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망 – 18일

18장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침례 요한이 국민에게 미친 영향은 한때는 관원들, 제사장들, 방백들의 감화보다 더 컸다. 만일 그가 자신을 메시야라고 선언하고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켰다면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그의 깃발 아래로 뭉쳤을 것이다. 사단은 세상의 정복자들의 야심에 호소하는 온갖 수단을 침례 요한에게 강요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의 증거를 앞에 두고도 그 화려한 매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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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17일

17장 니고데모 니고데모는 유대 나라에서 책임 있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고등 교육을 받았고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예로운 국회의원이었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교훈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부자요 유식하고 존경받는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초라한 나사렛 사람에게 마음이 끌렸다. 구주의 입에서 나온 교훈들은 그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그는 이 놀라운 진리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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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16일

16장 당신의 성전에서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예수께서는 이 여행에서 수도를 향하여 가고 있던 큰 무리 중의 한 무리와 일행이 되셨다. 그분은 아직도 자신의 사명을 공표하지 않았으므로 군중 가운데 섞여도 남의 주목을 끌지 않으셨다. 이 경우에도 요한의 전도로 말미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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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15일

15장 혼인 잔치에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앞에서 어떤 위대한 일을 행하심으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셨다. 갈릴리의 작은 마을에서 열린 어느 집안의 모임에서 혼인 잔치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그분의 능력이 행사되었다. 이와 같이 그분은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봉사하고자 하는 소망을 보여 주셨다. 시험의 광야에서 예수께서는 친히 비애의 잔을 마셨다. 예수께서는 축복의 잔을 인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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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14일

14장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침례 요한은 이제 요단강 저편 베다니에서 복음을 전하며 침례를 베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과할 때까지 강물의 흐름을 막으셨던 곳이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하늘의 군대에 의하여 허물어진 여리고의 성채가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 이때에 되살아나서 침례 요한의 기별을 감명 깊게 하였다. 지난 세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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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13일

13장 승 리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사단은 이제 예수님을 그분 자신의 입장에 서서 대하려고 생각한다. 이 간교한 원수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직접 제시한다. 그는 여전히 광명한 천사처럼 나타나 그가 성경에 정통하며 기록된 글의 의미를 깨닫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낸다. 예수께서 전에 당신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유혹자가 자신의 기만을 가리기 위하여 그것을 인용한다. 그는 예수님의 충성을 시험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지금은 그분의 확고하심을 칭찬한다. 구주께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표시하였을 때에 사단은 여전히 그분의 믿음에 대한 또 다른 증거를 보여주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시험은 또다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의심을 암시하는 말로 시작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이어든”이라는 말에 대답하도록 유혹받았으나 의심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단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  -125-  시험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용하여 그분을 참람 되도록 충동질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단은 유혹은 할 수 있으나 죄를 짓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그는 그분을 밀쳐 떨어뜨릴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당신을 구원하실 것이니 예수께 뛰어 내리라고 말했다. 사단은 또한 예수님을 강제로 “뛰어 내리게“ 할 수도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시험에 동의하시지 않는 한 그는 그분을 정복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이나 지옥의 모든 권세라도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하늘 아버지의 뜻에서 떠나게 하실 수 없었다.  유혹자는 결코 강제로 우리에게 악을 행하게 할 수 없다. 그는 그의 지배에 굴복당하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수 없다. 의지가 승낙하고 믿음이 그리스도를 잡은 손을 놓은 후에야 사단은 자신의 세력을 우리에게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품고 있는 모든 죄된 욕망은 그에게 발판을 제공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한 점마다 그가 들어와서 우리를 시험하고 멸망시킬 수 있는 열린 문이 된다. 우리가 실패하고 패배를 당할 때마다 그에게 그리스도를 비방할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라는 약속을 인용하면서 사단은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는 말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모든 길에서라는 말씀을 생략했다. 