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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13일

By admin | May 6, 2020

13장 승 리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사단은 이제 예수님을 그분 자신의 입장에 서서 대하려고 생각한다. 이 간교한 원수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직접 제시한다. 그는 여전히 광명한 천사처럼 나타나 그가 성경에 정통하며 기록된 글의 의미를 깨닫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낸다. 예수께서 전에 당신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유혹자가 자신의 기만을 가리기 위하여 그것을 인용한다. 그는 예수님의 충성을 시험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지금은 그분의 확고하심을 칭찬한다. 구주께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표시하였을 때에 사단은 여전히 그분의 믿음에 대한 또 다른 증거를 보여주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시험은 또다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의심을 암시하는 말로 시작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이어든”이라는 말에 대답하도록 유혹받았으나 의심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단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  -125-  시험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용하여 그분을 참람 되도록 충동질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단은 유혹은 할 수 있으나 죄를 짓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그는 그분을 밀쳐 떨어뜨릴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당신을 구원하실 것이니 예수께 뛰어 내리라고 말했다. 사단은 또한 예수님을 강제로 “뛰어 내리게“ 할 수도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시험에 동의하시지 않는 한 그는 그분을 정복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이나 지옥의 모든 권세라도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하늘 아버지의 뜻에서 떠나게 하실 수 없었다.  유혹자는 결코 강제로 우리에게 악을 행하게 할 수 없다. 그는 그의 지배에 굴복당하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수 없다. 의지가 승낙하고 믿음이 그리스도를 잡은 손을 놓은 후에야 사단은 자신의 세력을 우리에게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품고 있는 모든 죄된 욕망은 그에게 발판을 제공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한 점마다 그가 들어와서 우리를 시험하고 멸망시킬 수 있는 열린 문이 된다. 우리가 실패하고 패배를 당할 때마다 그에게 그리스도를 비방할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라는 약속을 인용하면서 사단은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는 말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모든 길에서라는 말씀을 생략했다. 예수께서는 순종의 길에서 벗어나기를 거절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드러내는 한편 당신을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아버지의 간섭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그런 처지에 자신을 두지 않으실 것이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당신을 구출하게 하심으로 사람에게 신뢰와 복종의 모본을 보여 주는 데 실패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예수께서 사단에게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서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출 17:7) 하고 부르짖었을 때에 모세가 한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기적적으로 역사하셨지만 난관을 만나면 그들은 그분을 의심하고 그분께서 함께 계시는 증거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불신 가운데서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사단은 그리스도께 같은 일을 하도록 재촉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께서 당신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지금에 와서 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는 것, 곧 그분을 시험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지 않으신 것을 요구하는 것도 역시 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불신을 나타내고 그분을 진실로 시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시키실 것인지의 여부를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그것을 성취시킬 것이기 때문에 간구해야 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간구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126-  그러나 믿음은 조금도 추측(推測)과 관련이 없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만이 추측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추측은 사단의 모조판 믿음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고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 추측도 약속을 주장하지만 사단이 그러했듯이 범죄를 변명하기 위하여 그것을 이용한다. 믿음은 우리의 첫 부모들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순종하도록 인도하였을 것이다. 추측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그들을 죄의 결과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게 함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도록 이끌었다.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조건들을 따르지 않으면서 하늘의 은총을 요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성경의 약속들과 준비해 놓으신 것들을 기초로 한다.  사단은 불신을 일으키는 일에 실패할 때에 흔히 우리로 추측하도록 이끄는 일에 성공한다. 그는 만일 우리를 스스로 불필요하게 시험의 길에 들어서게 만들 수 있다면 승리는 자신의 것임을 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을 지켜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을 이탈하는 것은 사단의 영역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서는 것이다. 그 곳에 들어가면 우리는 틀림없이 패배한다.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막 14:38)고 명하셨다. 묵상과 기도는 위험의 길로 무모하게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지킬 것이며 많은 패배를 면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시험의 맹공격을 받을 때 우리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종종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과연 우리를 인도해 오셨는지 의심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여 사단에게 시험을 받게 하신 것은 곧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련에 들어가게 하실 때 그분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이루실 목적을 갖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자발적으로 시험에 들어가심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추정하지도 시험이 닥쳐왔을 때 낙심에 빠지지도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129-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전 10:13; 시 50:14, 15)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둘째 시험에서도 승리자가 되셨으며, 사단은 이제 자신의 본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갈라진 발과 박쥐의 날개를 가진 무서운 괴물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비록 타락하였지만 힘센 천사이다. 그는 자기가 반역의 지도자요 이 세상의 신이라고 공언하였다.  사단은 예수님을 높은 산 위에 세워놓고 이 세상 왕국들의 모든 화려한 영광의 전경(全景)을 그분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햇빛이 전각들이 있는 성들과 대리석 궁전들과 비옥한 전답과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포도원들을 비추었다. 악의 흔적들은 숨겨졌다. 조금 전까지도 음침하고 황폐한 것밖에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의 눈은 지금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과 번영의 장면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 때에 유혹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가 넘겨받은 것이므로 내가 주고자 하는 자에게 주노라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되리라.”  그리스도의 사명은 오직 고난을 통하여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 그분 앞에는 슬픔, 고난, 투쟁의 생애와 수치스러운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은 온 세상의 죄를 지셔야 한다. 그분은 하늘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기는 일을 견디셔야 한다. 