힘을 받지 않으셨다. 그분의 임재는 죄인에게 치료의 효능이 된다. 누구든지 그분의 발아래 엎드려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믿음으로 말하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 8:2, 3)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어떤 치유의 경우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구하는 축복을 즉시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문둥병은 호소하자마자 그 요청이 수락되었다. 우리가 세상의 축복을 위하여 기도할 때 기도에 대한 응답은 지체될 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도 있으나 우리가 죄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갈 1:4)다. 그리고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 15).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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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동일한 진리를 다시 가르치셨다. 이 이적이 행해진 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은 또한 다른 귀중한 진리들을 예증하고 있다. 그 사실은 소망과 격려로 차 있으며 트집 잡는 바리새인들과 관련시켜 볼 때 그것은 또한 경고의 교훈을 담고 있다.

문둥병자와 같이 중풍병자도 회복의 모든 소망을 상실했었다. 그의 질병은 죄악된 생활의 결과였으며 그 고통은 양심의 가책에 의해 더욱 심해졌다. 그는 정신적인 고민과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이미 오래 전에 바리새인들과 의원들에게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냉정하게 그의 병은 불치라고 선언하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겨 버렸다. 바리새인들은 고통을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신 증거로 여기고 병자와 가련한 자들을 멀리 했다. 그러나 종종 그들 자신을 거룩하다고 높인 바로 이 사람들이 그들이 정죄한 고난자들보다 죄가 더 컸다.

중풍병에 걸린 사람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어떤 곳으로부터도 도움의 가망이 없음을 알고 절망에 빠져 버렸다. 그 때에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사업에 대하여 들었다. 자기처럼 죄가 많고 무력한 다른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고 심지어 문둥병자들이 깨끗케 함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이 일들을 전달한 친구들은 그도 예수께 운반된다면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도록 격려하였다. 그러나 질병이 어떻게 그에게 이르러 왔던가를 기억할 때에 그의 희망은 무너졌다. 그는 순결하신 의원께서 당신 앞에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실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가 바란 것은 육체적 회복이라기보다는 죄 짐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가 만일 예수님을 보고 용서와 하늘의 평강의 보증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만족할 수 있었다. 이 죽어가는 사람은 “내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고 부르짖었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쇠약해진 그의 육신은 이미 부패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기를 자리에 눕혀서 예수께 운반하여 주기를 간청하였으며 친구들은 그렇게 해주겠다고 즐거이 보증하였다. 그러나 구주께서 계신 집안과 주위에는 너무 많은 군중이 빽빽이 모여 있어서 그 환자와 친구들은 예수께 나가기는커녕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범위 내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관습에 따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주위에 가까이 앉았고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다. 이들은 예수를 고소할 구실을 찾기 위해 정탐꾼으로 온 자들이었다. 이 관리들 외에도 혼잡한 군중, 곧 열심 있는 자들, 경건한 자들, 호기심을 가진 자들, 불신하는 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이들은 상이한 민족들과 사회의 온갖 계층의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생명의 영이 회중을 감싸고 있었으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 임재를 식별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고치는 일은 그들과는 상관이 없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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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를 멘 사람들은 몇 번이고 군중을 헤치고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헛수고였다. 그 병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자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갈망하던 도움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어떻게 소망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의 요청으로, 친구들은 지붕으로 그를 운반하였으며 지붕을 뚫고 예수님의 발아래에 그를 내려놓았다. 설교는 중단되었다. 구주께서는 신음하는 얼굴을 바라보았으며 당신에게 고정된 탄원하는 눈길을 보셨다. 그분은 사정을 알아차리셨다. 그분은 이 당황하고 의심하는 심령을 당신께로 가까이 이끄셨다. 중풍병자가 아직 집에 있을 동안에 구주께서는 그의 양심에 죄를 깨닫도록 하셨다. 그가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온전케 하실 수 있는 예수의 능력을 믿었을 때에 생명을 주는 구주의 자비하심이 먼저 그 갈망하는 심령에 복을 주었다. 예수께서는 최초의 희미한 믿음의 빛이, 그분이 죄인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믿음으로 자라나는 것을 주시하셨으며, 그 믿음이 당신 앞에 나오고자 노력할 때마다 더욱 강하게 자라나는 것을 보셨다.

이제 구주께서는 환자의 귀에 음악과 같이 들리는 말씀으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절망의 짐이 병자의 심령에서 떠나고 용서의 평강이 그의 마음에 임하고 그의 용모를 환히 비춘다. 육체적 고통이 사라지고 온몸은 변화된다. 어찌할 수 없던 중풍병자가 나음을 입는다! 죄인이 용서를 받는다!

그는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새 생명의 은혜로 받아들였다. 그는 더 이상 요청하지 않고 행복한 침묵 속에 누워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행복하였다. 하늘의 빛이 그의 용모를 비췄으며 사람들은 경외심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랍비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시는지 보기 위해 궁금히 여기면서 기다렸다. 그들은 이 사람이 그들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한 사실과 그들이 그에게 소망과 동정을 거절한 사실을 회상하였다. 그들은 이것에 그치지 않고 그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그들 앞에 있는 이 환자를 보았을 때에 이런 일들이 생생하게 그들의 마음에 떠올랐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이 광경을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있음을 느끼고 사람들에 대한 그들 자신의 영향력이 상실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공포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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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관들은 서로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으나 피차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각자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 감정의 흐름을 저지하기 위하여 모종의 조치를 취해야만 되겠다고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이 말을 참람되다고 책잡아 사형에 처할 만한 죄로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마음에 이르기를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고 하였다.