예수께서는 순종의 길에서 벗어나기를 거절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드러내는 한편 당신을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아버지의 간섭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그런 처지에 자신을 두지 않으실 것이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당신을 구출하게 하심으로 사람에게 신뢰와 복종의 모본을 보여 주는 데 실패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예수께서 사단에게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서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출 17:7) 하고 부르짖었을 때에 모세가 한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기적적으로 역사하셨지만 난관을 만나면 그들은 그분을 의심하고 그분께서 함께 계시는 증거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불신 가운데서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사단은 그리스도께 같은 일을 하도록 재촉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께서 당신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지금에 와서 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는 것, 곧 그분을 시험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지 않으신 것을 요구하는 것도 역시 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불신을 나타내고 그분을 진실로 시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시키실 것인지의 여부를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그것을 성취시킬 것이기 때문에 간구해야 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간구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126-  그러나 믿음은 조금도 추측(推測)과 관련이 없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만이 추측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추측은 사단의 모조판 믿음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고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 추측도 약속을 주장하지만 사단이 그러했듯이 범죄를 변명하기 위하여 그것을 이용한다. 믿음은 우리의 첫 부모들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순종하도록 인도하였을 것이다. 추측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그들을 죄의 결과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게 함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도록 이끌었다.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조건들을 따르지 않으면서 하늘의 은총을 요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성경의 약속들과 준비해 놓으신 것들을 기초로 한다.  사단은 불신을 일으키는 일에 실패할 때에 흔히 우리로 추측하도록 이끄는 일에 성공한다. 그는 만일 우리를 스스로 불필요하게 시험의 길에 들어서게 만들 수 있다면 승리는 자신의 것임을 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을 지켜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을 이탈하는 것은 사단의 영역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서는 것이다. 그 곳에 들어가면 우리는 틀림없이 패배한다.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막 14:38)고 명하셨다. 묵상과 기도는 위험의 길로 무모하게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지킬 것이며 많은 패배를 면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시험의 맹공격을 받을 때 우리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종종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과연 우리를 인도해 오셨는지 의심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여 사단에게 시험을 받게 하신 것은 곧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련에 들어가게 하실 때 그분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이루실 목적을 갖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자발적으로 시험에 들어가심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추정하지도 시험이 닥쳐왔을 때 낙심에 빠지지도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129-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전 10:13; 시 50:14, 15)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둘째 시험에서도 승리자가 되셨으며, 사단은 이제 자신의 본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갈라진 발과 박쥐의 날개를 가진 무서운 괴물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비록 타락하였지만 힘센 천사이다. 그는 자기가 반역의 지도자요 이 세상의 신이라고 공언하였다.  사단은 예수님을 높은 산 위에 세워놓고 이 세상 왕국들의 모든 화려한 영광의 전경(全景)을 그분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햇빛이 전각들이 있는 성들과 대리석 궁전들과 비옥한 전답과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포도원들을 비추었다. 악의 흔적들은 숨겨졌다. 조금 전까지도 음침하고 황폐한 것밖에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의 눈은 지금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과 번영의 장면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 때에 유혹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가 넘겨받은 것이므로 내가 주고자 하는 자에게 주노라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되리라.”  그리스도의 사명은 오직 고난을 통하여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 그분 앞에는 슬픔, 고난, 투쟁의 생애와 수치스러운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은 온 세상의 죄를 지셔야 한다. 그분은 하늘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기는 일을 견디셔야 한다. 이제 유혹자는 그가 찬탈했던 권세를 포기하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최상권을 인정함으로써 두려운 미래를 피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대쟁투에서 승리를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단이 하늘에서 범죄하게 된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보다 높이려고 한 데 있었다. 만일 그가 지금 이긴다면 반역의 승리를 의미할 것이다.  사단이 그리스도에게, 이 세상 나라와 영광은 내가 넘겨받은 것이므로 자신이 주고자 하는 자에게 줄 것이라고 한 그의 말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이었다. 그는 속이는 목적에 이용하기 위하여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사단의 통치권은 아담에게서 빼앗은 것이었으나 아담은 창조주의 대리인이었다. 사단의 통치권은 독립적인 통치가 아니었다. 이 땅은 하나님의 소유요 그분은 만물을 당신의 아들에게 맡기셨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지배아래서 통치해야 할 것이었다. 아담이 속아서 자기의 통치권을 사단의 손에 넘겨주었을 때에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합법적인 왕이셨다. 그러므로 주께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단 4:17)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단은 찬탈한 그의 권세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만 행사할 수 있다.  -130-  유혹자가 그리스도께 이 세상 나라와 영광을 제공하겠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께 이 세상의 진정한 왕권을 포기하고 사단의 지배 하에서 통치권을 쥐라고 제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통치권은 유대인들이 소망하던 것과 같은 통치권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 나라를 원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러한 나라를 주시겠다고 승낙하셨다면 그들은 그분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저주와 그 모든 재난이 이 땅에 임하여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혹자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반역을 일으킨 자는 세상 나라를 그리스도에게 제공하여 악의 원칙에 충성하도록 그리스도를 매수하려고 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매수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의의 나라를 세우려고 오셨으며 당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사단은 이와 같은 시험으로써 사람들에게 접근하며, 이 점에서 그리스도에게서보다도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권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이 세상 나라를 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는 사람들이 성실을 희생하고 양심을 무시하며 이기심에 빠지도록 요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고 분부하신다. 