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망 24장 –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24장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서 봉사하신 광명한 시기에 한 그림자가 가로놓였다. 곧 나사렛 사람들이 그를 거절한 것이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그들은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유년과 청소년 시절에 나사렛 회당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함께 예배드리셨다. 당신의 공생애가 시작된 이래로 그분은 그들에게서 떠나 있었으나 그들은 그분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모르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의 흥미와 기대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곳에는 예수께서 유아 시절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의 낯익은 모습들과 얼굴들이 있었다. 이곳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있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경배자들 사이에 앉으셨을 때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분에게로 향하였다.

그 날의 규례적인 봉사에 따라 장로가 선지자의 글을 읽고 영광스러운 통치를 가져오며 모든 압제를 추방할 장차 오실 분을 여전히 소망하도록 사람들에게 권면하였다. 그는 메시야의 오심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증거를 낭송함으로 듣는 자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하였다. 그는 메시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군대의 선두에 서서 나타나시리라는 사상을 강조하면서 그분의 강림의 영광을 묘사하였다.

회당에 랍비가 참석해 있을 때에는 설교를 하도록 기대되었으며 이스라엘 사람은 누구라도 선지자의 글에서 읽을 구절을 줄 수 있었다. 이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예배 순서에 참석하여 달라는 요구를 받으셨다. 그분이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 그에게 주어졌다(눅 4:16, 17). 그분이 읽은 성경 말씀은 메시야에 대하여 말씀한 것으로 이해되던 구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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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케 하려 하심이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니)…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기”(눅 4:20~22)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 관한 예언의 산 설명자로서 사람들 앞에 서셨다. 그분은 자신이 읽은 말씀을 설명하면서 메시야를 압박받는 자의 구원자요, 사로잡힌 자의 해방자요, 고통당하는 자의 치료자요,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키며 세상에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자로서 말씀하셨다. 그분의 인상적인 태도와 그분의 말씀의 놀라운 뜻은 그들이 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능력을 가지고 듣는 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거룩한 감화의 물결이 모든 장벽을 허물었다. 모세와 같이 그들은 보이지 않는 분을 보았다. 그들의 심령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자 그들은 주께 대한 열렬한 아멘과 찬송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을 때에 그들은 갑자기 그들 자신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을 강론하신 예수님의 주장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촉구받았다. 그들, 곧 아브라함의 자녀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속박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악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죄수요, 흑암 가운데서 진리의 빛을 필요로 하는 자들로 제시되었다. 그들의 자부심은 손상을 입었으며 공포심이 일어났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업은 그들이 바라는 것과는 전혀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타냈다. 그들의 행실이 너무도 치밀하게 조사를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외면적 의식에는 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통찰력 있는, 꿰뚫는 시선에 의하여 검사 받는 것을 겁냈다.

이 예수님은 누구인가? 라고 그들은 물어보았다. 메시야의 영광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주장한 자는 목수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 요셉과 함께 일하던 자였다. 그들은 그분이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수고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분의 형제자매들과 잘 아는 사이였으며 그분의 생애와 일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분이 유년에서 청소년으로, 청년에서 장년으로 자라나는 것을 보았다. 그분의 생애가 비록 흠이 없었지만 그들은 그분을 약속된 자로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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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이 그들의 장로에게서 들었던 그것과는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예수께서는 그들을 로마로부터 구원하여 내시겠다는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말을 들었으므로 그분의 능력이 그들의 유익을 위해 행사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 같은 목적의 아무런 암시도 보지 못했다.

그들이 의심에 문을 열어 주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일시나마 부드러워졌던 것으로 인하여 훨씬 더 강퍅하게 되었다. 사단은 그 날에 어두워진 눈이 열리지 않고 노예의 사슬에 매인 영혼이 자유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굳게 결심하였다. 사단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들을 불신 가운데 묶어 두려고 활동하였다. 그들은 그들에게 말씀하신 분이 그들의 구속자라는 확신으로 감동을 받았을 때 주어졌던 표적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제 그들의 은밀한 생각을 드러냄으로 당신의 신성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사람 나아만 뿐이니라”(눅 4:23~27).

예수께서는 선지자들의 생애 가운데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듣는 자들의 의문에 응하셨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업을 위하여 택하신 종들은 마음이 강퍅하고 불신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도록 허용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느낄 줄 아는 마음과 믿고자 하는 신앙을 가졌던 자들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들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을 입었다. 엘리야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서 떠났다. 그들은 죄에 집착하고, 여호와의 사자들을 통하여 주신 성령의 경고를 거절하였다. 그와 같이 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이를 수 있었던 통로를 차단시키고 말았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여러 가정들을 그냥 지나치고 이방 땅의 선택받은 백성에 속하지 않은 한 여인의 가정에서 당신의 종을 위한 피난처를 발견하셨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이 받은 빛을 좇았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보내신 더욱 큰 빛에 마음 문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은총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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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의 시대에 이스라엘의 문둥병자가 간과된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방의 귀족 나아만은 자신이 옳다고 깨달은 것에 충실하였으며 자신이 도움을 크게 필요로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을 만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얻었을 뿐 아니라 참된 하나님을 알게 되는 축복을 받았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입장은 우리가 받은 빛의 분량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활용하는 여하에 달려있다. 그와 같이 그들이 분별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올바른 것을 선택하는 이방인들은 큰 빛을 받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은 하나, 그 빛을 무시하고 그들의 일상 생활로써 자신들의 고백을 부인하는 자들보다 더 유리한 형편에 있는 것이다.