그분의 시선이 그들에게 고정되자 그들은 그 시선 아래서 움츠려 물러섰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셨다.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들것에 실려서 예수께 왔던 그가 젊음의 탄력과 능력을 가지고 제 발로 일어섰다. 생명을 주는 피가 그의 혈관을 통하여 약동하였다. 신체의 모든 기관이 갑자기 활동을 시작하였다. 건강한 혈색이 죽음에 접근하고 있던 창백함을 이어받았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죄 지은 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기 위하여 몸을 굽히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여! 고통당하는 인류의 불행을 슬퍼하고 위로하시는 신성이여! 오, 인간 자녀들에게 이와 같이 나타난 기이한 능력이여! 누가 구원의 기별을 의심할 수 있을까? 누가 동정이 많으신 구속주의 자비를 경시할 수 있을까?

그 썩어 가는 육체에 건강을 회복시키는 일은 창조의 능력 못지않은 능력을 요구하였다. 땅의 흙으로 만든 사람에게 말씀으로 생명을 주신 그 같은 음성이 죽어가는 중풍병자에게 생명을 선언하셨다. 그리고 육체에 생명을 주신 그 같은 능력이 마음을 새롭게 하였다. 창조 시에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시 33:9) 서게 하신 그분께서 허물과 죄악으로 죽었던 영혼에게 생명을 말씀하셨다. 육체를 고치신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신 능력의 증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명령하시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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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과 육체를 모두 고치시는 능력을 발견하였다. 육체적 회복이 영적 치료에 뒤이었다. 이 교훈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무수한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이 중풍병자와 같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기별을 듣기를 갈망하고 있다. 죄의 불안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아울러 죄의 짐이 그들의 질병의 기초이다. 그들은 심령의 치료자 앞에 나오기 전에는 위안을 찾을 수 없다.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화평이 심령에 활력을 주고 육체에 건강을 줄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분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살려주는 영이셨”다(요일 3:8; 요 1:4, 10:10; 고전 15:45). 그리고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당시에 병자를 고치고 죄인에게 용서를 말씀해 주셨던 것과 같은, 생명을 주는 동일한 능력을 지금도 갖고 계신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 103:3)신다.

중풍병자를 고침으로 사람들에게 미친 결과는 마치 하늘이 열려서 더욱 좋은 세계의 영광을 나타낸 것과 같았다.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이 걸음마다 하나님을 찬미하고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그의 짐을 지고 군중 속을 지나갈 때에 사람들은 물러서서 그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그를 응시하며 그들끼리 가만히 속삭이기를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고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놀라움으로 말문이 막혔고 패배감에 짓눌렸다. 그들은 이곳에서는 그들의 질투심이 군중들을 선동할 여지가 없음을 알았다. 하나님의 진노에 맡겨 버렸던 그 사람에게 나타난 놀라운 이적이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감명을 주었으므로 잠시 동안 랍비들은 잊혀졌다. 사람들은 하나님께만 돌렸던 능력을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태도의 은근한 위엄은 그들의 오만한 태도와는 뚜렷이 대조되었다. 그들은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더 우월한 존재의 임재를 깨닫기는 하였으나 고백은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지상에서 죄를 용서하실 권세가 있다는 증거가 굳어갈수록 그들은 더욱더 완강하게 자신들을 불신에 빠져들게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침묵시키기 위한 새로운 술책을 꾸며내기 위하여 중풍병자가 그분의 말씀으로 회복되는 것을 보았던 베드로의 집에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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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악하고 뿌리가 깊은 신체의 질병이라도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영혼의 질병은 빛에 대하여 눈을 감은 자들을 더욱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문둥병과 중풍병은 완고와 불신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의 집에서는 그가 자기의 가족들 앞에서 불과 얼마 전에 천천히 운반되어 갔던 침상을 가뿐히 들고 돌아오자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주위에 모였으나 거의 저희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그는 가족들 앞에 충만한 성인의 활력을 가지고 섰다. 무기력하게 보였던 팔들이 그의 마음대로 움직였다. 오그라들고 우중충한 색깔을 했던 살은 이제 생기 있고 혈색이 좋았다. 그는 든든하고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그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에 기쁨과 소망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순결과 화평의 표정이 죄와 고통의 흔적들을 대신하였다. 그 집에서는 기쁜 감사의 기도가 올라갔으며 하나님께서는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회복시키고 고통 받는 자들에게 힘을 주신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다. 이 사람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생애를 예수께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떠한 의심도 그들의 신앙을 흐리게 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불신도 그들의 어두웠던 가정에 빛을 비추신 예수께 대한 충성을 파괴하지 못했다.

시대의 소망 pp. 26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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