그러나 사단은 그들 곁에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말한다. 영생에 관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나를 섬겨야 한다. 너희의 행복은 나의 수중에 있다. 나는 너희에게 재물과 쾌락과 명예와 행복을 줄 수 있다. 나의 권고를 들으라. 정직이나 자아희생 등과 같은 별난 사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 길을 예비하여 주리라. 이런 유혹에 많은 무리가 속임을 당한다. 그들은 자신을 섬기기로 승낙하고 사단은 만족해한다. 사단은 세상 지배권에 대한 희망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면서 한편으로 영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오래지 않아 빼앗기게 될 이 세상 나라를 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는 그 대가로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유업을 얻을 자격을 속여서 빼앗는다.  사단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물었다. 사단은 즉시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그가 반박할 수 없는 증거였다. 신성이 고난 받는 인성을 통하여 번쩍였다. 사단은 예수의 명령을 거역할 능력이 없었다. 사단은 수치와 분노로 몸부림치면서 세상의 구주 앞에서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아담의 실패가 완전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승리도 완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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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12일

12장 시 험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성령에게 이끌리시어 광야로 가”셨다. 마가의 말은 좀 더 의미심장하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라”고 그는 말한다. 예수께서 시험받기 위하여 광야로 이끌리셨을 때에 그분은 하나님의 성령에게 이끌리셨다. 그분은 시험을 자취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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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11일

11장 침 례  광야의 선지자와 그의 놀라운 선포에 관한 소식은 갈릴리 전역에 퍼졌다. 이 기별은 깊은 산골 벽촌의 농부들과 해변의 어부들에게까지 미치어 그들의 단순하고 진실된 마음에 가장 참된 반응을 일으켰다. 나사렛에서는 이 기별이 요셉의 목공소에도 들리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 외침을 알아보셨다. 그분의 때는 왔다. 그분은 자신의 매일의 수고에서 돌아서서 어머니에게 고별인사를 한 후, 요단강으로 모여 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셨다.  예수님과 침례 요한은 친척간이었고 그들의 출생에 따른 사건 때문에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지만 아직 서로 직접 대면해 본 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생애하셨고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생애했다. 이 두 사람은 크게 다른 환경 가운데서 다 은둔 생활을 하였으므로 피차 교통한 일이 없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섭리가 명하신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이 서로 상대편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을 여지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을 특징지은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소년 시대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일과 랍비의 학교에서 생긴 일에 대하여 들었다. 그는 예수님의 죄 없는 생애에 대하여 알았으며 그가 메시야가 되실 것을 믿었으나 이에 대한 결정적인 보증은 얻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그처럼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로 계시고 당신의 사명에 대하여 특별한 증거를 주시지 않은 사실은 그분이 과연 “약속되신 분”이실까 하는 의심을 일으킬 여지를 주었다. 그러나 침례 요한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면 모든 것이 다 분명해지리라고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기다렸다. 그는 메시야가 자기에게 침례받기를 요구할 것과 그분의 신성의 표적이 그때에 나타날 것에 대하여 계시를 받았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메시야를 백성들에게 소개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110-  예수께서 침례를 받기 위해 오셨을 때에 요한은 전에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품성의 순결성을 그분에게서 보게 되었다. 그분이 계신 자리는 그 분위기까지도 거룩하고 엄숙하였다. 요한은 요단강에서 자기 주위에 모여들었던 무리들 가운데서 범죄에 대한 험악한 이야기를 들었고 숱한 죄 짐에 눌린 사람들을 만난 적은 있었으나 그처럼 신령한 감화력을 나타내는 사람과 접촉해 본 적은 결코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다 메시야에 관하여 요한에게 계시된 것과 부합되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요청에 응하기를 주저하였다. 죄인인 그가 어찌 죄 없으신 분에게 침례를 베풀 수 있는가? 그리고 회개할 필요가 없으신 그분이 죄책이 씻기기를 바라는 고백인 의식에 순복해야 하는가?  -111-  예수께서 침례를 베풀어 주도록 요청하셨을 때에 요한은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고 외치며 뒷걸음을 쳤다. 예수께서는 단호하고도 온유하신 권위로,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대답하셨다. 요한은 이에 허락하고 예수를 요단강으로 인도하여 그분을 물속에 장사지냈다.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예수께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의미로 침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죄인과 같이 되셔서 우리가 걸어야 할 걸음을 걸으시고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행하신 것뿐이다. 침례를 받으신 후의 그분의 고난과 오래 참으신 생애도 또한 우리에게 모본이 되었다.  물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곧 강 언덕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새롭고도 중대한 시대가 그분 앞에 열리고 있었다. 그분은 지금 좀 더 광범한 무대에 서서 생애의 투쟁에 들어가고 계셨다. 그분은 평강의 왕이셨지만 그분의 강림은 칼을 뽑는 것과 같아야 했다. 예수께서 건설하려고 오셨던 나라는 유대인이 원하던 나라와는 정반대였다. 이스라엘 나라의 제사 제도의 기초가 되신 그분이 그 제도의 원수와 파괴자로 여겨질 것이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반포하신 그분이 범법자로 정죄를 받게 될 것이었다. 사단의 세력을 깨뜨리기 위해 오신 그분이 바알세불이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그분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공생애 동안도 그분은 홀로 행하셔야 하였다. 