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망 – 08일

8장 유월절에 참여하심  유대인들에게 열두 살 되는 해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분기점(分岐點)이었다. 히브리의 남아들은 이 연령이 차면 율법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다. 그 아이는 종교적 교훈을 받을 특별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거룩한 절기와 예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어릴 때에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신 것도 이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 모든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요셉과 마리아도 해마다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으며 예수께서 적령(適齡)이 되셨을 때에 그들은 그분을 데리고 갔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연례적인 세 절기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주 앞에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세 절기 중 유월절에는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하였다. 유대인들이 흩어져 있었던 모든 나라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팔레스틴 각처로부터 경배자들이 많이 왔다. 갈릴리로부터의 여행은 여러 날이 걸렸으므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서로 동무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큰 무리를 지어서 갔다. 부녀들과 노인들은 험준한 돌작길을 소나 말을 타고 갔다. 건강한 사람과 젊은이들은 도보로 갔다. 유월절의 절기는 3월 말이나 4월 초순에 해당했으므로 온 땅은 꽃들로 화사하고 새들의 노랫소리로 흥겨웠다. 그들이 가는 길에는 줄곧 이스라엘의 역사상 기념될 만한 고적들이 있었고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지난 시절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행하신 기사에 대하여 상세히 말해 주었다. 그들은 노래와 음악으로 여행을 즐겁게 했으며 마침내 예루살렘의 탑들이 시야에 들어오면 모두가 목소리를 합하여 다음과 같은 개가를 불렀다.  -76-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시 122:2~7).  유월절을 지키는 일은 히브리 나라의 건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마지막 밤, 구원받을 아무런 징조도 보이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임박한 해방을 위해 준비하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애굽에 최후의 형벌이 내리게 될 것을 경고하는 동시에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가족들을 집에 모으도록 지시하셨다. 그들은 문설주에 살해된 어린양의 피를 뿌린 다음에 구운 어린양의 고기를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하였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 12:11)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밤 자정에 애굽의 모든 장자는 다 죽임을 당하였다. 그 때에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출 12:31)라는 기별을 보냈다. 히브리 사람들은 애굽에서 하나의 독립 국가로 나왔다. 주께서는 이 유월절을 해마다 지키라고 명하셨다.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하여 이 놀라운 구원에 대한 이야기는 대대로 되풀이해서 말해질 것이었다.  -77-  유월절을 뒤이어 7일간의 무교절이 있었다. 이 무교절의 둘째 날에는 그 해의 수확물 가운데 처음 익은 열매 즉 보릿단을 여호와 앞에 드렸다. 절기의 모든 의식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사업을 표상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구속에 대한 실물 교훈이었고 유월절은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 누룩 없는 떡, 처음 익은 곡식단은 다 구주를 상징하였다.  그리스도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절기의 준수는 형식주의로 전락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그 절기가 얼마나 의미심장했던가!  -78-  소년 예수께서 처음으로 성전을 바라보셨다. 그분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제사장들이 엄숙하게 성전 봉사를 행하는 것을 보셨다. 그분은 제단 위의 피 흘리는 제물을 바라보셨다. 향연이 하나님 앞으로 올라갈 때에 그분은 다른 경배자들과 함께 머리 숙여 기도하셨다. 그분은 그 감명적인 유월절 예식들을 목도하셨다. 그분은 날마다 그 예식들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셨다. 의식의 모든 행사는 자신의 생명과 관련이 있는 듯이 보였다. 새로운 충동이 그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분은 조용하고 열심히 어떤 큰 문제를 풀어내시려고 하는 듯이 보였다. 당신의 사명의 신비가 구주에게 공개되고 있었다.  이런 장면들을 명상하는 일에 골똘하여 그분은 부모 곁에 머무르시지 않았다. 그분은 홀로 있기를 원하셨다. 유월절 예식이 끝난 후에도 그분은 여전히 성전 뜰에 남아 계셨다. 그래서 다른 참여자들이 떠나간 후에도 그분은 뒤에 남으셨다.  예수님의 부모는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에 그분을 이스라엘의 훌륭한 교사들과 접촉시키기를 원하였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은 엄밀히 순종하였으나 랍비의 의식과 관습은 따르지 않으셨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분이 학식 있는 랍비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요구 사항들에 더욱 더 유의하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성전 안에 계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셨다. 그분은 받으신 것을 곧 남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하셨다.  그 당시에는 선지자 학교의 본을 따라 성전에 연결된 한 방이 거룩한 학교로 구별되었다. 여기에 저명한 랍비들이 그들의 문하생들과 함께 모였는데 소년 예수께서 이곳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이 위엄 있는 학자들의 발아래 앉아서 그들이 가르치는 교훈에 귀를 기울이셨다. 그분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으로서 이 선생들에게 메시야의 초림을 지적하는 예언의 말씀과 그때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하여 질문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갈망하는 자로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예수께서 하신 질문들은 오랫동안 가려져 왔었으나 실상은 영혼의 구원에 극히 중대하고 심오한 진리들을 생각나게 해주었다. 모든 질문은 이 학자들의 지혜가 얼마나 편협하고 피상적인가를 드러낸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신령한 교훈을 주었고 진리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해 주었다. 랍비들은 메시야가 강림하시면 유대 나라는 놀랍게 높임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제시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어린양의 고난과 죽음을 예시하는 그 성경절들의 의미를 질문하셨다.  박사들은 그분에게 질문의 화살을 돌렸는데 그들은 그분의 대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어린이의 겸손한 태도로 성경 말씀들을 암송하면서 박사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깊은 뜻을 드러내셨다. 그분께서 지적해 내신 진리의 체계들은, 만일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면 그 당시의 종교에 개혁을 일으켰을 것이다. 또한 영적 사물에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며 따라서 예수께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80-  랍비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예언에 대한 이해는 그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그들은 이 생각이 깊은 갈릴리의 어린이가 장래성이 매우 많음을 알았다. 그들은 그분을 학생으로 삼아서 장차 이스라엘 나라의 교사로 만들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이 독창적인 재능을 그들의 뜻대로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분의 교육을 책임지기를 원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일찍이 사람의 말로는 움직여지지 않았던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빛을 주려고 하셨으며,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그들의 교만은 그들이 타인의 교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냉소하고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려는 태도를 보였더라면 그들은 듣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가르치고 있거나, 적어도 그분의 성경 지식을 시험하고 있다고 자위하였다. 예수님의 소년다운 겸손과 미덕이 그들의 편견을 제거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무의식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열렸고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말씀하셨다.  