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망 – 30일

28장 레위 마태

팔레스틴에 있던 로마 관리 중에 세리보다 더 미움을 받은 자는 없었다. 외세에 의하여 세금이 부과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독립이 떠나갔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을 계속적으로 자극하였다. 그리고 세금을 징수하는 자들은 단순히 로마의 압제의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치부하는 착취자였다. 로마 사람들의 지배 아래 이 직책을 맡은 유대인은 국가의 명예를 배신하는 자로 여겨졌다. 그는 배신자로서 멸시를 받았고 사회의 가장 비열한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레위 마태는 이 계층에 속한 사람으로, 게네사렛에서 부름을 입은 네 제자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사업에 부르심을 받을 사람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마태를 그의 직업에 따라 판단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마음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열려 있는 것을 아셨다. 마태는 구주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자각시키는 하나님의 영이 그의 죄됨을 드러냈을 때에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도움을 구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랍비들의 배척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이 크신 교사께서 자기를 주목해 보시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273-

어느 날 세관에 앉아 있을 때에 세리 마태는 예수께서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았다. 자기를 향하여 “나를 좇으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그는 매우 놀랐다.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았다. 마태의 마음에는 주저함이나 의심도 없었고 이익이 남는 사업이 가난과 곤란으로 바뀌어지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사업에서 그분과 연합할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이전에 부름을 받은 제자들 역시 그러하였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시자 즉시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렸다. 이 제자 중의 어떤 이들에게는 생계를 그들에게 의존하는 친구가 있었으나 구주의 초청을 받았을 때에 머뭇거리거나 내가 어떻게 생활하며 가족을 부양해야 할까 하고 묻지 않았다. 그들은 부르심에 순종하였다. 예수께서 후에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냈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고 물으셨을 때에 그들은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눅 22:35).

부유하던 마태에게나 가난하던 안드레와 베드로에게 똑같은 시험이 이르렀으며, 똑같은 헌신이 각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고 옛 생애에 대한 충동이 가장 강하던 성공의 순간에 예수께서는 바다에서 일하던 제자들에게 복음 사업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라고 요구하셨다. 이와 같이 각 사람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그리스도와 친분을 맺고자 하는 욕망 중에 어느 쪽이 더 강한지에 대해 시험을 받고 있다.

원칙은 항상 가혹하다. 하나님의 사업에 전심을 다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기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분의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 전적으로 바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으며 그분의 동역자가 되기는 더더욱 어렵다. 사람들이 위대한 구원을 인식할 때에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나타난 자아 희생은 그들의 생애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느 길로 인도하시든지 즐겨 따라갈 것이다.

마태를 불러서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은 큰 분노를 일으켰다. 한 종교 교사가 직접 수종하는 자로서 세리를 택한다는 것은 종교적·사회적 및 민족적 관습에 위반되는 행위였다.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편견에 호소함으로써 여론의 흐름이 예수를 반대하기를 원하였다.

세리들 간에는 광범위한 관심이 일어났다. 그들의 마음은 하늘의 교사에게로 이끌렸다. 마태는 새로운 제자가 된 기쁨에 이전의 친구들을 예수께 데려오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친척과 친구들을 함께 불렀다. 세리들만이 포함된 것이 아니라 의심스러운 평판을 받고, 보다 철두철미한 그들의 이웃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던 많은 다른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274-

잔치는 예수님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배설되었으며 그분께서는 이 호의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이 일이 바리새파를 성나게 하리라는 것과 또한 백성들 눈에 당신의 명성을 더럽히는 일이 될 것을 잘 아셨다. 그러나 어떤 정치적 문제도 그분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없었다. 그분에게는 외형적인 차별은 가치가 없었다. 그분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생수를 갈급하는 심령이었다.

예수께서는 세리들의 식탁에 귀빈으로 앉아 당신의 동정심과 사교적인 친절한 행위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분의 신임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였다. 갈급한 심령에 그분의 말씀은 축복과 생명을 주는 능력으로 임하였다. 새로운 충동이 일깨워지고 새 생애에 대한 가능성이 사회의 버림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열려졌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까지 그분을 시인하지 않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회합들에서 구주의 교훈에 감명을 받았다. 성령이 부어져 하루에 3천 명이 회개하였을 때에 이들 가운데는 세리들의 식탁에서 처음으로 진리를 들었던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 중에 얼마는 복음의 기별자들이 되었다. 연회석상에서 예수님의 모본은 마태 자신에게 끊임없는 교훈이 되었다. 멸시당하던 세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열심히 따르며 자기의 맡은 일에 가장 헌신한 복음 전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275-