그분의 일생 동안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분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분의 제자들조차도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분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셔서 영원한 빛 가운데에 거하셨으나 그분의 지상 생애는 고독 속에서 보내야 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자로서 우리의 죄와 비애의 짐을 담당하셔야 했다. 무죄하신 자가 죄의 수치를 느끼셔야 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자가 분쟁과 함께 살아야 했고 진리가 거짓과 함께, 깨끗함이 누추함과 함께 거해야 했다. 범죄로 생긴 모든 죄악, 모든 불화, 모든 누추한 정욕은 그분의 마음에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그분은 홀로 그 길을 걸어야 하였으며 홀로 그 짐을 지셔야 했다. 영광을 버리고 인류의 연약한 몸을 받으신 그분에게 세상의 구속이 달려 있었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깨달으셨으나 그분의 목적은 여전히 견고하였다. 타락한 인류의 구원이 그분의 팔에 달렸으므로 그분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랑의 손을 붙잡기 위하여 당신의 손을 내미셨다.  구주께서 기도로 당신의 심정을 토로하실 때에 그분의 시선은 하늘을 꿰뚫는 듯했다. 그분은 죄가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과 사람이 당신의 사명을 이해하고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아셨다. 그분은 그들의 불신을 정복하고 사단이 그들을 매어 둔 차꼬를 깨뜨리며, 그들을 대신하여 파괴자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인류를 받으신다는 증거를 달라고 간구하셨다.  -112-  천사들은 전에 이러한 기도를 들어본 적이 결코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하는 사령관이신 예수께 보증과 위로의 기별을 전해 주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친히 당신의 아들의 간구를 응답하실 것이다. 아버지의 영광의 빛줄기가 직접 보좌에서 흘러나온다. 하늘이 열리고 구주의 머리 위에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에 대한 적절한 표상인 비둘기 같은, 가장 순결한 빛의 모양이 내려온다.  요단강에 모인 큰 무리 가운데 침례 요한을 제외하고 하늘의 이상(異像)을 식별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에서 오는 엄숙함이 회중 위에 임하였다. 사람들은 서서 묵묵히 예수를 주목하였다. 그분의 몸은 하나님의 보좌를 항상 두르고 있는 그 빛으로 덮여 있었다. 위를 향한 그분의 얼굴은 그들이 전에 사람의 얼굴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영광으로 빛났다. 열린 하늘에서 한 소리가 있어 이르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다.  이 확인의 말씀을 주신 것은 그 광경을 목도하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믿음을 고취시키며 그분의 사명을 위하여 구주의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였다. 범죄한 세상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친히 취하시는 그러한 굴욕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그분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였다.  요한은 예수께서 한 간구자로서 아버지의 가납하심을 받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를 감싸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을 때에 요한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표적을 알아보았다. 요한은 자기가 침례를 베풀어 준 분이 세상의 구주라는 것을 알았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손을 펴서 예수님을 가리키며 부르짖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 청중 가운데 한 사람도, 심지어 그 말을 한 요한조차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이 말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자기 아들이 “내 아버지여…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고 묻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대답하기를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7, 8)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에게서 사람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실 그분의 표상을 보았다. 성령께서는 이 사건을 취해서 이사야를 통하여 구주에 대하여 예언하셨다. “그가…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으며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사 53:7, 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 교훈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 중의 대다수는 희생 제물을 마치 이방 사람이 자신들의 제물에 대하여 생각하듯이 그것으로 자신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는 예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과 화목시키는 예물은 당신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그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하셨다.  -113-  그리고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말씀은 인류에게 향하여 하신 말씀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대표자로서의 예수님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이 모든 죄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가치한 자로서 버림을 받지는 않는다. 그분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 우리를 받으셨다. 그리스도께 임한 그 영광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보증이다. 그것은 기도의 능력, 곧 사람의 음성이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고 우리의 간구가 하늘 궁정에서 가납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죄를 통하여 이 지구는 하늘과 분리되고 하늘과의 교통이 끊어졌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을 다시 영광의 세계와 연결시키셨다. 그분의 사랑은 사람을 둘러쌌으며 가장 높은 하늘에까지 미쳤다. 하늘의 열린 문에서 쏟아져 나와 구주의 머리에 비친 그 빛은 우리가 시험을 저항하기 위해 도움을 간구할 때에 우리에게도 임할 것이다. 예수님에게 말씀하신 그 음성은 또한 모든 믿는 자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우리 구주께서는 가장 죄 많고, 가장 궁핍하고, 가장 압제받고 멸시당하는 자라도 하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다. 모든 사람은 예수께서 준비하러 가신 집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 3:7, 8).  시대의 소망 pp. 10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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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10일