그들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예언에 의해 지지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부추겨 준 종전의 이론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노라고 주장하는 성경 말씀을 오해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는 질문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빛이 흑암 중에 비치고 있었으나 “어둠이 깨닫지 못하”(요 1:5)였다.  한편 요셉과 마리아는 큰 혼란과 걱정 속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그분이 뒤에 남아 계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당시 나라의 인구는 매우 조밀하였으며 갈릴리에서 온 무리의 대열은 매우 컸다. 그들이 도시를 떠날 때에 큰 혼잡이 있었다. 그들은 가는 도중에 친구와 친지들과 함께 여행하는 기쁨에 관심이 몰두되어 밤이 되기까지 그분이 없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쉬기 위하여 머물렀을 때에 도움이 되는 아이의 손길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분이 무리 가운데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비록 어렸지만 그들은 그분을 전적으로 신임하였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필요를 미리 알고 언제든지 와서 그들을 도와주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염려가 되었다. 그들은 온 무리를 다 살펴보았으나 헛일이었다. 그들은 그분의 유아 시절에 헤롯이 그분을 죽이려고 하던 것을 기억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불길한 예감이 그들의 마음을 채웠다. 그들은 크게 자책했다.  -81-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찾으러 돌아다녔다. 그 이튿날 그들이 성전에 경배하러 왔던 사람들과 함께 섞여 있을 때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들이 그 음성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분의 음성처럼 진실되고 열성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음조로 충만한 음성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랍비의 학교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기쁘기는 하였으나 괴로워하고 걱정하던 것에 대하여 잊을 수가 없었다. 예수께서 그들과 다시 함께 있게 되자 어머니는 책망 섞인 말로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셨다. 그들이 그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을 때에 그분은 위를 가리키셨다. 그분의 얼굴에는 빛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 광채를 보고 놀랐다. 신성이 인성을 통하여 번쩍였다. 성전에서 그분을 발견하였을 때에 그들은 그분과 랍비 사이에 오가는 말을 듣고 그분의 질문과 대답에 놀랐다. 그분의 말은 도무지 잊혀지지 않을 여러 생각을 연달아 일으켰다.  그리고 부모에게 한 그분의 질문에는 교훈이 있었다. 그분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해야 할 일에 종사하고 계셨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이 할 일을 등한히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맡기심으로 그들에게 높은 영예를 베푸셨다. 거룩한 천사들은 예수님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요셉의 행로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그분을 온 종일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근심에서 놓여났을 때에 그들은 자신들을 책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에게 질책의 말을 던졌다.  예수님의 부모가 그분을 그들의 자식으로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분은 날마다 저희와 같이 살고 그분의 생애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른 아이들과 같았으므로 그들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구주와 함께 살게 하신 축복에 감사하지 않을 위험이 있었다. 그분과 헤어짐으로 그들이 괴로워한 일이나 그분이 은근히 책망한 말은 그들에게 그들이 맡은 책임의 신성성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에게 대답하는 말씀 가운데서 처음으로 그분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이해하였음을 나타내셨다. 예수의 탄생 전에 천사는 마리아에게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라”(눅 1:32, 33)고 말하였다. 마리아는 이 말을 마음속에 두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아이가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될 것은 믿으면서도 그분의 사명에 대하여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분이 요셉과의 친족 관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을 알았다.  -82-  예수께서는 육신의 부모에 대한 당신의 관계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예루살렘에서 부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 후 수고스러운 부모들의 생계를 도우셨다. 그분은 마음 가운데 자신의 사명의 신비를 감추고 사업을 시작할 지정된 시기를 겸손히 기다리셨다. 그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식한 후 18 년간 당신과 나사렛 가정과의 유대 관계를 인정하셨으며 아들과 형제와 친구와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행하셨다.  성전에서 당신의 사명이 그분에게 공개되었을 때에 예수님은 무리들과 접촉하기를 꺼리셨다. 그분은 자신의 생애의 비밀을 아는 자들과 함께 조용히 예루살렘에서 돌아가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예식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의 마음을 이 세상의 근심과 수고에서 돌이켜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낼 때에 행하신 큰 기사를 회상시키려고 하셨다. 그분은 이 기사 가운데서 그들이 죄로부터의 구원의 약속을 발견하기 원하셨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들을 보호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는 그들의 영적 생명을 구원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그분의 생명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에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표상적 예식은 예배자들을 그들의 개인의 구주로서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할 때에만 효력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하고 명상하도록 이끌려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무리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갈 때에 여행에 대한 흥분과 사교적인 교제에 그들의 관심이 너무 몰두되어 그들이 목도하였던 예식은 잊혀졌다. 구주께서는 그러한 무리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고난을 당하시는 구주에 대한 예언으로 향하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분은 갈바리에서 겪을 당신의 어머니의 슬픔을 덜어 주려고 힘쓰셨다. 지금 그분은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분의 마지막 고통을 목도하게 될 것이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녀가 그분의 사명을 깨달아서 칼이 그녀의 마음을 찌를 때에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를 바라셨다. 예수께서 어머니와 헤어졌을 때에 어머니가 사흘 동안 근심하면서 그분을 찾은 것처럼 그분께서 세상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실 때에도 어머니는 다시 사흘 동안 그분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에 그녀의 슬픔은 다시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마리아가 지금 예수께서 그녀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 성경절을 깨달았다면 그분께서 운명하실 때에 당할 고민을 얼마나 더 쉽게 견딜 수 있었을까!  -83-  만일 요셉과 마리아가 묵상과 기도로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머무르게 했다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위탁된 직분의 신성성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며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를 등한히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구주를 잃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흘 동안 근심하면서 그분을 찾으러 다녔다. 우리도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한다. 우리는 쓸데없는 잡담과 험담과 기도의 등한으로 말미암아 단 하루 동안에 구주에게서 떠나가게 되며 잃어버렸던 평안을 다시 회복하려면 여러 날을 슬퍼하면서 그분을 찾아야 할 것이다. …