랍비들은 마태의 집에서 베푼 잔치에 예수께서 참석하신 것을 알자 그분을 비난할 기회를 포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자들을 통하여 그 일을 하기로 선택하였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편견을 일으킴으로 그들을 주님과 이간시키기를 원했다. 제자들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비난하고 그리스도에게는 제자들에 대하여 비난하며 그들이 상처를 받을 성싶은 곳에 화살을 겨누는 것이 랍비들의 책략이었다. 이것이 곧 사단이 하늘에서 불만을 품은 이래로 일하여 온 방법이며, 불화와 이간을 일으키려고 애쓰는 자들은 모두 사단의 정신에 자극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질투심이 많은 랍비들은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 비난에 답변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친히 대답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영적으로 건강하므로 의사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 반면 세리들과 이방인들은 영혼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죽어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의사로서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계층의 사람들에게 가시는 것은 그분이 하실 일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을 높이 평가하였을지라도 사실은 그들이 멸시하던 자들보다 더 나쁜 상태에 있었다. 세리들은 고집과 자부심이 덜했으므로 진리의 감화에는 마음 문이 더 열려 있었다. 예수께서는 랍비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랍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말씀의 정신에는 전혀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바리새인들은 잠시 잠잠하였으나 그들의 적의는 더욱 굳어졌다. 그들은 다음으로 침례 요한의 제자들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구주를 대적하게 하려고 애썼다. 이 바리새인들은 침례 요한의 사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들은 침례 요한의 절제 생활, 단순한 습관, 초라한 의복을 경멸하는 투로 지적하였고 그를 광신자라고 선언하였다. 요한이 그들의 위선을 규탄하였으므로 그들은 요한의 말을 반대하였고 백성들이 그를 반대하도록 부추기려고 힘썼다. 하나님의 영이 이 조롱하는 자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였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권고를 거절하였으며 요한이 사귀에 들렸다고 말했다.

-276-

이제 예수께서 백성들과 섞여서 그들의 식탁에서 잡숫고 마시자 바리새인들은 그분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하였다. 이런 비난을 하는 자들 자신이 죄를 범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 의해 잘못 나타내지고 사단 자신의 속성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되신 것처럼 주님의 기별자들도 이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흑암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하늘의 빛을 주기 위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더불어 잡숫고 계신 것을 고려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들은 하늘의 교사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싹이 터서 하나님의 영광의 열매를 맺을 산 씨임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비록 침례 요한의 전도를 반대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일에 협력을 얻기를 원하여 요한의 제자들의 우정을 살 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고대의 유전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말하며 침례 요한의 준엄한 경건성과 세리나 죄인들과 더불어 잡수시는 예수의 행동을 대조시켰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때에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이때는 그들이 요한의 기별을 가지고 예수님을 방문하기 이전이었다. 그들의 사랑하는 선생은 감옥에 갇히고 그들은 슬픈 나날을 보냈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요한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시고 심지어 그의 교훈을 불신하시는 듯이 보였다. 만일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였다면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왜 그렇게 크게 다른 길을 가고 있는가?

요한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무슨 근거가 있으리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그들은 랍비들이 규정한 많은 규칙들을 지켰으며 심지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기를 원하였다. 유대인들은 금식을 공로가 있는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자들은 매주 이틀을 금식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물었을 때에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 중이었다.

예수께서는 매우 부드럽게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금식에 대한 그들의 그릇된 관념을 시정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다만 당신의 사명에 관하여 그들에게 올바르게 설명하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침례 요한 자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할 때에 사용했던 동일한 비유를 사용하여 이것을 설명하셨다.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 3:29)고 말했다. 예수께서 그 예증을 드시면서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이 하신 이 말들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77-

하늘의 임금이 당신의 백성 가운데 계셨다.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 세상에 주어졌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쁨이 되었으니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당신의 나라의 후사로 삼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부자들에게 기쁨이 되었으니 그분께서 영원한 재물을 얻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치실 것이기 때문이다. 무지한 자들에게 기쁨이 되었으니 그분께서 그들을 지혜롭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에게 기쁨이 되었으니 그분께서 그들이 일찍이 탐색하였던 어떤 신비보다도 더 깊은 신비를 그들에게 공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로부터 감추어졌던 진리들이 구주의 전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공개될 것이다.

침례 요한은 구주를 바라보고 기뻐했다. 하늘의 주재 되신 분과 함께 걷고 말할 특권을 받은 제자들은 얼마나 기뻐할 기회를 가졌던가! 지금은 그들이 슬퍼하고 금식할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흑암과 사망의 그림자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받아들이도록 마음 문을 열어야 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불러일으켰던 것은 빛나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 광경 저편에는 그분의 눈만이 식별하신 무거운 그림자가 놓여 있었다. 그분께서는 “그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팔려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볼 때에 제자들은 슬퍼하며 금식할 것이었다.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19, 20)고 하셨다.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오실 때에 그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었다. 승천하신 후에는 친히 함께 계시지는 않지만 보혜사를 통하여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므로 그들은 슬퍼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말아야 했다. 사단이 원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단은 제자들이 속임을 당했으며 실망 당했다는 인상을 세상에 주기를 바랐으나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계시는 하늘의 성소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대리자인 성령을 받기 위하여 마음 문을 열고 그분의 임재의 빛 가운데서 기뻐해야 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통치자들과 흑암의 왕국의 지도자들과 투쟁하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몸소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므로 그들이 보혜사를 식별하지 못하는 시험과 시련의 날들이 이르러 올 때 그들이 금식하는 것은 더욱 적합한 일이 될 것이었다.