10장 광야의 외치는 소리  메시야의 강림을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신실한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일어났다. 연로한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조용하고 거룩한 생애에서 그 당시의 악하고 흑암한 시대 가운데 빛나는 별과 같은 믿음의 빛이 비쳐나왔다. 이 경건한 부부에게 한 아들이 약속되었는데 이 아들은 “주 앞에 먼저 가서 그 길을 예비”할 자였다.  “사가랴는 유대 산중”에 거주하였으나 성전에서 한 주일 동안 봉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이 봉사는 제사장들이 그 반열대로 일 년에 두 번씩 행하는 봉사였다.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였다.  그는 성전의 성소 안에 있는 금 제단 앞에 서 있었다. 향연은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다. 갑자기 그는 신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었다. 주의 천사가 “향단 우편에 서” 있었다. 그 천사가 선 위치는 은총을 위하여 왔음을 나타내주었다. 그러나 사가랴는 이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구주의 강림을 위하여 기도해 왔었다. 이제 그의 이러한 기도가 막 응답되려고 한다는 것을 발표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한 사자가 보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너무나 엄청나서 사가랴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두려움과 자책으로 충만하였다.  -98-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기쁜 보증을 받았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사가랴는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분께서 미쁘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노년에 어떻게 한 아들이 주어졌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로한 제사장은 잠시 인간의 연약성에 그의 생각을 돌렸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의 이 불신은, 천사가 그 귀한 기별을 전하였을 때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대답한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의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아브라함과 마리아의 아들의 출생과 같이 사가랴에게 아들의 출생은 큰 영적 진리, 곧 우리가 느리게 배우고 쉽게 잊어버리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런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도 순복하고 믿는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약속의 아들을 얻은 것은 믿음을 통하여 된 것이었다. 영적 생명을 낳게 하고 우리로 의로운 행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사가랴의 물음에 천사는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말하였다. 5백 년 전에 가브리엘 천사는 그리스도의 초림 시까지 미치는 예언적 기간을 다니엘에게 알려 주었다. 이 예언적 기간의 끝이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사가랴는 메시야의 강림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이제 이 예언을 알려 준 바로 그 천사가 또한 이 예언의 성취를 알려 주기 위하여 왔다.  -99-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고 한 천사의 말은 그가 하늘 궁정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다니엘에게 기별을 가지고 왔을 때 그는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 미가엘(그리스도)뿐이니라”(단 10:21)고 말하였다. 가브리엘에 대하여 구주께서 요한계시록에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계 1:1)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천사는 요한에게 “나는 너와 너의 형제 선지자들과…함께 된 종이니”(계 22:9)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아들 다음 가는 영예로운 지위의 천사가 하나님의 계획을 죄된 인류에게 드러내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말에 의심을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천사의 말이 성취되기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천사는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예식을 집전할 때 일반 공중과 국민의 죄의 사유를 위하여 또한 메시야의 강림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제사장의 의무였다. 그러나 이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사가랴는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백성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나와서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기다렸고, 혹시 그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임을 당하지나 않았는지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가 성소에서 나왔을 때 그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났으며 백성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 알았”다. 사가랴는 그가 보고 들은 바를 그들에게 알려 주고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약속되었던 아들이 출생하자 곧 아버지의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였다. 이 모든 일은 요한이 그 길을 예비하게 되어 있었던 메시야의 강림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바지했다.  -100-  성령이 사가랴에게 임하자 그는 그의 아들의 사명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로 예언하였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요한이 출생하기 전에 천사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리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인간에게 맡기신 사업 중 가장 위대한 사업을 하도록 사가랴의 아들을 부르셨다. 이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는 주를 그의 동역자로 모셔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천사의 지시에 유의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실 것이었다.  요한은 여호와의 사자로서 나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빛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사상에 새 방향을 제시해야 했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요구의 신성성을 인식시키고 완전한 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해야 했다. 그러한 기별자는 거룩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실 성전이 되어야 했다. 그는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건전한 체력과 정신적·영적 능력을 가져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식욕과 정욕을 지배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광야의 바위나 산들처럼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 설 수 있도록 자기의 모든 능력들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하였다.  침례 요한의 시대에는 재물에 대한 탐욕과 사치와 과시에 대한 사랑이 널리 퍼져 있었다. 관능적인 쾌락, 잔치와 먹고 마시는 일이 육체에 질병과 쇠퇴를 일으키고 영적 지각을 흐리게 하며 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요한은 개혁자로 설 것이었다. 그는 절제의 생애와 검소한 의복으로 그 시대의 부절제를 책망해야 했다. 그런 까닭에 요한의 부모에게 지시들, 곧 하늘 보좌로부터 보냄을 받은 천사를 통하여 절제에 대한 교훈이 주어졌다.  -101-  유년과 소년 시대의 품성은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다. 자제력도 이 때 습득해야 한다. 노변(爐邊)과 가정 식탁에서 그 결과가 영원에 미치는 감화가 끼쳐진다. 유년기에 형성된 습관은 어떤 천품(天稟)보다도 더 인생의 투쟁에서 사람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다. 청소년기는 씨를 뿌리는 때이다. 청소년기는 현세와 내세에 우리가 거둘 수확의 성격을 결정짓는다.  요한은 한 선지자로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게 할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초림을 위하여 길을 예비함으로 주의 재림을 위하여 백성을 준비시킬 자들의 한 표상이었다. 