Read More

시대의 소망 – 007일

7장 유년 시대  예수께서는 유년과 청소년 시대를 한 작은 산촌에서 보내셨다. 이 세상에서 그분의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예롭게 되지 않을 장소는 하나도 없었다. 왕궁에서라도 그분을 손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유한 가정이나, 왕궁이나, 유명한 학자의 저택을 지나치시고, 궁벽하고 천시 받는 나사렛을 거처로 삼으셨다.  그분의 초기 생애에 관한 간단한 기록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얼굴에서 비추는 햇빛 아래서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눅 2:52)셨다. 그분은 정신이 민활하고 통찰력이 있었으며, 나이에 비하여 생각이 깊고 지혜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분의 품성에는 균형 잡힌 아름다움이 있었다. 정신력과 체력은 아이의 성장 법칙에 따라 점점 발달하였다.  예수께서는 유년의 독특한 사랑스러운 기질을 나타내셨다. 그분의 자발적인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그분은 아무것도 침해할 수 없는 인내와 결코 고결함을 희생시키지 않는 진실성을 나타내셨다. 원칙에는 반석과 같이 확고하였지만 그분의 생애는 이기심 없는 인정을 드러내셨다.  -69-  예수님의 어머니는 그분께서 능력을 발휘하시는 것을 매우 진지하게 주목하였으며 그분의 품성에 나타난 완전의 표적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기쁨으로 그 명랑하고 감수성이 많은 아이의 마음을 격려하기를 힘썼다. 그녀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그의 아버지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 아이를 양육하는 일에 하늘 천사들과 협력하기 위한 지혜를 받았다.  아주 옛날부터 이스라엘의 신실한 자들은 청소년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주께서는 아이들을 아주 어릴 때부터, 특히 하나님의 율법에 명시되고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위대하심에 대하여 가르치라고 명하셨다. 찬미와 기도와 성경의 교훈들은 지성이 뜨이기 시작하는 아이들의 마음에 적응되도록 해야 할 것이었다. 부모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표현인 것과 또한 그들이 율법의 원칙을 마음속에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의 심령에 새겨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였다. 가르치는 일은 주로 구두로 하였으나 청소년들은 또한 히브리 저술들을 읽는 법을 배웠고 양피지 두루마리에 기록된 구약 성경을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 당시에는 청년들의 종교적 지도를 위하여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마을이나 도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곳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 교훈은 형식화되어 있었다. 유전이 성경을 대신하는 일이 많았다. 참된 교육은 청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행 17:27) 하도록 인도할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 교사들은 의식에 대한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의 마음은 배우는 자에게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욱 높은 학교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할 그런 요소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얻어지는 경험은 그 교육 제도에서 자취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외양적인 것들에 열중한 학생들은 하나님과 조용히 보낼 시간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음에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였다. 그들은 지식을 찾는 가운데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돌아섰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가장 요긴한 것이 무시를 당하였다. 율법의 원칙들은 모호해졌다. 탁월한 교육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참된 향상에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랍비들의 훈련을 받음으로 청소년들의 능력은 억압을 당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제한을 당하고 좁아졌다.  -70-  아이 예수는 회당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분의 어머니가 최초의 인간 교사였다. 그분은 어머니의 입술과 선지자들의 두루마리로부터 하늘 사물에 대하여 배우셨다. 그분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말씀을 이제는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서 배우셨다. 유년기에서 소년으로 자라나실 때에도 그분은 랍비의 학교를 찾지 않으셨다. 그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얻는 교육이 그분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는데 이는 하나님이 바로 그분의 교사이셨기 때문이다.  구주의 공생애 동안에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한 질문은 예수께서 글을 읽으실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랍비의 교육을 받지 않으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요 7:15). 그분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지식을 얻으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그처럼 성경에 정통하신 사실은 소년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부지런히 연구하셨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분 앞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으로 채워진 큰 도서관이 펼쳐져 있었다. 만물을 만드신 그분께서 당신의 손으로 친히 땅과 바다와 하늘에 쓰셨던 교훈을 연구하셨다. 그분은 세상의 부정한 방법들을 떠나서 천연계로부터 학문적 지식을 얻으셨다. 그분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의 생명을 연구하셨다. 그분은 유년 시대부터 오직 한 목적에 사로잡히셨는데 곧 남을 축복하기 위하여 생애하셨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자원을 그분은 천연계 가운데서 발견하셨다. 식물과 동물, 생물의 생태를 연구하시는 동안 새로운 방법과 수단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번개같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분은 보이는 사물로부터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소개할 수 있는 예증들을 끌어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셨다. 공생애 동안 비유를 들어서 진리의 교훈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신 것을 보면 그분은 천연계의 감화에 대하여 얼마나 마음 문을 열어 놓으셨으며, 일상생활의 환경으로부터 영적 교훈을 어떻게 취하셨는지를 알게 된다.  그와 같이 예수께서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려고 힘쓰셨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천연계의 깊은 뜻이 그분께 펼쳐졌다. 하늘의 천사들이 그분의 수종자였으므로 거룩한 사상과 교제를 계발시킬 수 있었다. 지성의 눈이 처음 뜨일 때부터 그분은 영적 은혜와 진리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끊임없이 자라나셨다.  어떤 아이든지 예수께서 지식을 얻으셨던 것처럼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와 친숙하게 되려고 노력할 때에 천사들은 우리에게 접근하고, 우리 마음은 연단되며 우리의 성품은 고상해지고 세련될 것이다. 우리는 더욱 우리…