이제 유혹자는 그가 찬탈했던 권세를 포기하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최상권을 인정함으로써 두려운 미래를 피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대쟁투에서 승리를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단이 하늘에서 범죄하게 된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보다 높이려고 한 데 있었다. 만일 그가 지금 이긴다면 반역의 승리를 의미할 것이다.  사단이 그리스도에게, 이 세상 나라와 영광은 내가 넘겨받은 것이므로 자신이 주고자 하는 자에게 줄 것이라고 한 그의 말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이었다. 그는 속이는 목적에 이용하기 위하여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사단의 통치권은 아담에게서 빼앗은 것이었으나 아담은 창조주의 대리인이었다. 사단의 통치권은 독립적인 통치가 아니었다. 이 땅은 하나님의 소유요 그분은 만물을 당신의 아들에게 맡기셨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지배아래서 통치해야 할 것이었다. 아담이 속아서 자기의 통치권을 사단의 손에 넘겨주었을 때에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합법적인 왕이셨다. 그러므로 주께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단 4:17)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단은 찬탈한 그의 권세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만 행사할 수 있다.  -130-  유혹자가 그리스도께 이 세상 나라와 영광을 제공하겠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께 이 세상의 진정한 왕권을 포기하고 사단의 지배 하에서 통치권을 쥐라고 제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통치권은 유대인들이 소망하던 것과 같은 통치권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 나라를 원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러한 나라를 주시겠다고 승낙하셨다면 그들은 그분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저주와 그 모든 재난이 이 땅에 임하여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혹자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반역을 일으킨 자는 세상 나라를 그리스도에게 제공하여 악의 원칙에 충성하도록 그리스도를 매수하려고 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매수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의의 나라를 세우려고 오셨으며 당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사단은 이와 같은 시험으로써 사람들에게 접근하며, 이 점에서 그리스도에게서보다도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권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이 세상 나라를 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는 사람들이 성실을 희생하고 양심을 무시하며 이기심에 빠지도록 요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고 분부하신다. 그러나 사단은 그들 곁에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말한다. 영생에 관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나를 섬겨야 한다. 너희의 행복은 나의 수중에 있다. 나는 너희에게 재물과 쾌락과 명예와 행복을 줄 수 있다. 나의 권고를 들으라. 정직이나 자아희생 등과 같은 별난 사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 길을 예비하여 주리라. 이런 유혹에 많은 무리가 속임을 당한다. 그들은 자신을 섬기기로 승낙하고 사단은 만족해한다. 사단은 세상 지배권에 대한 희망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면서 한편으로 영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오래지 않아 빼앗기게 될 이 세상 나라를 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는 그 대가로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유업을 얻을 자격을 속여서 빼앗는다.  사단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물었다. 사단은 즉시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그가 반박할 수 없는 증거였다. 신성이 고난 받는 인성을 통하여 번쩍였다. 사단은 예수의 명령을 거역할 능력이 없었다. 사단은 수치와 분노로 몸부림치면서 세상의 구주 앞에서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아담의 실패가 완전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승리도 완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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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12일

By admin | May 5, 2020

12장 시 험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성령에게 이끌리시어 광야로 가”셨다. 마가의 말은 좀 더 의미심장하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라”고 그는 말한다. 예수께서 시험받기 위하여 광야로 이끌리셨을 때에 그분은 하나님의 성령에게 이끌리셨다. 그분은 시험을 자취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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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11일

By admin | May 4, 2020

11장 침 례  광야의 선지자와 그의 놀라운 선포에 관한 소식은 갈릴리 전역에 퍼졌다. 이 기별은 깊은 산골 벽촌의 농부들과 해변의 어부들에게까지 미치어 그들의 단순하고 진실된 마음에 가장 참된 반응을 일으켰다. 나사렛에서는 이 기별이 요셉의 목공소에도 들리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 외침을 알아보셨다. 그분의 때는 왔다. 그분은 자신의 매일의 수고에서 돌아서서 어머니에게 고별인사를 한 후, 요단강으로 모여 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셨다.  예수님과 침례 요한은 친척간이었고 그들의 출생에 따른 사건 때문에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지만 아직 서로 직접 대면해 본 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생애하셨고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생애했다. 이 두 사람은 크게 다른 환경 가운데서 다 은둔 생활을 하였으므로 피차 교통한 일이 없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섭리가 명하신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이 서로 상대편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을 여지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을 특징지은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소년 시대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일과 랍비의 학교에서 생긴 일에 대하여 들었다. 그는 예수님의 죄 없는 생애에 대하여 알았으며 그가 메시야가 되실 것을 믿었으나 이에 대한 결정적인 보증은 얻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그처럼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로 계시고 당신의 사명에 대하여 특별한 증거를 주시지 않은 사실은 그분이 과연 “약속되신 분”이실까 하는 의심을 일으킬 여지를 주었다. 그러나 침례 요한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면 모든 것이 다 분명해지리라고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기다렸다. 그는 메시야가 자기에게 침례받기를 요구할 것과 그분의 신성의 표적이 그때에 나타날 것에 대하여 계시를 받았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메시야를 백성들에게 소개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110-  예수께서 침례를 받기 위해 오셨을 때에 요한은 전에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품성의 순결성을 그분에게서 보게 되었다. 그분이 계신 자리는 그 분위기까지도 거룩하고 엄숙하였다. 요한은 요단강에서 자기 주위에 모여들었던 무리들 가운데서 범죄에 대한 험악한 이야기를 들었고 숱한 죄 짐에 눌린 사람들을 만난 적은 있었으나 그처럼 신령한 감화력을 나타내는 사람과 접촉해 본 적은 결코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다 메시야에 관하여 요한에게 계시된 것과 부합되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요청에 응하기를 주저하였다. 죄인인 그가 어찌 죄 없으신 분에게 침례를 베풀 수 있는가? 그리고 회개할 필요가 없으신 그분이 죄책이 씻기기를 바라는 고백인 의식에 순복해야 하는가?  -111-  예수께서 침례를 베풀어 주도록 요청하셨을 때에 요한은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고 외치며 뒷걸음을 쳤다. 예수께서는 단호하고도 온유하신 권위로,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대답하셨다. 요한은 이에 허락하고 예수를 요단강으로 인도하여 그분을 물속에 장사지냈다.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예수께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의미로 침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죄인과 같이 되셔서 우리가 걸어야 할 걸음을 걸으시고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행하신 것뿐이다. 침례를 받으신 후의 그분의 고난과 오래 참으신 생애도 또한 우리에게 모본이 되었다.  물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곧 강 언덕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새롭고도 중대한 시대가 그분 앞에 열리고 있었다. 그분은 지금 좀 더 광범한 무대에 서서 생애의 투쟁에 들어가고 계셨다. 그분은 평강의 왕이셨지만 그분의 강림은 칼을 뽑는 것과 같아야 했다. 예수께서 건설하려고 오셨던 나라는 유대인이 원하던 나라와는 정반대였다. 이스라엘 나라의 제사 제도의 기초가 되신 그분이 그 제도의 원수와 파괴자로 여겨질 것이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반포하신 그분이 범법자로 정죄를 받게 될 것이었다. 