회당에서 청중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독선을 뿌리째 흔들고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났으며 그분의 백성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상실되었다는 그 쓰라린 진리를 그들에게 역설했다. 그들의 참된 상태를 칼처럼 잘라놓는 모든 말씀이 그들 앞에 제시되었다. 그들은 이제 예수께서 처음에 그들을 고무시켰던 믿음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가난과 비천함에서 일어난 그분이 보통 인간 이상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불신은 악의(惡意)를 낳았다. 사단이 그들을 지배하였으며 그들은 분노하고 구주를 대적하여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사명을 가지신 구주에게서 돌아섰다. 이제 그들은 파괴자의 속성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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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축복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에 청중들의 극렬한 민족적 자존심이 분기되어 그분의 말씀은 떠드는 소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 백성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자랑하였으나 이제 그들의 편견이 손상을 입었으므로 곧 살인을 저지를 것 같았다. 집회는 깨어지고 그들은 예수께 손을 대어 회당으로부터 밀어내어 성 밖으로 끌고 나갔다. 모두가 그분을 죽이려고 기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벼랑 끝으로 예수님을 급히 끌고 가서 거꾸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고함과 저주의 소리가 공중을 메웠다. 어떤 자가 그분에게 돌을 던지자 예수께서 갑자기 그들 가운데서 사라지셨다. 회당에서 그분 곁에 있었던 하늘의 사자들이 그 미친 군중 속에서도 그분과 함께 있었다. 천사들은 예수님을 원수들로부터 가로막아 안전한 장소로 인도하였다.

그와 같이 천사들은 롯을 보호하여 소돔 가운데서 안전하게 인도하여 냈다. 그와 같이 그들은 작은 산성에 있던 엘리사를 보호하였다. 주위의 언덕이 아람 왕의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들로 가득 찼을 때에 엘리사는 더 가까운 언덕 비탈이 하나님의 군대들, 곧 여호와의 종의 주위를 두른 불 말과 불 병거로 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와 같이 각 시대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들 곁에 가까이 있었다. 악의 대연합 세력이 이기려고 하는 모든 사람을 대항하여 정렬하고 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구출하기 위하여 그들 주위에 진치고 있는 하늘 군대를 우리가 바라보기를 원하신다. 천사들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어떤 위험에서 보호받았는지는 영원의 빛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볼 때까지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하늘의 온 가족이 이 곳 지상에 있는 가족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보좌에서 온 사자들이 날마다 우리의 발걸음에 동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예언서의 말씀을 낭독하실 때 메시야의 사업에 관한 마지막 설명을 생략하셨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케 하려 하”신다는 말씀을 낭독하신 후에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사 61:2)한다는 구절을 생략하셨다. 이 말씀은 그 예언의 첫 부분이 진리인 것처럼 역시 진리인데 예수께서 침묵하심으로 그 진리를 부인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말씀은 곧 그분의 청중들이 논하기를 좋아했고 성취되기를 갈망하였던 말씀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범과가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심판을 선언했다. 그들이야말로 그들이 이방인에게 곧잘 부인하였던 그 자비를 가장 깊이 필요로 하는 자들이었다. 회당에서 예수께서 그들 중에 서셨던 그 날은 하늘의 부름을 받아들일 그들의 기회였다. “인애를 기뻐하”(미 7:18)시는 그분은 그들의 죄가 초래한 멸망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기를 열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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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한 번 더 회개하라는 요청을 하지 않고는 그들을 단념하실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의 봉사가 끝날 무렵에 유년시절의 고향을 다시 방문하셨다. 그 곳에서 배척당하신 이래로 그분의 전도와 이적에 대한 소문은 온 땅에 퍼졌다. 이제 그분이 인간의 능력 이상의 것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사렛 사람들은 그분이 두루 다니며 선을 행하고 사단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 주위에는 어느 집에서도 병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그 마을들을 지나며 그들의 모든 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생애의 모든 행위에서 나타난 자비는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것을 증언하였다.