Read More

시대의 소망 – 006일

6장 “우리가 그의 별을 보았노라”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명문 출생이며 그 나라에서 재물과 지식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매우 유력한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는 백성들의 우매함을 나쁘게 이용하는 자들도 많았으나 천연계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표적을 연구하고 그들의 청렴함과 지혜로 존경을 받던 정직한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님을 찾아온 박사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빛은 항상 이교의 흑암 속에서 비치고 있다. 이 박사들이 별이 총총한 하늘을 연구하고 그 별들의 빛나는 궤도 안에 숨은 신비를 탐구할 때에 그들은 창조주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더욱 명확한 지식을 찾는 가운데 히브리 성경에 관심을 돌렸다. 그들의 나라에서도 거룩한 교사가 오시리라고 예언한 예언서들이 있었다. 한때는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발람도 이들 박사의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는 이스라엘의 번영과 메시야의 나타나심을 예언하였고 그의 예언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전설로 전하여 내려왔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는 구주의 강림이 더욱 명백히 계시되어 있었다. 박사들은 구주의 강림이 가까웠다는 것과 온 세상이 주의 영광의 지식으로 충만하게 될 것을 알고 기뻐하였다.  -60-  박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베들레헴의 언덕을 가득히 채웠던 바로 그 밤에 하늘에 빛나는 신비한 빛을 보았다. 그 빛이 사라지자 광채나는 한 별이 나타나 하늘에 머물렀다. 그 별은 항성(恒星)도 유성(游星)도 아니었으므로 그 현상은 극도의 흥미를 일으켰다. 그 별은 멀리서 빛을 발하는 천사의 무리였는데 박사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별이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제사장과 철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보고 고대의 두루마리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발람의 예언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나”(민 24:17)리라. 이 이상한 별이 약속된 분을 예고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닐까? 박사들은 하늘에서 주신 진리의 빛을 환영하였으므로 이제 그 빛은 더욱 광명한 빛줄기로 그들을 비추었다. 그들은 꿈을 통하여 새로 탄생하신 왕을 찾으러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히 11:8)간 것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구름기둥을 따라 약속의 땅에 간 것같이 이 이방 사람들도 약속된 구주를 찾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동방의 나라에는 귀한 물건들이 풍부하였으므로 박사들은 빈손으로 출발하지 않았다. 왕이나 지위가 높은 명사들에게 존경을 나타내는 행위로써 예물을 증정하는 것이 풍습이었는데, 그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고귀한 선물이 그분 안에서 세상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게 되어 있는 분에게 예물로 드려져야 했다. 별을 보면서 가기 위하여 밤에 여행해야 했다. 그들은 그들이 찾으려 하는 분에 대한 전설과 예언들을 암송하면서 그 시간을 보냈다. 쉬기 위하여 멈출 때마다 그들은 예언을 살펴보았으며 그들이 하늘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확신은 깊어졌다. 그들은 외적 표적으로써 그들 앞에 별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그들을 소망으로 고무시키는 성령의 내적 증거도 가졌다. 그 여행은 비록 길었지만 그들에게는 즐거운 여행이었다.  그들이 이스라엘 나라에 도착하여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감람산에서 내려올 때에 피곤한 여행길을 내내 인도해 오던 별이 성전 위에 멈추었다가 얼마 후에 사라져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메시야의 탄생이 각 사람의 기쁨에 찬 대화의 주제가 되리라고 확신하면서 열띤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들은 헛일이었다. 그들은 거룩한 성에 들어가 성전으로 갔다. 놀랍게도 그들은 새로 탄생하신 왕에 대하여 아는 듯한 사람을 한 사람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의 질문은 기쁨의 말이 아닌 조롱이 섞인 놀람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61-  제사장들은 유전들을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과 자신의 경건성은 높이면서 헬라 사람과 로마 사람은 이방인이요, 다른 민족들보다 더 큰 죄인들이라고 비난한다. 이 박사들은 우상 숭배자들이 아니었으며, 하나님 보시기에는 당신을 경배하노라고 공언하는 이들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말씀의 수호자로 임명을 받은 자들 가운데서도 이들의 열렬한 물음에 동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동방 박사들이 왔다는 소식이 온 예루살렘에 신속히 퍼졌다. 그들의 이상한 사명은 백성들 가운데 흥미를 일으켰으며, 그 소식은 헤롯의 왕궁에까지 들어갔다. 이 간교한 에돔 사람은 혹시 자기의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가 왕위를 획득하기까지 걸어온 길은 무수한 사람의 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는 이방인의 혈통이었으므로 그가 다스리는 백성으로부터 증오를 받았다. 그의 유일한 안전책은 로마의 총애였다. 그러나 이 새로 나신 왕은 보다 높은 권리를 가졌으니 이는 바로 그 나라 태생인 까닭이었다.  헤롯은 제사장들이 이 낯선 박사들과 음모하여 대중 폭동을 일으켜서 자기를 폐위시키지나 않을까 의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의심을 숨기고 보다 뛰어난 간계로써 그들의 음모를 좌절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소집하고 메시야께서 탄생하실 장소에 대하여 그들의 성경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를 그들에게 물었다.  -62-  동방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 요구할 때에 왕위 찬탈자의 이 질문은 유대인 교사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그리고 예언서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은 질투심이 많은 폭군을 격노케 만들었다. 