-278-

바리새인들은, 마음은 질투와 분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엄격한 형식을 지킴으로 자신을 높이려고 힘썼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사 58:4, 5).

참된 금식은 단지 형식적인 의식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으며”,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사 58:6, 10) 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사업의 정신과 성격이 설명되어 있다. 그분의 전 생애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생애였다. 시험의 광야에서 금식하거나 마태가 베푼 잔치에서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거나 간에 예수께서는 잃은 자를 구속하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치고 계셨다. 참 헌신의 정신은 쓸데없이 슬퍼하는 일이나 단순히 육체를 괴롭히며 많은 희생을 드리는 일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자원하는 봉사에 자신을 바치는 가운데 나타난다.

요한의 제자들에게 계속 대답하시면서 예수께서는 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침례 요한의 기별은 유전과 미신으로 더불어 섞여서는 안 될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의 가식을 요한의 헌신에 혼합시키려는 시도는 이들 사이의 간격을 더욱 분명하게 해줄 뿐이었다.

그리스도의 교훈의 원칙도 바리새주의적 형식과 결합될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생긴 간격을 막지 않으실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낡은 것과 새것 사이의 분리를 더욱 분명히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더 깊이 예증하셨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를 담는 용기로 사용되던 가죽 부대는 얼마 후에는 말라 부서지기 쉽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포도주를 넣는 데는 쓸모없이 되어버린다. 이 잘 아는 실례로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상태를 나타내셨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관원들은 의식과 유전의 틀에 고착되어 있었다. 그들의 심령은 예수께서 비유하여 말씀하신 말라붙은 포도주 부대와 같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들이 율법주의적 신앙에 만족하는 상태에 있을 동안은 하늘의 산 진리의 위탁자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의가 매우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새로운 요소가 그들의 신앙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그들 자신들과는 거리가 먼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선행으로 말미암는 자신의 공로와 연결시켰다. 사랑으로 행하며 심령을 정결하게 하는 믿음은 의식과 사람의 교훈으로 된 바리새인들의 신앙과는 결합할 여지를 찾을 수 없었다. 예수님의 교훈과 기성의 종교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다. 발효시키는 포도주와 같이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는 낡고 쇠해져가는 바리새인의 유전의 가죽 부대를 터뜨릴 것이었다.

-279-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교훈을 필요로 하기에는 너무 현명하고, 구원을 필요로 하기엔 너무 의로우며,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존귀함을 필요로 하기에는 너무나 큰 존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구주께서는 하늘의 기별을 받고자 하는 다른 무리들을 찾기 위하여 그들에게서 돌아서셨다. 예수께서는 무식한 어부와 장터에 앉은 세리와 사마리아 여인과 당신의 말씀을 기쁘게 듣는 백성들 가운데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를 발견하였다. 복음 사업에 쓰이는 도구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빛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런 영혼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진리의 지식을 세상에 전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이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가죽 부대가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새 포도주로 그들을 채워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비록 새 포도주로 표상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태초부터 가르치셨던 교훈의 계시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원래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거의 모든 면에서 그들에게 새 것으로 보였고 시인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거짓 교훈의 능력이 진리에 대한 인식과 그것에 대한 욕망을 파괴시킨다고 지적하셨다. 예수께서는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부조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세상에서 주셨던 모든 진리는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서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귀중한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았다. 낡은 유전, 습관 및 행동을 비우기 전에는 그들의 정신과 마음에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죽은 형식에 집착하였고 산 진리와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는 돌아섰다.

-280-

유대인들의 멸망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었으며 그것은 또 오늘날에 있어서도 많은 영혼들의 멸망의 원인이 될 것이다. 허다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마태의 잔치에서 책망하셨던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그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품은 어떤 생각을 버리거나 혹은 어떤 우상과 같은 의견을 버리기보다는 오히려 빛 되시는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진리를 거절한다. 그들은 자아를 신뢰하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며 영적 빈곤을 깨닫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중요한 일을 수행하여 구원받는 그런 방식을 고집한다. 자아를 그 사업에 관여시킬 길이 전혀 없음을 볼 때 그들은 준비된 구원을 거절한다.

율법주의적인 종교는 사랑도, 그리스도도 없는 종교이므로 사람을 결코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없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정신에 의해 행해지는 금식이나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예배를 위한 엄숙한 집회, 종교적 의식의 반복, 외형적인 겸손, 남의 이목을 끄는 희생 제사 등은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자신을 의롭고 하늘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기만이다. 우리 자신의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시대와 같이 오늘날도 그러하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영적 결핍을 알지 못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7, 18)는 기별이 그들에게 임하고 있다. 믿음과 사랑은 불로 연단한 금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금은 빛을 잃었고 부요한 보화는 잃어버린 바 되었다. 그리스도의 의는 그들에게는 입지 않은 두루마기와 손대지 않은 샘과 같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 5)는 말씀이 그들에게 말해지고 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사람이 온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될 수 있기 전에 자아를 비우지 않으면 안 된다. 자아가 포기될 때 주께서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실 수 있다. 새 가죽 부대가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신자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를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품성이 나타날 것이다.

시대의 소망 pp. 272-280

Posted in ,

Cathy Constantinesc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