사단의 세력을 깨뜨리기 위해 오신 그분이 바알세불이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그분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공생애 동안도 그분은 홀로 행하셔야 하였다. 그분의 일생 동안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분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분의 제자들조차도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분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셔서 영원한 빛 가운데에 거하셨으나 그분의 지상 생애는 고독 속에서 보내야 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자로서 우리의 죄와 비애의 짐을 담당하셔야 했다. 무죄하신 자가 죄의 수치를 느끼셔야 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자가 분쟁과 함께 살아야 했고 진리가 거짓과 함께, 깨끗함이 누추함과 함께 거해야 했다. 범죄로 생긴 모든 죄악, 모든 불화, 모든 누추한 정욕은 그분의 마음에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그분은 홀로 그 길을 걸어야 하였으며 홀로 그 짐을 지셔야 했다. 영광을 버리고 인류의 연약한 몸을 받으신 그분에게 세상의 구속이 달려 있었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깨달으셨으나 그분의 목적은 여전히 견고하였다. 타락한 인류의 구원이 그분의 팔에 달렸으므로 그분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랑의 손을 붙잡기 위하여 당신의 손을 내미셨다.  구주께서 기도로 당신의 심정을 토로하실 때에 그분의 시선은 하늘을 꿰뚫는 듯했다. 그분은 죄가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과 사람이 당신의 사명을 이해하고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아셨다. 그분은 그들의 불신을 정복하고 사단이 그들을 매어 둔 차꼬를 깨뜨리며, 그들을 대신하여 파괴자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인류를 받으신다는 증거를 달라고 간구하셨다.  -112-  천사들은 전에 이러한 기도를 들어본 적이 결코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하는 사령관이신 예수께 보증과 위로의 기별을 전해 주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친히 당신의 아들의 간구를 응답하실 것이다. 아버지의 영광의 빛줄기가 직접 보좌에서 흘러나온다. 하늘이 열리고 구주의 머리 위에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에 대한 적절한 표상인 비둘기 같은, 가장 순결한 빛의 모양이 내려온다.  요단강에 모인 큰 무리 가운데 침례 요한을 제외하고 하늘의 이상(異像)을 식별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에서 오는 엄숙함이 회중 위에 임하였다. 사람들은 서서 묵묵히 예수를 주목하였다. 그분의 몸은 하나님의 보좌를 항상 두르고 있는 그 빛으로 덮여 있었다. 위를 향한 그분의 얼굴은 그들이 전에 사람의 얼굴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영광으로 빛났다. 열린 하늘에서 한 소리가 있어 이르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다.  이 확인의 말씀을 주신 것은 그 광경을 목도하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믿음을 고취시키며 그분의 사명을 위하여 구주의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였다. 범죄한 세상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친히 취하시는 그러한 굴욕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그분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였다.  요한은 예수께서 한 간구자로서 아버지의 가납하심을 받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를 감싸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을 때에 요한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표적을 알아보았다. 요한은 자기가 침례를 베풀어 준 분이 세상의 구주라는 것을 알았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손을 펴서 예수님을 가리키며 부르짖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 청중 가운데 한 사람도, 심지어 그 말을 한 요한조차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이 말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자기 아들이 “내 아버지여…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고 묻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대답하기를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7, 8)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에게서 사람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실 그분의 표상을 보았다. 성령께서는 이 사건을 취해서 이사야를 통하여 구주에 대하여 예언하셨다. “그가…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으며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사 53:7, 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 교훈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 중의 대다수는 희생 제물을 마치 이방 사람이 자신들의 제물에 대하여 생각하듯이 그것으로 자신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는 예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과 화목시키는 예물은 당신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그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하셨다.  -113-  그리고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말씀은 인류에게 향하여 하신 말씀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대표자로서의 예수님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이 모든 죄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가치한 자로서 버림을 받지는 않는다. 그분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 우리를 받으셨다. 그리스도께 임한 그 영광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보증이다. 그것은 기도의 능력, 곧 사람의 음성이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고 우리의 간구가 하늘 궁정에서 가납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죄를 통하여 이 지구는 하늘과 분리되고 하늘과의 교통이 끊어졌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을 다시 영광의 세계와 연결시키셨다. 그분의 사랑은 사람을 둘러쌌으며 가장 높은 하늘에까지 미쳤다. 하늘의 열린 문에서 쏟아져 나와 구주의 머리에 비친 그 빛은 우리가 시험을 저항하기 위해 도움을 간구할 때에 우리에게도 임할 것이다. 예수님에게 말씀하신 그 음성은 또한 모든 믿는 자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우리 구주께서는 가장 죄 많고, 가장 궁핍하고, 가장 압제받고 멸시당하는 자라도 하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다. 모든 사람은 예수께서 준비하러 가신 집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 3:7, 8).  시대의 소망 pp. 10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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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10일

By admin | May 3, 2020

10장 광야의 외치는 소리  메시야의 강림을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신실한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일어났다. 연로한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조용하고 거룩한 생애에서 그 당시의 악하고 흑암한 시대 가운데 빛나는 별과 같은 믿음의 빛이 비쳐나왔다. 이 경건한 부부에게 한 아들이 약속되었는데 이 아들은 “주 앞에 먼저 가서 그 길을 예비”할 자였다.  “사가랴는 유대 산중”에 거주하였으나 성전에서 한 주일 동안 봉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이 봉사는 제사장들이 그 반열대로 일 년에 두 번씩 행하는 봉사였다.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였다.  그는 성전의 성소 안에 있는 금 제단 앞에 서 있었다. 향연은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다. 갑자기 그는 신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었다. 주의 천사가 “향단 우편에 서” 있었다. 그 천사가 선 위치는 은총을 위하여 왔음을 나타내주었다. 그러나 사가랴는 이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구주의 강림을 위하여 기도해 왔었다. 이제 그의 이러한 기도가 막 응답되려고 한다는 것을 발표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한 사자가 보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너무나 엄청나서 사가랴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두려움과 자책으로 충만하였다.  -98-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기쁜 보증을 받았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사가랴는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분께서 미쁘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노년에 어떻게 한 아들이 주어졌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로한 제사장은 잠시 인간의 연약성에 그의 생각을 돌렸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의 이 불신은, 천사가 그 귀한 기별을 전하였을 때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대답한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의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아브라함과 마리아의 아들의 출생과 같이 사가랴에게 아들의 출생은 큰 영적 진리, 곧 우리가 느리게 배우고 쉽게 잊어버리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런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도 순복하고 믿는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약속의 아들을 얻은 것은 믿음을 통하여 된 것이었다. 