그는 그들이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정보를 감추려고 하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들이 감히 무시하지 못할 권위를 가지고 그는 그들에게, 면밀히 살펴서 예상되는 왕의 탄생지를 밝혀 달라고 명령하였다.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헤롯은 이제 박사들을 조용히 만나자고 초청하였다. 그의 심중에는 분노와 공포의 폭풍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고 이 외국인들을 정중히 영접하였다. 그는 별이 나타난 때를 물으면서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기쁨으로 환영한다고 공언하였다. 그는 이 방문객들에게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렇게 말한 후에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장로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그들이 가장한 것처럼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났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이미 들어왔지만 랍비들은 그 소식을 유의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였다. 그들 자신들이 예수를 발견하고, 박사들을 예수의 탄생지로 인도할 준비를 갖추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동방 박사들이 와서 메시야의 탄생에 대하여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말했다.  이제 교만과 시기는 빛에 대하여 문을 닫아버렸다. 만일 목자들과 박사들이 전한 소식들이 신임을 받는다면, 제사장과 랍비들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의 해설자라는 그들의 주장이 그릇되었음을 증명할 것이었다. 이 학문이 있는 교사들은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자신들을 낮추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간과하시고 무식한 자들이나 할례 받지 못한 이방 사람들과 교통하실리 만무하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을 흥분시키고 있는 그 소식을 경멸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들은 그 일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베들레헴에 가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에 대한 관심을 일종의 광신적인 흥분으로 여기도록 이끌었다. 여기서 제사장과 랍비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그들의 교만과 완고함은 구주를 결정적으로 미워하기까지 자라났다.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문을 여시는 동안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에게 문을 닫고 있었다.  -63-  박사들끼리만 예루살렘을 출발하였다. 그들이 성문을 나설 때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지만 매우 기쁘게도 그들은 그 별을 다시 보았고, 베들레헴으로 인도 받았다. 그들은 목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초라한 형편에 대하여는 아무런 암시도 받지 못하였었다. 그들은 오랜 여행 후에 유대 나라 지도자들의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실망을 당했으며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는 이 성에 들어올 때보다 확신을 잃어버렸다.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은 새로 탄생하신 왕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렬한 왕의 근위병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세상의 귀인은 한사람도 그 곳에 없었다. 예수님은 구유 안에 눕혀 있었다. 교육받지 못한 부모가 그분을 지키는 유일한 수호자였다. 이 아기가 과연 성경에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존된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방의 빛”이 되어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겠다고 기록된 바로 그분이실까?(사 49:6).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라한 외형 속에 숨어 있는 신성의 임재를 인식하였다. 그들은 진심으로 그분을 구주로 믿고 그들의 예물,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다. 그들은 얼마나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가! 훗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고 로마 백부장에게 하신 말씀은 동방 박사들에게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64-  박사들은 예수님에 대한 헤롯의 의중을 간파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여행의 목적을 이루자 그들의 성공을 헤롯에게 알릴 생각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꿈 가운데서 그와 더 이상 교통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기별을 받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피하여 다른 길로 고국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요셉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가라는 경고를 받았다. 천사는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고 말하였다. 요셉은 지체하지 않고 순종하여 더욱 안전한 곳을 향하여 밤중에 길을 떠났다.  하나님께서는 동방 박사들을 통하여 유대 백성들에게 당신의 아들의 탄생에 주의를 환기시키셨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한 질문들, 그로 인해 야기된 백성들의 관심 그리고 심지어는 제사장들과 랍비의 관심을 강요한 헤롯의 시기심 등은 사람들의 마음을 메시야에 관한 예언과 방금 발생한 큰 사건에 이끌리게 하였다.  -65-  사단은 세상으로부터 하늘의 빛을 차단하는 일에 열중하였으며 구주를 죽이려고 온갖 간책을 다 썼다. 그러나 결코 졸거나 주무시지도 않는 분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지키고 계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리시고 기근의 때에 엘리야를 먹이신 분께서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위하여 이방 나라에 피난처를 준비하셨다. 주께서는 이방 나라의 박사들이 가져온 예물을 통하여 애굽으로 가는 여행과 타향에서 우거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마련해 주셨다. …