나사렛 사람들은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들은 그들 가운데서 자라났던 이 사람이 그들 자신들보다 더 훌륭한 다른 사람이라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예수께서 자신이 그 약속된 분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지위를 부여하기를 실제로 거절하셨던 그 쓰디쓴 기억이 여전히 그들의 마음에 사무쳐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들이 이방인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가치가 더 없다는 것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라고 묻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그분을 받아들이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들의 불신 때문에 구주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많은 이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 단지 몇 사람의 심령만이 그분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열려 있었을 뿐이었으므로 예수께서는 마지못하여 그 곳을 떠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마음에 한번 품은 불신은 나사렛 사람들을 계속 지배하였다. 이런 모양으로 불신은 산헤드린과 국가를 지배하였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령의 능력의 증거에 대한 첫 거절은 곧 종말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최초의 반항이 정당하였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들은 그 후에도 계속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트집을 잡았다. 성령에 대한 그들의 거역은 갈바리의 십자가와, 그들의 도성의 멸망과, 하늘의 바람에 따라 민족이 흩어진 일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오,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진리의 귀한 보화를 공개해 주기를 얼마나 갈망하셨던가! 그러나 그들의 영적 맹목이 너무나 심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진리를 그들에게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늘의 진리가 그들의 받아들임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그들은 자신들의 교의(敎義)와 무용한 의식에 집착해 있었다. 그들은 생명의 떡을 옆에 놓아두고 가라지와 껍질을 위하여 그들의 돈을 소비하였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서 그들이 오류 가운데 있는지 알기 위하여 부지런히 탐구하지 않았는가? 구약의 성경절들은 그리스도의 봉사에 대한 일체의 내용을 명백히 기술하였고 예수께서는 선지자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인용하고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다. 만일 그들이 성경을 정직하게 상고하고 그들의 이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시험해 보았더라면 예수께서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우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눅 13:35)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시는 증거를 훤히 알 수 있었을 것이며 그들이 긍지를 가졌던 성을 파멸시킨 재앙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마음은 그들의 몰지각한 완고성으로 말미암아 편협해졌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그들의 품성의 결함들을 드러내었고 회개를 요구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행습은 변화되어야 하며 그들이 품었던 희망은 포기되어야 한다. 그들은 하늘의 영예를 받기 위하여 인간의 영예를 희생해야 한다. 그들이 만일 이 새 랍비의 말씀을 순종한다면 그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나 교사들의 의견과는 달리 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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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그리스도의 시대에 인기가 없었다. 진리는 현시대에도 인기가 없다. 사단이 최초에 자고심으로 이끄는 거짓말을 제시함으로 진리에 대한 혐오감을 사람에게 심어 준 이래로 진리는 인기가 없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되지 않은 이론과 교훈에 접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마치 유대인들이 그들의 유전에 대하여 그러했던 것처럼 이런 이론과 교훈에 집착한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영적 자만에 가득 차 있었다.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욕망은 성전 봉사에서까지도 드러났다. 그들은 회당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들은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했으며 사람들의 입술에서 그들의 칭호가 불려지는 것에 만족을 느꼈다. 참된 경건이 쇠퇴함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의 유전과 의식을 더 엄하게 수호했다.

이기적인 편견으로 말미암아 이해력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들은 죄를 깨닫게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을 그의 생애의 겸비함과 조화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참된 위대성은 외관적인 장식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 사람의 빈곤은 자신이 메시야라는 주장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만일 그가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그러한 사람이라면 왜 그렇게도 겸손하단 말인가? 만일 그가 군사력이 없는데도 만족한다면 그들의 국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토록 오랫동안 고대해 왔던 권세와 영광이 어떻게 열국들을 유대인의 도성에 예속시킬 수 있을까?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이 온 땅을 지배하게 되리라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들이 오류에 빠질 수가 있을까? 라고 그들은 의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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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것은 단순히 그분의 생애에 외형적인 영광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분은 순결의 화신(化身)이었고 그들은 부정하였다. 그분은 사람들 가운데서 흠 없는 완전한 모본으로 생애하셨다. 그분의 책망할 것 없는 생애가 그들의 마음을 환하게 비췄다. 예수님의 신실성이 그들의 불신실을 드러냈다. 그것은 외식적인 경건의 공허함을 드러내고 그 죄악의 추악성을 그들에게 나타내 주었다. 이와 같은 빛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주의를 돌려서 그들의 학식과 경건을 칭찬하셨다면 그들은 그분을 기쁨으로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를 온 인류를 위한 자비의 시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바리새인들이 묵인할 수 없는 종교의 한 측면을 제시하고 계셨다. 그들 자신의 모본과 교훈은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바람직하게 보이도록 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워하고 배격하던 바로 그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관심을 두시는 것을 보았다. 이 사실은 그들의 교만한 마음에 최악의 감정을 격발시켰다. “유다 지파의 사자”(계 5:5)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이 모든 열국보다 높임을 받아 탁월하게 되리라는 자랑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견책과 그분의 순결한 임재 앞에서 그들이 느꼈던 책망을 견디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야심찬 희망이 깨어지는 것을 더 잘 견뎌 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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