세상은 방종에 빠져 있다. 오류와 우화(寓話)가 많으며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한 사단의 올무는 증가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절제와 자제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 식욕과 정욕은 보다 더 고상한 정신력에 복종되어야 한다. 이 자아 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해 줄 정신력과 영적 통찰력을 얻는 데 필수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절제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경우에서라면 사가랴의 아들은 제사장직을 위하여 교육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랍비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더라면 그는 그의 사업을 행하기에 부적당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습득하도록 신학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그를 보내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천연계와 그 천연계의 하나님을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광야로 부르셨다.  그가 자기의 집으로 정한 곳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지역으로, 황량한 언덕들과 거친 계곡들과 암굴들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광야에서 엄격한 수양을 받기 위하여 세상의 향락과 사치를 버리기로 선택하였다. 이곳의 환경은 단순함과 극기의 습관을 기르기에 유리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소란한 세상에 방해받지 않고 천연계와 계시와 섭리의 공과들을 배울 수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부모는 사가랴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말을 요한에게 자주 들려주었다. 그의 부모는 어린 시절부터 요한에게 사명을 계속 제시해 주었으며, 요한은 그 거룩한 책임을 받아들였다. 광야의 고독은 그에게 의심과 불신과 부정(不淨)이 거의 만연된 사회를 피하는 즐거운 특권이 되었다. 그는 시험에 대항하는 데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으며 죄의 흉악성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죄와의 접촉을 항상 피하였다.  -102-  출생 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서 그는 일생을 성별하기로 스스로 서원하였다. 그는 옛날 선지자의 옷인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허리띠를 띠었다. 그는 광야에서 구할 수 있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산에서 나오는 맑은 물을 마시고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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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09일

9장 투쟁의 시절  유대 나라의 소년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랍비들이 만든 규례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생애의 가장 사소한 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동을 제한하는 엄격한 규정이 세워져 있었다. 청소년들은 회당 교사들의 지도하에 정통적인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준수해야 할 무수한 규칙들을 배웠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다. 그분은 유년 시절부터 랍비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행동하셨다. 그분은 늘 구약 성경을 연구하셨으며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는 말씀이 언제나 그분의 입술에 있었다.  백성들의 형편이 점점 공개되자 그분은 사회의 규칙과 하나님의 율법이 언제나 상충됨을 아셨다. 사람들은 말씀에서 떠나 그들 자신이 만든 이론을 높였다. 그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유전적 의식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예배는 한낱 의식의 반복에 불과했다. 그 예배가 가르치고자 의도한 거룩한 진리는 예배자들에게 숨겨지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에서 그들이 아무런 평안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다. 그들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그들에게 임하게 될 심령의 자유를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그분은 사람의 규칙과 하나님의 법도를 혼합시키는 것을 용인할 수 없으셨다. 그분은 학자들의 교훈과 행습을 공격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단순한 습관에 대하여 견책을 받을 때에 그분은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성경 말씀으로 제시하셨다.  -85-  예수께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온순하고 유순한 태도로 당신께서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기 위해 힘쓰셨다. 그분이 너무 온순하고 겸손하신 까닭에 서기관과 장로들은 그분이 그들의 가르침에 쉽게 감화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고대의 랍비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금언들과 유전을 받아들이도록 권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것들에 대하여 성경적 근거를 요구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듣고자 하였으나 사람이 만든 것을 순종하실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시는 듯하였으며 성경의 참뜻을 그들에게 드러내셨다. 랍비들은 어린아이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랍비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저희의 직분이니 그들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말에 반대되는 입장에 서는 것을 보고 분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전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영적 지식에 있어서 예수께서 자신들보다 훨씬 더 앞섰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분이 그들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분노했다. 그분을 설복시키지 못하자 그들은 요셉과 마리아를 찾아가서 그들 앞에 그분의 불복종하는 행동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그분은 책망과 꾸지람을 받으셨다.  -86-  예수께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품성을 형성함에 있어서 스스로 행동하셨으며, 자기 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조차도 그분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서 돌이키게 할 수 없었다. 그분이 가족들의 관습과 다르게 취하신 모든 행동의 동기는 곧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랍비의 영향은 그분의 생애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분은 소년 시대에서조차도 침묵과 끈기 있는 인내의 어려운 공과를 배워야 하셨다.  요셉의 아들들인 예수의 형제들은 랍비들의 편을 들었다. 그들은 유전도 마치 하나님의 명령인 것처럼 유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교훈을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게 간주했으며 거짓과 참을 분별하는 예수님의 명철한 식별력에 대하여 몹시 화가 났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분의 엄격한 순종을 그들은 완고하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랍비에게 대답하는 말씀 가운데서 나타내신 지식과 지혜에 대하여 놀랐다. 