Read More

시대의 소망 – 005일

5장 봉헌식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지 약 40일 후에 요셉과 마리아는 그분을 주께 바치고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 이것은 유대인의 법에 따른 것으로 인간의 대속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모든 조목을 따라야 하셨다. 그분은 율법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으로 이미 할례를 받으셨다.  율법은, 어머니를 위해 1년 된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고 어린 비둘기나 반구를 속죄 제물로 드리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율법의 규정에 의하면 만일 부모가 너무 가난하여 어린 양을 드릴 수 없을 경우 반구 한 쌍이나 혹은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한 마리는 번제로, 다른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주께 드리는 모든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였다. 이 제물들은 그리스도를 표상하였는데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 자신은 육체적 결함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분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벧전 1:19)이셨다. 그분의 신체 조직은 어떠한 결함으로도 훼손을 받지 않았다. 그분의 몸은 튼튼하고 건강했다. 그리고 그분은 평생토록 자연 법칙에 일치하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은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가 당신의 법칙을 순종함으로 어떠한 사람이 되도록 의도하셨는지를 보여 준 모본이셨다.  -51-  초태생을 주께 바치는 일은 아주 옛날에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장자를 주기로 약속하셨다. 이 선물은 각 가정에서 장자를 봉헌하는 것을 통하여 인정되어야 했다. 사람들 가운데 거하실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자로서 그는 제사장직에 바쳐져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실 때에 처음 난 것을 바치라는 명령이 다시 주어졌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 사람들의 종노릇하고 있을 때에 주께서는 모세에게 애굽 왕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출 4:22, 23)라고 말하도록 지시하셨다.  모세는 이 기별을 전하였으나 거만한 애굽 왕은 듣고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고 대답하였다.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고 바로에게 무서운 재앙들을 보내셨다. 마침내 멸망시키는 천사에게 애굽 사람들의 장자와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죽이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그들의 문설주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는 지시를 받았다. 천사가 살육하는 사명을 가지고 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가정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이렇게 표를 해 놓아야 하였다.  애굽에 이 재앙을 내리신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출 13:2; 민 3:13). 성막 제사 제도가 확립된 후에 여호와께서는 레위 지파를 온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성전 봉사를 하도록 선택하셨다. 그러나 장자는 여전히 주의 것으로 여겨져서 속전(贖錢)으로 다시 사도록 되어 있었다.  그와 같이 장자를 드리는 규례는 특히 의미심장한 것이 되었다. 이것은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기이하게 구원해 내신 일에 대한 한 기념물인 동시에 또한 장차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될 더욱 큰 구원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문설주에 뿌려진 피가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를 구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에는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52-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바치는 일은 얼마나 중대한 의미가 있었던가! 그러나 제사장은 그 휘장을 꿰뚫어 보지 못하였다. 그는 그 너머에 있는 신비를 깨닫지 못하였다. 어린아이를 바치는 일은 흔히 보는 일이었다. 매일 제사장은 아기들이 바쳐질 때마다 속전을 받았다. 그들은 날마다 그들의 일과를 되풀이하는 가운데 부모의 부나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어떤 표시가 보이지 않으면 그 아기나 부모에 대하여 별로 유의하지 않았다.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기를 안고 갔을 때에 제사장들은 그들을 갈릴리 사람처럼 차리고 또 아주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남자와 여자로만 여겼다. 그들의 외양에 주목을 끌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그들은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드리는 제물을 드렸을 뿐이었다.  제사장은 그의 공적인 의식을 행했다. 그는 아기를 그의 팔에 안고 제단 앞에서 쳐들었다. 어머니에게 아기를 돌려 준 후에 그는 장자의 명부에 “예수”라는 이름을 기입하였다. 그는 그 아기가 자기 팔에 안기었을 때에 이 아기가 바로 하늘의 주재시요, 영광의 왕이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 제사장은 모세가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행 3:22)고 기록한 것이 이 아기를 가리킨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그분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모세가 간구했었던 분이 바로 이 아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보다 더욱 크신 분께서 제사장의 팔에 안기었다. 제사장이 그 아기의 이름을 명부에 올렸을 때에 그는 곧 온 유대의 제사 제도의 기초가 되시는 분의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그 이름은 그 제도에 종말을 고할 것이었다. 그 까닭은 제사와 제물의 제도가 점점 낡아가고 있었으며 표상은 그 원형(原型)에, 그림자는 그 실체에 거의 도달하였기 때문이었다.  성소의 속죄소에 나타나던 여호와의 영광(쉐키나)은 떠나가 버렸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아기 안에 천사들이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영광이 가려져 있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이 아기는 에덴의 입구에 쌓은 첫 제단이 가리켰던 약속의 후손이셨다. 그는 실로 곧 평강을 주시는 분이셨다. 이 아기가 바로 모세에게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선포하신 분이셨다. 그가 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분이셨다. 이 아기가 바로 선지자들이 오래전부터 예언한 분이셨다. 그는 만국의 보배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셨다. 이스라엘의 명부에 기록되어 우리의 형제임을 선포하는 그 연약한 작은 아기의 이름은 타락한 인류의 소망이었다. 그를 위하여 속전이 지불되었던 이 아기가 바로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전을 지불하실 분이셨다. 그는 참된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시요, “갈리지 아니”하는 “제사 직분”의 머리시요,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신 중보자이셨다(히 10:21, 7:24, 1:3).  -55-  영적인 일들은 영적으로라야 분별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당신이 행하려고 오셨던 사업을 위하여 성전에서 바쳐지셨다. 제사장은 보통 다른 아이를 보듯이 그를 보았다. 그 제사장이 어떤 비범한 것을 보거나 느끼지 못하였지만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행위는 인정을 받았다. 이 기회는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일이 없이 그냥 지나가지는 않았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라.  성전에 들어갈 때에 시므온은 한 가족이 그들의 장자를 제사장 앞에 바치는 것을 본다. 그들의 외양은 가난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시므온은 성령의 경고하심을 깨닫고 주께 드려지고 있는 그 아기가 곧 이스라엘의 위로이시며 자기가 보기를 사모하던 자라는 깊은 감명을 받는다. 놀란 제사장의 눈에 시므온은 기쁨에 도취된 사람처럼 보인다. 시므온은 방금 마리아가 되돌려 받은 아기를 자기 팔에 안고 하나님께 바치는데 그때에 그의 마음에는 전에 느껴 보지 못한 기쁨이 영혼에 밀려온다. 그가 아기 구주를 공중에 쳐들면서,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취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예언의 영이, 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하였다. 요셉과 마리아가 그의 말에 놀라면서 곁에 서 있을 때에 그는 그들에게 복을 빌고 마리아에게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고 말하였다.  여선지자 안나도 들어와서 시므온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한 말을 확증하였다. 시므온이 말할 때에 안나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났다. 그는 자기가 주 그리스도를 보도록 허락받은 것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를 드렸다.  이 겸손한 경배자들은 예언을 헛되이 연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나라의 관원과 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자들 또한 그들 앞에 귀한 예언의 말씀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의 길로 행하지 않고 있었으며 저들의 눈은 생명의 빛을 보기 위해 열려 있지 않았다.  오늘날도 역시 그러하다. 종교 지도자들과 성전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온 하늘의 주의가 집중되어 있는 사건들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러한 사건들이 발생한 사실도 모르고 있다. 사람은 역사상의 그리스도는 인정하면서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게서는 돌아선다. 1천8백 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자아 희생을 요청하는 말씀을 하시고 구제를 요구하는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하시며 가난과 수고와 비난이 따르는 의로운 사업을 행하시는 그리스도를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

Read More

시대의 소망 – 004일

4장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영광의 왕께서 자기를 낮추고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의 지상에서의 환경은 거칠고 험악하였다. 그분의 영광이 가려졌던 것은 외양의 위엄이 주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모든 외적 장식을 피하셨다. 재물, 세상의 명예, 인간적인 위대함은 결코 영혼을 사망에서 구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어떤 세속적 성질의 매혹물로 사람들을 당신의 편으로 이끌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직…

Read More

시대의 소망 – 003일

3장 “때가 차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 5). 구주의 강림은 에덴에서 예언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약속을 처음으로 듣고 속히 성취되기를 고대하였다. 그들은 맏아들이 구주이기를 바라면서 그 아들을 기쁨으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의 성취는 지체되었다. 이 약속을 처음으로 받은 사람들은 그 약속의 성취를…