영적 생명을 낳게 하고 우리로 의로운 행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사가랴의 물음에 천사는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말하였다. 5백 년 전에 가브리엘 천사는 그리스도의 초림 시까지 미치는 예언적 기간을 다니엘에게 알려 주었다. 이 예언적 기간의 끝이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사가랴는 메시야의 강림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이제 이 예언을 알려 준 바로 그 천사가 또한 이 예언의 성취를 알려 주기 위하여 왔다.  -99-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고 한 천사의 말은 그가 하늘 궁정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다니엘에게 기별을 가지고 왔을 때 그는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 미가엘(그리스도)뿐이니라”(단 10:21)고 말하였다. 가브리엘에 대하여 구주께서 요한계시록에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계 1:1)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천사는 요한에게 “나는 너와 너의 형제 선지자들과…함께 된 종이니”(계 22:9)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아들 다음 가는 영예로운 지위의 천사가 하나님의 계획을 죄된 인류에게 드러내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말에 의심을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천사의 말이 성취되기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천사는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예식을 집전할 때 일반 공중과 국민의 죄의 사유를 위하여 또한 메시야의 강림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제사장의 의무였다. 그러나 이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사가랴는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백성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나와서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기다렸고, 혹시 그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임을 당하지나 않았는지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가 성소에서 나왔을 때 그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났으며 백성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 알았”다. 사가랴는 그가 보고 들은 바를 그들에게 알려 주고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약속되었던 아들이 출생하자 곧 아버지의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였다. 이 모든 일은 요한이 그 길을 예비하게 되어 있었던 메시야의 강림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바지했다.  -100-  성령이 사가랴에게 임하자 그는 그의 아들의 사명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로 예언하였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요한이 출생하기 전에 천사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리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인간에게 맡기신 사업 중 가장 위대한 사업을 하도록 사가랴의 아들을 부르셨다. 이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는 주를 그의 동역자로 모셔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천사의 지시에 유의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실 것이었다.  요한은 여호와의 사자로서 나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빛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사상에 새 방향을 제시해야 했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요구의 신성성을 인식시키고 완전한 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해야 했다. 그러한 기별자는 거룩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실 성전이 되어야 했다. 그는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건전한 체력과 정신적·영적 능력을 가져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식욕과 정욕을 지배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광야의 바위나 산들처럼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 설 수 있도록 자기의 모든 능력들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하였다.  침례 요한의 시대에는 재물에 대한 탐욕과 사치와 과시에 대한 사랑이 널리 퍼져 있었다. 관능적인 쾌락, 잔치와 먹고 마시는 일이 육체에 질병과 쇠퇴를 일으키고 영적 지각을 흐리게 하며 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요한은 개혁자로 설 것이었다. 그는 절제의 생애와 검소한 의복으로 그 시대의 부절제를 책망해야 했다. 그런 까닭에 요한의 부모에게 지시들, 곧 하늘 보좌로부터 보냄을 받은 천사를 통하여 절제에 대한 교훈이 주어졌다.  -101-  유년과 소년 시대의 품성은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다. 자제력도 이 때 습득해야 한다. 노변(爐邊)과 가정 식탁에서 그 결과가 영원에 미치는 감화가 끼쳐진다. 유년기에 형성된 습관은 어떤 천품(天稟)보다도 더 인생의 투쟁에서 사람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다. 청소년기는 씨를 뿌리는 때이다. 청소년기는 현세와 내세에 우리가 거둘 수확의 성격을 결정짓는다.  요한은 한 선지자로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게 할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초림을 위하여 길을 예비함으로 주의 재림을 위하여 백성을 준비시킬 자들의 한 표상이었다. 세상은 방종에 빠져 있다. 오류와 우화(寓話)가 많으며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한 사단의 올무는 증가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절제와 자제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 식욕과 정욕은 보다 더 고상한 정신력에 복종되어야 한다. 이 자아 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해 줄 정신력과 영적 통찰력을 얻는 데 필수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절제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경우에서라면 사가랴의 아들은 제사장직을 위하여 교육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랍비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더라면 그는 그의 사업을 행하기에 부적당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습득하도록 신학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그를 보내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천연계와 그 천연계의 하나님을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광야로 부르셨다.  그가 자기의 집으로 정한 곳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지역으로, 황량한 언덕들과 거친 계곡들과 암굴들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광야에서 엄격한 수양을 받기 위하여 세상의 향락과 사치를 버리기로 선택하였다. 이곳의 환경은 단순함과 극기의 습관을 기르기에 유리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소란한 세상에 방해받지 않고 천연계와 계시와 섭리의 공과들을 배울 수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부모는 사가랴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말을 요한에게 자주 들려주었다. 그의 부모는 어린 시절부터 요한에게 사명을 계속 제시해 주었으며, 요한은 그 거룩한 책임을 받아들였다. 광야의 고독은 그에게 의심과 불신과 부정(不淨)이 거의 만연된 사회를 피하는 즐거운 특권이 되었다. 그는 시험에 대항하는 데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으며 죄의 흉악성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죄와의 접촉을 항상 피하였다.  -102-  출생 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서 그는 일생을 성별하기로 스스로 서원하였다. 그는 옛날 선지자의 옷인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허리띠를 띠었다. 그는 광야에서 구할 수 있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산에서 나오는 맑은 물을 마시고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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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09일

By admin | May 2, 2020