그들은 그분이 박사들에게서 교훈을 받은 일이 없음을 알고 있었으나 그분이 그들의 교사가 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분의 교육이 그들의 교육보다 더욱 고상한 종류의 교육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생명나무, 곧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식의 근원과 접촉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배타적이지 않았으나 바리새인들의 엄격한 규율들을 버림으로 특별히 그들을 성나게 하셨다. 그분은 일상 생애의 문제들을 너무나 거룩하게 만들어서 배타적인 높은 장벽의 담을 쌓은 종교의 아성을 보셨다. 그분은 이러한 파당의 벽을 허무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과 접촉할 때에 그대의 신조가 무엇인가? 그대는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가? 라고 묻지 않으셨다. 그분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돕는 능력을 행사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하늘 성품을 보여 주기 위하여 수도사의 밀실에 은거하지 않고 인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셨다. 그분은 성경상 종교가 육체의 고행에 있지 않다는 원리를 설득시키셨다. 그분은,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종파는 정해진 때와 특별한 경우에만 행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님을 가르치셨다.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그분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타내고 당신의 주위를 명랑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두르셨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일종의 책망이었다. 그분의 생애는 종교라는 이기심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과 그들의 개인적인 이욕에 대한 병적 헌신은 참된 경건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증오를 일으키게 했으므로 그들은 그분이 그들의 규칙을 따르도록 강요하였다.  -87-  예수께서는 당신이 목격하신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다 덜어 주기 위하여 일하셨다. 그분은 줄 돈이 거의 없었으나 자신보다 더 궁핍해 보이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종종 자신의 음식을 드시지 않았다. 그분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감화가 그들이 끼친 악한 감화를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분은 당신의 형제 중 아무도 갖지 못하고 또 갖기를 원치 않은 재치를 가지고 계셨다. 형제들이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게 거칠게 말할 때에 그분은 오히려 그런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을 찾아서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분은 궁핍한 사람들에게 한 잔의 냉수를 주고 자신이 먹을 음식을 가만히 그들의 손에 쥐어 주곤 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셨을 때에 가르치신 진리는 그분의 자비로운 행위와 관련되어 그들의 기억에 굳게 새겨졌다.  이런 모든 것이 그분의 형들을 불쾌하게 하였다. 예수님보다 손위인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당신을 그들보다 우월하게 생각한다고 비난하고, 또 예수께서 저희의 교사들과 제사장과 나라의 관리들보다 당신을 높인다고 책망하였다. 그들은 가끔 그분을 위협하고, 협박하려고 하였으나 성경을 자신의 안내자로 삼음으로 이겨내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형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친절하게 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시기하고 아주 단호한 불신과 멸시를 나타내었다. 그들은 그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 안에서 큰 대조(對照)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면서도 무력한 아이였다. 세계들과 지구가 창조주이신 그분의 소유였으나 빈곤이 그분의 생애의 매 발걸음의 특징이 되었다. 그분은 세상의 교만과 주제넘음과는 아주 판이한 위엄과 개성을 가지고 계셨다. 그분은 세속적인 위대함을 얻기 위해 분투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가장 비천한 지위에서도 만족해 하셨다. 이것이 그분의 형들을 노하게 하였다. 그분이 시련과 손실 가운데서도 언제나 평온하신 것을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로 “부요하게 하려 하심”(고후 8:9)이었음을 알지 못하였다. 욥의 친구들이 그의 겸비와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분의 형들은 그분의 사명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었다.  -88-  예수께서 형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던 것은 그분이 그들과 같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표준은 그들의 표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에게서 돌아섰기에 그들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없었다. 그들이 지켰던 종교의 형식은 품성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마 23:23)다. 예수님의 모본은 그들을 항상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분이 세상에서 오직 한 가지 미워하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죄였다. 그분은 악행을 목도할 때마다 숨길 수 없는 고통을 느끼셨다. 외형적인 성결로 죄에 대한 사랑을 숨기는 형식주의자들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성을 으뜸으로 삼는 사람 사이의 대조는 명백하였다. 예수님의 생애가 악을 책망했기 때문에 그분은 가정 안팎에서 반대를 받으셨다. 그분의 이기심 없는 결백성은 오히려 조소 섞인 평을 받았다. 그분의 인내와 친절은 소심(小心)으로 불렸다.  인간이 당하는 온갖 쓰디쓴 슬픔 중에 그리스도께서 맛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분의 탄생을 이유로 그분을 멸시하려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유년 시절에도 그분은 그들의 조롱하는 표정들과 악의에 찬 속삭임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셨다. 만일 그분이 한마디의 조급한 말로나 표정으로 응수하였더라면, 또는 단 한 번의 그릇된 행위를 함으로 형들에게 양보했더라면 그분은 완전한 모본이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속을 위한 계획도 성취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분이 죄에 대한 핑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만 하셨어도 사단은 승리하고 세상은 영원히 잃어버림을 당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마귀는 그분의 생애를 가능한 한 괴롭게 만들어서 그분을 죄에 빠뜨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시험을 당하실 때마다 그분의 한 가지 대답은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씀이었다. 그분은 형들의 잘못된 행동을 좀처럼 책망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말해주셨다. 그분은 종종 어떤 금지된 행동에 형들과 동참하기를 거절하심으로 비겁한 자라는 비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대답은 기록하였으되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욥 28:28)였다.  -89-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기 때문에 그분과 교제하려 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으나 많은 사람은 그분의 흠 없는 생애로 말미암아 견책을 받으므로 그분을 피하였다. 젊은 동무들은 그분에게 그들이 하는 것처럼 행하도록 권하였다. 그분은 명랑하고 쾌활하셨으므로 그들은 그분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였고 그분의 제의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치밀함을 보고 조급하여 말하기를 도량이 없고 완고하다고 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기록하였으되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9, 11).  