Read More

시대의 소망 – 002일

2장 선택된 백성  유대인들은 1천 년 이상 구주의 오심을 기다렸다. 그들은 이 사건에 그들의 가장 빛나는 소망을 두었다.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노래와 예언 가운데, 또는 성전 의식과 가정 기도 가운데 포함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 그분을 알지 못하였다. 하늘의 총애를 받으시는 자가 저들에게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이 보였으며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그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사 53:2; 요 1:11).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율법과 또한 구주를 알려 주는 표상과 예언의 지식을 인류 가운데 보존하도록 그들을 부르셨다. 그분은 그들이 세상에서 구원의 샘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가 머물던 땅에서의 아브라함처럼, 애굽에서의 요셉처럼, 바벨론 궁전에서의 다니엘처럼 히브리 백성들도 열방 가운데서 그러해야 할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것이었다.  주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내가…네게 복을 주어…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2, 3)고 말씀하셨다. 이 교훈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반복되었다. 이스라엘이 비록 전쟁과 사로잡힘으로 인하여 황폐된 이후에도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미 5:7)라는 약속은 그들의 것이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 관하여 주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고 선언하셨다.  -28-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속적 위대함에 그들의 소망을 고착시켰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던 때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 이방 사람의 풍습을 좇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경고를 보내셨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이방의 압제로 징계를 받았으나 그것도 무익하였다. 개혁이 있을 때마다 보다 더 큰 배도가 그 뒤를 따랐다.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성실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존귀와 높임을 통하여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순종의 길로 행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셨을 것이다.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고 모세는 말하였다.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열국은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신 26:19, 28:10, 4:6)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불충실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계속적인 역경과 굴욕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  그들은 바벨론에 종속되어 이방 나라들 가운데 흩어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새롭게 하였다. 그들이 버드나무 위에 그들의 수금을 걸어 놓고 황폐된 성전을 생각하며 슬퍼할 때에 진리의 빛이 그들을 통하여 비쳐나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열방에 퍼지게 되었다. 이방 사람의 희생 제도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를 왜곡한 것이었다. 이방 나라의 의식을 신실히 지키는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사 제도의 참뜻을 배웠으며 믿음으로 구주에 대한 허락을 굳게 잡았다.  사로잡혀간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핍박을 당하였다. 안식일을 범하기를 거절하고 이방 나라의 절기 지키기를 거절함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우상 숭배자들이 진리를 멸절시키려고 분기했을 때에 주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왕들과 위정자들 앞에 서게 함으로 그들 자신과 또 그들의 백성들이 빛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 가장 위대한 군주들이, 그들의 히브리 포로들이 숭배하는 하나님의 최상권을 선포하게 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바벨론 포수(捕囚)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긴 우상들을 숭배하는 일에서 효과적으로 치료되었다. 뒤이은 수백 년 동안 그들은 이방 대적들의 압제로 고통을 당했다. 마침내 그들은 그들의 번영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데 있다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백성들에게 있어서 순종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동기는 이기적이었다. 그들은 국가가 강대해지는 수단으로써 외면적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 되지 않고, 우상 숭배의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세상을 멀리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지시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자들과의 교제에 제한을 가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지시는 그릇 해석되어 왔다. 이것은 그들이 이방 나라의 풍습을 따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과 다른 나라들 사이에 분리의 장벽을 세우는 데 이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그들의 천국으로 바라보았고,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에게도 인자하심을 베풀지나 않으실까 시기하였다.  -29-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는 종교적인 교훈에 대하여 많은 관심이 기울여졌다. 국내 각처에 회당들을 세우고 거기서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해석하였다. 그리고 학교들도 세우고 예술과 과학과 아울러 의의 원칙을 가르치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관들은 부패하게 되었다. 포로생활 중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교(異敎)의 사상과 풍습을 받아들였는데 이것들이 그들의 종교 예식에 도입되었다. 그들은 많은 점에서 우상 숭배자들의 풍습을 따랐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서 떠나자 제사 제도에 대한 교훈을 많이 잊어버리게 되었다. 이 제사 제도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이었다. 이 제도의 각 부분에 그분을 가리키는 표상이 있었다. 이 제도에는 생명력과 영적 미(美)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의식에서 영적 생명을 상실하였으며, 죽은 형식에 집착하였다. 그들은 제물이 가리키는 그분을 의지하는 대신에 희생 제물과 의문(儀文) 그 자체를 신뢰했다. 제사장과 랍비들은 그들이 잃어버린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여러 규정들을 많이 만들어 냈다. 이 규정들이 엄격하여질수록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더욱 적게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결함을 의식의 다과(多寡)로 측정하였으나, 마음은 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까다롭고 짐이 되는 규례들과 함께 율법을 지키기는 불가능하였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자로서 랍비의 규례들을 지키려고 힘써 본 자들은 무거운 부담에 눌려 애를 썼다. 그들은 번민하는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사단은 백성들을 낙담하게 하고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그들의 관념을 저하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멸시를 받게 하려고 힘썼다. 사단은 그가 하늘에서 반역하였을 때에 제시했던 주장 곧 하나님의 요구 사항들은 부당하며 지킬 수 없다는 주장을 입증하기를 원했다. 그는 이스라엘까지도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선언하였다.  메시야의 강림을 갈망하기는 하였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사명에 대하여 참된 개념을 갖지 못하였다. 그들은 죄로부터의 구속이 아니라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들은 압제자의 권세를 깨뜨리고 이스라엘 나라를 세상 만국을 지배하는 나라로 높이는 정복자로서 메시야가 오시기를 고대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이 구주를 거절할 길이 마련되었다.  -30-  그리스도 탄생 당시의 유대 나라는 그들을 지배하는 외국의 통치자들 밑에서 시달림을 받는 한편 내분으로 고통을 겪었다. 유대인들은 독립된 정부 형태를 유지하도록 허용은 받고 있었으나 그들이 로마의 기반(羈絆) 아래 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었으며, 그들의 권력의 제한에 대해 단념하고 만족할 수도 없었다. 로마인들은 대제사장을 임명하고 해임시킬 권리를 주장하였으며, 이 직분은 흔히 부정(不正)과 뇌물 또는 심지어 살인 등의 수단에 의해 획득되었다. 이리하여 제사장 직분은 점점 더 부패되어 갔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여전히 큰 권세를 가졌고 그들은 그것을 이기적이고 재리적(財利的)인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백성들은 그들의 무자비한 요구에 시달렸으며 로마 제국으로부터 또한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었다. 이런 사태는 불만을 널리 확산시켰다. 민중의 폭동이 자주 일어났다. 탐욕, 폭력, 불신, 영적 냉담이 유대 나라의 심장부를 좀먹고 있었다.  로마인들에 대한 증오심, 그들의 국가적, 종교적 자존심은 유대인에게 그들의 예배 형식에 더욱 엄격히 집착하게 하였다. 제사장들은 종교 의식에 철저한 관심을 나타냄으로써 거룩하다는 평판을 유지하고자 힘썼다. 흑암과 압박 속에 있는 백성들과 권세를 잡으려고 갈급하는 관원들은 그들의 원수를 정복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킬 자가 오시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예언들을 연구하였으나 영적 통찰력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초림의 굴욕을 가리키는 성경 구절들을 간과하였으며, 그분의 재림의 영광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을 잘못 적용하였다. 교만이 그들의 통찰력을 흐리게 하였다. 그들은 예언을 그들의 이기적 욕망에 일치되게 해석하였다.  시대의 소망 pp. 27-30