9장 투쟁의 시절  유대 나라의 소년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랍비들이 만든 규례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생애의 가장 사소한 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동을 제한하는 엄격한 규정이 세워져 있었다. 청소년들은 회당 교사들의 지도하에 정통적인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준수해야 할 무수한 규칙들을 배웠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다. 그분은 유년 시절부터 랍비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행동하셨다. 그분은 늘 구약 성경을 연구하셨으며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는 말씀이 언제나 그분의 입술에 있었다.  백성들의 형편이 점점 공개되자 그분은 사회의 규칙과 하나님의 율법이 언제나 상충됨을 아셨다. 사람들은 말씀에서 떠나 그들 자신이 만든 이론을 높였다. 그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유전적 의식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예배는 한낱 의식의 반복에 불과했다. 그 예배가 가르치고자 의도한 거룩한 진리는 예배자들에게 숨겨지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에서 그들이 아무런 평안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다. 그들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그들에게 임하게 될 심령의 자유를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그분은 사람의 규칙과 하나님의 법도를 혼합시키는 것을 용인할 수 없으셨다. 그분은 학자들의 교훈과 행습을 공격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단순한 습관에 대하여 견책을 받을 때에 그분은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성경 말씀으로 제시하셨다.  -85-  예수께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온순하고 유순한 태도로 당신께서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기 위해 힘쓰셨다. 그분이 너무 온순하고 겸손하신 까닭에 서기관과 장로들은 그분이 그들의 가르침에 쉽게 감화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고대의 랍비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금언들과 유전을 받아들이도록 권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것들에 대하여 성경적 근거를 요구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듣고자 하였으나 사람이 만든 것을 순종하실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시는 듯하였으며 성경의 참뜻을 그들에게 드러내셨다. 랍비들은 어린아이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랍비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저희의 직분이니 그들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말에 반대되는 입장에 서는 것을 보고 분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전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영적 지식에 있어서 예수께서 자신들보다 훨씬 더 앞섰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분이 그들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분노했다. 그분을 설복시키지 못하자 그들은 요셉과 마리아를 찾아가서 그들 앞에 그분의 불복종하는 행동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그분은 책망과 꾸지람을 받으셨다.  -86-  예수께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품성을 형성함에 있어서 스스로 행동하셨으며, 자기 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조차도 그분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서 돌이키게 할 수 없었다. 그분이 가족들의 관습과 다르게 취하신 모든 행동의 동기는 곧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랍비의 영향은 그분의 생애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분은 소년 시대에서조차도 침묵과 끈기 있는 인내의 어려운 공과를 배워야 하셨다.  요셉의 아들들인 예수의 형제들은 랍비들의 편을 들었다. 그들은 유전도 마치 하나님의 명령인 것처럼 유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교훈을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게 간주했으며 거짓과 참을 분별하는 예수님의 명철한 식별력에 대하여 몹시 화가 났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분의 엄격한 순종을 그들은 완고하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랍비에게 대답하는 말씀 가운데서 나타내신 지식과 지혜에 대하여 놀랐다. 그들은 그분이 박사들에게서 교훈을 받은 일이 없음을 알고 있었으나 그분이 그들의 교사가 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분의 교육이 그들의 교육보다 더욱 고상한 종류의 교육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생명나무, 곧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식의 근원과 접촉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배타적이지 않았으나 바리새인들의 엄격한 규율들을 버림으로 특별히 그들을 성나게 하셨다. 그분은 일상 생애의 문제들을 너무나 거룩하게 만들어서 배타적인 높은 장벽의 담을 쌓은 종교의 아성을 보셨다. 그분은 이러한 파당의 벽을 허무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과 접촉할 때에 그대의 신조가 무엇인가? 그대는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가? 라고 묻지 않으셨다. 그분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돕는 능력을 행사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하늘 성품을 보여 주기 위하여 수도사의 밀실에 은거하지 않고 인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셨다. 그분은 성경상 종교가 육체의 고행에 있지 않다는 원리를 설득시키셨다. 그분은,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종파는 정해진 때와 특별한 경우에만 행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님을 가르치셨다.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그분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타내고 당신의 주위를 명랑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두르셨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일종의 책망이었다. 그분의 생애는 종교라는 이기심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과 그들의 개인적인 이욕에 대한 병적 헌신은 참된 경건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증오를 일으키게 했으므로 그들은 그분이 그들의 규칙을 따르도록 강요하였다.  -87-  예수께서는 당신이 목격하신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다 덜어 주기 위하여 일하셨다. 그분은 줄 돈이 거의 없었으나 자신보다 더 궁핍해 보이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종종 자신의 음식을 드시지 않았다. 그분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감화가 그들이 끼친 악한 감화를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분은 당신의 형제 중 아무도 갖지 못하고 또 갖기를 원치 않은 재치를 가지고 계셨다. 형제들이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게 거칠게 말할 때에 그분은 오히려 그런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을 찾아서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분은 궁핍한 사람들에게 한 잔의 냉수를 주고 자신이 먹을 음식을 가만히 그들의 손에 쥐어 주곤 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셨을 때에 가르치신 진리는 그분의 자비로운 행위와 관련되어 그들의 기억에 굳게 새겨졌다.  이런 모든 것이 그분의 형들을 불쾌하게 하였다. 예수님보다 손위인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당신을 그들보다 우월하게 생각한다고 비난하고, 또 예수께서 저희의 교사들과 제사장과 나라의 관리들보다 당신을 높인다고 책망하였다. 그들은 가끔 그분을 위협하고, 협박하려고 하였으나 성경을 자신의 안내자로 삼음으로 이겨내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형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친절하게 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시기하고 아주 단호한 불신과 멸시를 나타내었다. 그들은 그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 안에서 큰 대조(對照)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면서도 무력한 아이였다. 세계들과 지구가 창조주이신 그분의 소유였으나 빈곤이 그분의 생애의 매 발걸음의 특징이 되었다. 그분은 세상의 교만과 주제넘음과는 아주 판이한 위엄과 개성을 가지고 계셨다. 그분은 세속적인 위대함을 얻기 위해 분투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가장 비천한 지위에서도 만족해 하셨다. 이것이 그분의 형들을 노하게 하였다. 그분이 시련과 손실 가운데서도 언제나 평온하신 것을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로 “부요하게 하려 하심”(고후 8:9)이었음을 알지 못하였다. 욥의 친구들이 그의 겸비와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분의 형들은 그분의 사명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었다.  -88-  예수께서 형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던 것은 그분이 그들과 같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표준은 그들의 표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에게서 돌아섰기에 그들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없었다. 그들이 지켰던 종교의 형식은 품성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마 23:23)다. 예수님의 모본은 그들을 항상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분이 세상에서 오직 한 가지 미워하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죄였다. 