그분은 자주 이런 질문을 받으셨다. 너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유별나고 우리 모두와 구별되게 행동하려고 하느냐? 그분은 기록하였으되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시 119:1~3)라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사렛 청년들의 환락에 어울리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 그분은 기록하였으되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 119:14~16)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리를 위하여 싸우지 않으셨다. 그분은 불평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일이 불필요하게 어려웠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약해지거나 낙담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 속에서 행하시는 것처럼 이러한 고난들을 초월하여 사셨다. 그분은 난폭한 대우를 받을 때에도 보복하지 않고 모욕을 참을성 있게 견디셨다.  왜 너는 이러한 악의에 찬 대접을 심지어 친형제에게서까지 받으면서도 감수하는가라는 질문을 빈번히 받으셨다. 그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록하였으되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3:1~4).  예수님의 부모가 그분을 성전 안에서 발견하였던 때로부터 그분의 행동은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였다. 그분은 논쟁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그분의 모본은 끊임없는 교훈이었다. 그분은 따로 구별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분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홀로 천연계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분은 일하던 곳에서 떠나 들로 가서 푸른 골짜기 가운데서 명상하고 또는 산비탈이나 삼림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셨다. 이른 아침에 그분은 흔히 외딴 곳에서 성경을 상고하거나 기도하셨다. 그분은 이 조용한 시간들을 가진 후에 집에 돌아가서 다시 집안 일을 돌보며 인내성 있는 수고의 모본을 보이셨다.  -90-  그리스도의 생애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특징지어졌다. 마리아는 자기 몸에서 난 거룩한 아이가 오래 전부터 약속되어 온 메시야임을 마음에 믿었으나 감히 그 믿음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예수님의 온 지상 생애를 통하여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그녀는 예수께서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에 당하시는 시련을 슬픔으로 목도하였다. 그분의 행위 가운데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옹호함으로써 마리아 자신도 어려운 입장에 빠졌다. 마리아는 가정의 교제와 자녀들을 향한 어머니의 자상한 보살핌이 아이들의 품성 형성에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요셉의 아들과 딸들은 이것을 알았으므로 마리아의 염려하는 마음에 호소함으로 그들의 표준에 따라 예수님의 행위를 교정하려고 힘썼다.  마리아는 종종 예수님에게 충고하면서 랍비의 규례를 따르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명상하는 일과 고난을 당하는 인류, 심지어 말 못하는 짐승의 고난까지도 덜어주기 위하여 힘쓰시는 그분의 습관을 고치도록 설복시킬 수 없었다. 제사장들과 교사들이 예수님을 제어하는 일에 그녀의 도움을 청하였을 때에 마리아는 매우 괴로웠다. 그러나 예수께서 당신이 행하시는 일을 지지하는 성경구절을 찾아서 보여 주실 때에 마리아는 마음에 평안을 얻었다.  때때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믿지 않는 그분의 형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러나 그분이 신적인 존재라는 증거가 풍부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보았다. 그분이 있을 때에는 가정 안에 좀더 순결한 분위기가 나타났으며 그분의 생애는 교제하는 자들 가운데서 누룩과 같은 작용을 하였다. 그분은 분별이 없고 난폭하고 버릇없는 자들 곧, 부정한 세리, 무모한 탕아, 불의한 사마리아 사람, 이방 나라의 군인, 거친 농부, 잡된 무리들 가운데서 해받음 없이 더럽힘을 받지 않고 행하셨다.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를 받은 사람들을 여기저기에서 볼 때마다 그분은 그들에게 동정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분은 그들의 짐을 나눠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애와 선하심에 대하여 당신이 천연계에서 배웠던 교훈을 그들에게 여러 번 말씀해 주셨다.  -91-  그분은 바르게만 사용한다면 그들에게 영원한 보화를 가져다 줄 고귀한 재능들을 부여받은 사람들로 자신들을 생각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분은 생애 가운데서 허영이란 것을 일체 제거해 버리셨으며, 매 순간이 영원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므로 이 매 순간을 보배처럼 귀중히 여겨서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의 모본을 통해 가르치셨다. 그분은 어떤 사람도 무가치한 존재로 지나쳐 버리지 않고 각 영혼에게 구원의 치료제를 발라 주려고 하셨다. 그분은 어떤 무리 가운데 있을지라도 때와 환경에 적절한 교훈을 주셨다. 그분은 매우 난폭하고 희망이 없는 것같이 보이는 자들에게도 소망을 고취시켜 주고 그들도 흠 없고 유순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들로 나타나게 될 그러한 성품에 도달할 수 있다는 보증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분은 종종 사단의 지배 아래 휩쓸려 들어가서 그의 올무에서 벗어날 힘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셨다. 예수께서는 이런 낙망하고 병들고 시험에 빠지고 타락한 자들에게 가장 부드러운 동정의 말씀, 곧 적절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해주셨다. 또한 그분은 영혼의 원수와 백병전을 하는 사람들도 만나셨다. 그분은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들의 편에 서서 승리를 줄 것이므로 그들이 승리할 수 있다고 보증하시면서 인내하라고 격려하셨다. 그리하여 이렇게 도움을 받은 자들은 그들이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한 분이 계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분은 그들이 당신의 동정하는 귀에 털어놓은 비밀을 결코 누설하지 않으셨다.  -92-  예수께서는 심령뿐만 아니라 육신도 고치시는 분이셨다. 그분은 자신이 목도하는 온갖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그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셨으며, 그분의 친절한 말씀은 진정시키는 향유와 같았다. 어떤 사람도 그분이 이적을 행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능력 곧 치료하는 사랑의 능력이 그분으로부터 병자와 고난당하는 자에게로 흘러나왔다. 이와 같이 그분은 유년 시절부터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셨다. 그분의 공생애가 시작되었을 때 그처럼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즐겨 들은 것은 이 까닭이었다.  그러나 유년, 청년, 장년기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홀로 다니셨다. 그분은 순결하고 신실하사 홀로 포도즙 틀을 밟으셨으나 백성들 가운데 그분과 함께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심히 무거운 책임을 지셨다. 인류의 원칙과 목적에 결정적인 변화가 없는 한 모두가 다 잃어버림을 당하리라는 것을 그분은 아셨다. 이러한 사실이 그분의 마음을 억눌렀으며 아무도 그분이 진 짐의 무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열렬한 목적으로 충만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람들의 빛이 되도록 당신의 생애의 계획을 실천하셨다.  시대의 소망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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