Read More

시대의 소망 – 001일

1장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났다. 영원한 시대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일체이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엄하심의 모습이며 “그의 영광의 광채”이셨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죄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드러내시려고,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시려고 오셨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그분에 대하여 예언되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오심으로써 하나님을 사람들과 천사들에게 나타내려 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생각을 들을 수 있도록 한 하나님의 말씀이셨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에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한 것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계시가 주어진 것은 이 세상의 인간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작은 세계는 우주의 교과서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목적 즉 구속하시는 사랑의 신비는 “천사들도 또한 살피기를 원하는” 주제로서 무궁한 시대를 통하여 그들의 연구 주제가 될 것이다. 구속(救贖)받은 자들과 타락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들의 과학과 노래를 찾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치는 영광은 자아 희생적(自我犧牲的) 사랑의 영광임이 드러날 것이다. 갈바리에서 비쳐 나오는 빛으로 볼 때 자아를 부정하는 사랑의 법칙이 이 세상과 하늘의 생명의 법칙임이 드러날 것이다. 또한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에 그 근원이 있으며, 누구라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한 분 안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0-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 사업 가운데 나타나셨다. 하늘을 펴시고 땅의 기초를 세우신 분은 그리스도이셨다. 모든 세계를 공간에 매다시고 들의 꽃들을 아름답게 만드신 것은 그의 손이었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시 65:6, 95:5)다. 이 땅을 아름다움으로 채우시고 공중을 노래로 채우신 분은 그분이셨다. 그분은 땅과 공중과 하늘에 있는 모든 만물에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기별을 기록하셨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의 완전한 작품을 망쳐 놓았다. 그러나 아직도 그 필적은 남아 있다. 오늘날에도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탁월하심의 영광을 선포한다. 사람의 이기적인 마음 외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은 하나도 없다. 공중을 가로지르는 새나 땅위에 기어 다니는 동물로서 어떤 다른 생물에게 봉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수림의 나뭇잎이나 하찮은 풀 잎사귀도 다 봉사하고 있다. 온갖 수목과 관목과 풀 잎사귀들은 사람이나 동물들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생명의 요소를 발산하며, 사람과 동물도 또한 수목과 관목과 풀 잎사귀의 생명에 도움을 준다. 꽃들은 향기를 발산하고 그 아름다움을 펴서 세상에 복을 끼친다. 태양은 무수한 세계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빛을 보낸다. 모든 샘물의 근원이 되는 바다는 각처에서 흘러오는 물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주기 위하여 받는 것이다. 바다의 표면에서 증발되어 올라가는 수증기가 비가 되어 땅에 떨어지는 것도 땅을 적시어 열매를 내고 싹을 틔우기 위함이다.  -21-  영광의 천사들은 주는 일, 즉 타락하고 불경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끊임없는 보호를 베푸는 일에서 그들의 기쁨을 찾는다. 하늘의 천사들은 사람의 마음에 호소한다. 그들은 이 어두운 세상에 하늘 궁정의 빛을 가져온다. 그들은 부드럽고 인내심 있는 봉사로 인간의 영혼을 감화시켜서 잃은 자를 그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밀접한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로 이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작은 표상들을 떠나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본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주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영광임을 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살고,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노라”(요 8:28; 6:57; 7:18; 8:50).  이 말씀들 가운데 우주의 생명의 법칙이 되는 대원칙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하나님에게서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주기 위하여 받으셨다. 이것은 하늘 궁정에서도 그러하고 모든 피조물을 위한 그분의 봉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의 생명이 만물에게로 흘러나간다. 또한 아들을 통하여 그것은 찬양과 기쁨의 봉사로 사랑의 조수처럼 만물의 대 근원이신 분께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혜(慈惠)의 순환이 완전히 이루어지며 크신 시여자(施與者)의 품성, 곧 생명의 법칙을 드러낸다.  이 법칙은 하늘 자체에서 깨어졌다. 죄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덮는 그룹인 루시퍼는 하늘에서 첫째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천사들을 제어하여 그들을 창조주로부터 떠나게 하고 그들의 존경을 자신이 받으려 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아를 높이려는 욕망을 그분 탓으로 돌림으로 하나님을 그릇 나타내었다. 그는 자신의 악한 특성을 애정이 깊은 창조주께 씌우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천사들을 속이고 또 사람들을 속였다. 그는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불신하게 하였다. 하나님은 공의와 지대한 위엄의 하나님이신 까닭에 사단은 그들로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하지 않는 분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는 이렇게 사람들을 이끌어 자기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비애(悲哀)의 밤이 세상을 내려 덮었다.  -22-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어두워졌다. 음울한 그늘이 밝아지고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단의 기만적 세력이 깨어져야 했다. 이것을 힘으로는 할 수 없었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부의 원칙과는 배치된다. 그분은 사랑의 봉사만을 원하시는데 사랑은 명령으로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힘이나 권위로 얻을 수 없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일깨워진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품성은 사단의 품성과 대조되어 드러나야 한다. 온 우주에서 오직 한 분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아시는 그분만이 그것을 드러내실 수 있었다. 세상의 어두운 밤에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말 4:2)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구속의 경륜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 세워진 사후 고안(事後考案)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알게 하신 그 비밀”(롬 16:25)의 계시였다. 그것은 영세 전부터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되어 온 원칙을 공개한 것이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이 반역할 것과, 그 반역자의 기만적인 권세로 인하여 인류가 타락할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 죄가 존재하도록 정해 놓지는 않으셨으나 죄가 존재할 것을 내다보고 그 두려운 비상사태를 위하여 대비책을 세워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기로 언약하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요 3:16)었다.  루시퍼는 “내가…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사 14:13, 14)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빌 2:6, 7)셨다.  이것은 자발적 희생이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곁에 머물러 계실 수도 있으셨다. 그분은 또한 하늘의 영광과 천사들의 경배를 보유할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는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춰 주고 멸망해 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왕위(王位)를 아버지께 돌려드리고 우주의 보좌에서 내려오기로 선택하셨다.  -23-  약 2천 년 전에 오묘한 뜻을 가진 한 음성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울려 퍼졌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