그분은 악행을 목도할 때마다 숨길 수 없는 고통을 느끼셨다. 외형적인 성결로 죄에 대한 사랑을 숨기는 형식주의자들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성을 으뜸으로 삼는 사람 사이의 대조는 명백하였다. 예수님의 생애가 악을 책망했기 때문에 그분은 가정 안팎에서 반대를 받으셨다. 그분의 이기심 없는 결백성은 오히려 조소 섞인 평을 받았다. 그분의 인내와 친절은 소심(小心)으로 불렸다.  인간이 당하는 온갖 쓰디쓴 슬픔 중에 그리스도께서 맛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분의 탄생을 이유로 그분을 멸시하려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유년 시절에도 그분은 그들의 조롱하는 표정들과 악의에 찬 속삭임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셨다. 만일 그분이 한마디의 조급한 말로나 표정으로 응수하였더라면, 또는 단 한 번의 그릇된 행위를 함으로 형들에게 양보했더라면 그분은 완전한 모본이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속을 위한 계획도 성취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분이 죄에 대한 핑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만 하셨어도 사단은 승리하고 세상은 영원히 잃어버림을 당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마귀는 그분의 생애를 가능한 한 괴롭게 만들어서 그분을 죄에 빠뜨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시험을 당하실 때마다 그분의 한 가지 대답은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씀이었다. 그분은 형들의 잘못된 행동을 좀처럼 책망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말해주셨다. 그분은 종종 어떤 금지된 행동에 형들과 동참하기를 거절하심으로 비겁한 자라는 비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대답은 기록하였으되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욥 28:28)였다.  -89-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기 때문에 그분과 교제하려 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으나 많은 사람은 그분의 흠 없는 생애로 말미암아 견책을 받으므로 그분을 피하였다. 젊은 동무들은 그분에게 그들이 하는 것처럼 행하도록 권하였다. 그분은 명랑하고 쾌활하셨으므로 그들은 그분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였고 그분의 제의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치밀함을 보고 조급하여 말하기를 도량이 없고 완고하다고 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기록하였으되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9, 11).  그분은 자주 이런 질문을 받으셨다. 너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유별나고 우리 모두와 구별되게 행동하려고 하느냐? 그분은 기록하였으되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시 119:1~3)라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사렛 청년들의 환락에 어울리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 그분은 기록하였으되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 119:14~16)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리를 위하여 싸우지 않으셨다. 그분은 불평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일이 불필요하게 어려웠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약해지거나 낙담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 속에서 행하시는 것처럼 이러한 고난들을 초월하여 사셨다. 그분은 난폭한 대우를 받을 때에도 보복하지 않고 모욕을 참을성 있게 견디셨다.  왜 너는 이러한 악의에 찬 대접을 심지어 친형제에게서까지 받으면서도 감수하는가라는 질문을 빈번히 받으셨다. 그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록하였으되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3:1~4).  예수님의 부모가 그분을 성전 안에서 발견하였던 때로부터 그분의 행동은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였다. 그분은 논쟁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그분의 모본은 끊임없는 교훈이었다. 그분은 따로 구별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분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홀로 천연계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분은 일하던 곳에서 떠나 들로 가서 푸른 골짜기 가운데서 명상하고 또는 산비탈이나 삼림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셨다. 이른 아침에 그분은 흔히 외딴 곳에서 성경을 상고하거나 기도하셨다. 그분은 이 조용한 시간들을 가진 후에 집에 돌아가서 다시 집안 일을 돌보며 인내성 있는 수고의 모본을 보이셨다.  -90-  그리스도의 생애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특징지어졌다. 마리아는 자기 몸에서 난 거룩한 아이가 오래 전부터 약속되어 온 메시야임을 마음에 믿었으나 감히 그 믿음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예수님의 온 지상 생애를 통하여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그녀는 예수께서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에 당하시는 시련을 슬픔으로 목도하였다. 그분의 행위 가운데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옹호함으로써 마리아 자신도 어려운 입장에 빠졌다. 마리아는 가정의 교제와 자녀들을 향한 어머니의 자상한 보살핌이 아이들의 품성 형성에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요셉의 아들과 딸들은 이것을 알았으므로 마리아의 염려하는 마음에 호소함으로 그들의 표준에 따라 예수님의 행위를 교정하려고 힘썼다.  마리아는 종종 예수님에게 충고하면서 랍비의 규례를 따르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명상하는 일과 고난을 당하는 인류, 심지어 말 못하는 짐승의 고난까지도 덜어주기 위하여 힘쓰시는 그분의 습관을 고치도록 설복시킬 수 없었다. 제사장들과 교사들이 예수님을 제어하는 일에 그녀의 도움을 청하였을 때에 마리아는 매우 괴로웠다. 그러나 예수께서 당신이 행하시는 일을 지지하는 성경구절을 찾아서 보여 주실 때에 마리아는 마음에 평안을 얻었다.  때때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믿지 않는 그분의 형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러나 그분이 신적인 존재라는 증거가 풍부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보았다. 그분이 있을 때에는 가정 안에 좀더 순결한 분위기가 나타났으며 그분의 생애는 교제하는 자들 가운데서 누룩과 같은 작용을 하였다. 그분은 분별이 없고 난폭하고 버릇없는 자들 곧, 부정한 세리, 무모한 탕아, 불의한 사마리아 사람, 이방 나라의 군인, 거친 농부, 잡된 무리들 가운데서 해받음 없이 더럽힘을 받지 않고 행하셨다.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를 받은 사람들을 여기저기에서 볼 때마다 그분은 그들에게 동정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분은 그들의 짐을 나눠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애와 선하심에 대하여 당신이 천연계에서 배웠던 교훈을 그들에게 여러 번 말씀해 주셨다.  -91-  그분은 바르게만 사용한다면 그들에게 영원한 보화를 가져다 줄 고귀한 재능들을 부여받은 사람들로 자신들을 생각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분은 생애 가운데서 허영이란 것을 일체 제거해 버리셨으며, 매 순간이 영원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므로 이 매 순간을 보배처럼 귀중히 여겨서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의 모본을 통해 가르치셨다. 그분은 어떤 사람도 무가치한 존재로 지나쳐 버리지 않고 각 영혼에게 구원의 치료제를 발라 주려고 하셨다. 그분은 어떤 무리 가운데 있을지라도 때와 환경에 적절한 교훈을 주셨다. 그분은 매우 난폭하고 희망이 없는 것같이 보이는 자들에게도 소망을 고취시켜 주고 그들도 흠 없고 유순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들로 나타나게 될 그러한 성품에 도달할 수 있다는 보증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분은 종종 사단의 지배 아래 휩쓸려 들어가서 그의 올무에서 벗어날 힘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셨다. 예수께서는 이런 낙망하고 병들고 시험에 빠지고 타락한 자들에게 가장 부드러운 동정의 말씀, 곧 적절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해주셨다. 또한 그분은 영혼의 원수와 백병전을 하는 사람들도 만나셨다. 그분은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들의 편에 서서 승리를 줄 것이므로 그들이 승리할 수 있다고 보증하시면서 인내하라고 격려하셨다. 그리하여 이렇게 도움을 받은 자들은 그들이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한 분이 계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분은 그들이 당신의 동정하는 귀에 털어놓은 비밀을 결코 누설하지 않으셨다.  -92-  예수께서는 심령뿐만 아니라 육신도 고치시는 분이셨다. 그분은 자신이 목도하는 온갖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그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셨으며, 그분의 친절한 말씀은 진정시키는 향유와 같았다. 어떤 사람도 그분이 이적을 행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능력 곧 치료하는 사랑의 능력이 그분으로부터 병자와 고난당하는 자에게로 흘러나왔다. 이와 같이 그분은 유년 시절부터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셨다. 그분의 공생애가 시작되었을 때 그처럼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즐겨 들은 것은 이 까닭이었다.  그러나 유년, 청년, 장년기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홀로 다니셨다. 그분은 순결하고 신실하사 홀로 포도즙 틀을 밟으셨으나 백성들 가운데 그분과 함께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심히 무거운 책임을 지셨다. 인류의 원칙과 목적에 결정적인 변화가 없는 한 모두가 다 잃어버림을 당하리라는 것을 그분은 아셨다. 이러한 사실이 그분의 마음을 억눌렀으며 아무도 그분이 진 짐의 무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열렬한 목적으로 충만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람들의 빛이 되도록 당신의 생애의 계획을 실천하셨다.  시대의 소망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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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08일

By admin | May 1, 2020

8장 유월절에 참여하심  유대인들에게 열두 살 되는 해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분기점(分岐點)이었다. 히브리의 남아들은 이 연령이 차면 율법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다. 그 아이는 종교적 교훈을 받을 특별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거룩한 절기와 예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어릴 때에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신 것도 이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 모든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요셉과 마리아도 해마다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으며 예수께서 적령(適齡)이 되셨을 때에 그들은 그분을 데리고 갔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연례적인 세 절기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주 앞에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세 절기 중 유월절에는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하였다. 유대인들이 흩어져 있었던 모든 나라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팔레스틴 각처로부터 경배자들이 많이 왔다. 갈릴리로부터의 여행은 여러 날이 걸렸으므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서로 동무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큰 무리를 지어서 갔다. 부녀들과 노인들은 험준한 돌작길을 소나 말을 타고 갔다. 건강한 사람과 젊은이들은 도보로 갔다. 유월절의 절기는 3월 말이나 4월 초순에 해당했으므로 온 땅은 꽃들로 화사하고 새들의 노랫소리로 흥겨웠다. 그들이 가는 길에는 줄곧 이스라엘의 역사상 기념될 만한 고적들이 있었고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지난 시절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행하신 기사에 대하여 상세히 말해 주었다. 그들은 노래와 음악으로 여행을 즐겁게 했으며 마침내 예루살렘의 탑들이 시야에 들어오면 모두가 목소리를 합하여 다음과 같은 개가를 불렀다.  -76-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시 122:2~7).  유월절을 지키는 일은 히브리 나라의 건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마지막 밤, 구원받을 아무런 징조도 보이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임박한 해방을 위해 준비하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애굽에 최후의 형벌이 내리게 될 것을 경고하는 동시에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가족들을 집에 모으도록 지시하셨다. 그들은 문설주에 살해된 어린양의 피를 뿌린 다음에 구운 어린양의 고기를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하였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 12:11)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밤 자정에 애굽의 모든 장자는 다 죽임을 당하였다. 그 때에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출 12:31)라는 기별을 보냈다. 히브리 사람들은 애굽에서 하나의 독립 국가로 나왔다. 주께서는 이 유월절을 해마다 지키라고 명하셨다.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하여 이 놀라운 구원에 대한 이야기는 대대로 되풀이해서 말해질 것이었다.  -77-  유월절을 뒤이어 7일간의 무교절이 있었다. 이 무교절의 둘째 날에는 그 해의 수확물 가운데 처음 익은 열매 즉 보릿단을 여호와 앞에 드렸다. 절기의 모든 의식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사업을 표상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구속에 대한 실물 교훈이었고 유월절은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 누룩 없는 떡, 처음 익은 곡식단은 다 구주를 상징하였다.  그리스도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절기의 준수는 형식주의로 전락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그 절기가 얼마나 의미심장했던가!  -78-  소년 예수께서 처음으로 성전을 바라보셨다. 그분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제사장들이 엄숙하게 성전 봉사를 행하는 것을 보셨다. 그분은 제단 위의 피 흘리는 제물을 바라보셨다. 향연이 하나님 앞으로 올라갈 때에 그분은 다른 경배자들과 함께 머리 숙여 기도하셨다. 그분은 그 감명적인 유월절 예식들을 목도하셨다. 그분은 날마다 그 예식들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셨다. 의식의 모든 행사는 자신의 생명과 관련이 있는 듯이 보였다. 새로운 충동이 그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분은 조용하고 열심히 어떤 큰 문제를 풀어내시려고 하는 듯이 보였다. 당신의 사명의 신비가 구주에게 공개되고 있었다.  이런 장면들을 명상하는 일에 골똘하여 그분은 부모 곁에 머무르시지 않았다. 그분은 홀로 있기를 원하셨다. 유월절 예식이 끝난 후에도 그분은 여전히 성전 뜰에 남아 계셨다. 그래서 다른 참여자들이 떠나간 후에도 그분은 뒤에 남으셨다.  예수님의 부모는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에 그분을 이스라엘의 훌륭한 교사들과 접촉시키기를 원하였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은 엄밀히 순종하였으나 랍비의 의식과 관습은 따르지 않으셨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분이 학식 있는 랍비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요구 사항들에 더욱 더 유의하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성전 안에 계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셨다. 그분은 받으신 것을 곧 남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하셨다.  그 당시에는 선지자 학교의 본을 따라 성전에 연결된 한 방이 거룩한 학교로 구별되었다. 여기에 저명한 랍비들이 그들의 문하생들과 함께 모였는데 소년 예수께서 이곳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이 위엄 있는 학자들의 발아래 앉아서 그들이 가르치는 교훈에 귀를 기울이셨다. 그분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으로서 이 선생들에게 메시야의 초림을 지적하는 예언의 말씀과 그때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하여 질문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갈망하는 자로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예수께서 하신 질문들은 오랫동안 가려져 왔었으나 실상은 영혼의 구원에 극히 중대하고 심오한 진리들을 생각나게 해주었다. 모든 질문은 이 학자들의 지혜가 얼마나 편협하고 피상적인가를 드러낸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신령한 교훈을 주었고 진리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해 주었다. 랍비들은 메시야가 강림하시면 유대 나라는 놀랍게 높임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제시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어린양의 고난과 죽음을 예시하는 그 성경절들의 의미를 질문하셨다.  박사들은 그분에게 질문의 화살을 돌렸는데 그들은 그분의 대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어린이의 겸손한 태도로 성경 말씀들을 암송하면서 박사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깊은 뜻을 드러내셨다. 그분께서 지적해 내신 진리의 체계들은, 만일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면 그 당시의 종교에 개혁을 일으켰을 것이다. 또한 영적 사물에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며 따라서 예수께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80-  랍비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예언에 대한 이해는 그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그들은 이 생각이 깊은 갈릴리의 어린이가 장래성이 매우 많음을 알았다. 그들은 그분을 학생으로 삼아서 장차 이스라엘 나라의 교사로 만들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이 독창적인 재능을 그들의 뜻대로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분의 교육을 책임지기를 원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일찍이 사람의 말로는 움직여지지 않았던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빛을 주려고 하셨으며,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그들의 교만은 그들이 타인의 교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냉소하고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려는 태도를 보였더라면 그들은 듣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가르치고 있거나, 적어도 그분의 성경 지식을 시험하고 있다고 자위하였다. 예수님의 소년다운 겸손과 미덕이 그들의 편견을 제거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무의식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열렸고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말씀하셨다.  그들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예언에 의해 지지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부추겨 준 종전의 이론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노라고 주장하는 성경 말씀을 오해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는 질문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빛이 흑암 중에 비치고 있었으나 “어둠이 깨닫지 못하”(요 1:5)였다.  한편 요셉과 마리아는 큰 혼란과 걱정 속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그분이 뒤에 남아 계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당시 나라의 인구는 매우 조밀하였으며 갈릴리에서 온 무리의 대열은 매우 컸다. 그들이 도시를 떠날 때에 큰 혼잡이 있었다. 그들은 가는 도중에 친구와 친지들과 함께 여행하는 기쁨에 관심이 몰두되어 밤이 되기까지 그분이 없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쉬기 위하여 머물렀을 때에 도움이 되는 아이의 손길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분이 무리 가운데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비록 어렸지만 그들은 그분을 전적으로 신임하였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필요를 미리 알고 언제든지 와서 그들을 도와주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염려가 되었다. 그들은 온 무리를 다 살펴보았으나 헛일이었다. 그들은 그분의 유아 시절에 헤롯이 그분을 죽이려고 하던 것을 기억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불길한 예감이 그들의 마음을 채웠다. 그들은 크게 자책했다.  -81-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찾으러 돌아다녔다. 그 이튿날 그들이 성전에 경배하러 왔던 사람들과 함께 섞여 있을 때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들이 그 음성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분의 음성처럼 진실되고 열성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음조로 충만한 음성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랍비의 학교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기쁘기는 하였으나 괴로워하고 걱정하던 것에 대하여 잊을 수가 없었다. 예수께서 그들과 다시 함께 있게 되자 어머니는 책망 섞인 말로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셨다. 그들이 그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을 때에 그분은 위를 가리키셨다. 그분의 얼굴에는 빛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 광채를 보고 놀랐다. 신성이 인성을 통하여 번쩍였다. 성전에서 그분을 발견하였을 때에 그들은 그분과 랍비 사이에 오가는 말을 듣고 그분의 질문과 대답에 놀랐다. 그분의 말은 도무지 잊혀지지 않을 여러 생각을 연달아 일으켰다.  그리고 부모에게 한 그분의 질문에는 교훈이 있었다. 그분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해야 할 일에 종사하고 계셨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이 할 일을 등한히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맡기심으로 그들에게 높은 영예를 베푸셨다. 거룩한 천사들은 예수님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요셉의 행로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그분을 온 종일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근심에서 놓여났을 때에 그들은 자신들을 책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에게 질책의 말을 던졌다.  예수님의 부모가 그분을 그들의 자식으로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분은 날마다 저희와 같이 살고 그분의 생애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른 아이들과 같았으므로 그들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구주와 함께 살게 하신 축복에 감사하지 않을 위험이 있었다. 그분과 헤어짐으로 그들이 괴로워한 일이나 그분이 은근히 책망한 말은 그들에게 그들이 맡은 책임의 신성성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에게 대답하는 말씀 가운데서 처음으로 그분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이해하였음을 나타내셨다. 예수의 탄생 전에 천사는 마리아에게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라”(눅 1:32, 33)고 말하였다. 마리아는 이 말을 마음속에 두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아이가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될 것은 믿으면서도 그분의 사명에 대하여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분이 요셉과의 친족 관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을 알았다.  -82-  예수께서는 육신의 부모에 대한 당신의 관계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예루살렘에서 부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 후 수고스러운 부모들의 생계를 도우셨다. 그분은 마음 가운데 자신의 사명의 신비를 감추고 사업을 시작할 지정된 시기를 겸손히 기다리셨다. 그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식한 후 18 년간 당신과 나사렛 가정과의 유대 관계를 인정하셨으며 아들과 형제와 친구와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행하셨다.  성전에서 당신의 사명이 그분에게 공개되었을 때에 예수님은 무리들과 접촉하기를 꺼리셨다. 그분은 자신의 생애의 비밀을 아는 자들과 함께 조용히 예루살렘에서 돌아가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예식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의 마음을 이 세상의 근심과 수고에서 돌이켜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낼 때에 행하신 큰 기사를 회상시키려고 하셨다. 그분은 이 기사 가운데서 그들이 죄로부터의 구원의 약속을 발견하기 원하셨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들을 보호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는 그들의 영적 생명을 구원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그분의 생명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에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표상적 예식은 예배자들을 그들의 개인의 구주로서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할 때에만 효력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하고 명상하도록 이끌려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무리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갈 때에 여행에 대한 흥분과 사교적인 교제에 그들의 관심이 너무 몰두되어 그들이 목도하였던 예식은 잊혀졌다. 구주께서는 그러한 무리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고난을 당하시는 구주에 대한 예언으로 향하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분은 갈바리에서 겪을 당신의 어머니의 슬픔을 덜어 주려고 힘쓰셨다. 지금 그분은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분의 마지막 고통을 목도하게 될 것이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녀가 그분의 사명을 깨달아서 칼이 그녀의 마음을 찌를 때에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를 바라셨다. 예수께서 어머니와 헤어졌을 때에 어머니가 사흘 동안 근심하면서 그분을 찾은 것처럼 그분께서 세상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실 때에도 어머니는 다시 사흘 동안 그분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에 그녀의 슬픔은 다시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마리아가 지금 예수께서 그녀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 성경절을 깨달았다면 그분께서 운명하실 때에 당할 고민을 얼마나 더 쉽게 견딜 수 있었을까!  -83-  만일 요셉과 마리아가 묵상과 기도로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머무르게 했다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위탁된 직분의 신성성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며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를 등한히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구주를 잃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흘 동안 근심하면서 그분을 찾으러 다녔다. 우리도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한다. 우리는 쓸데없는 잡담과 험담과 기도의 등한으로 말미암아 단 하루 동안에 구주에게서 떠나가게 되며 잃어버렸던 평안을 다시 회복하려면 여러 날을 슬퍼하면서 그분을 찾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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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007일

By admin | Apr 30, 2020

7장 유년 시대  예수께서는 유년과 청소년 시대를 한 작은 산촌에서 보내셨다. 이 세상에서 그분의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예롭게 되지 않을 장소는 하나도 없었다. 왕궁에서라도 그분을 손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유한 가정이나, 왕궁이나, 유명한 학자의 저택을 지나치시고, 궁벽하고 천시 받는 나사렛을 거처로 삼으셨다.  그분의 초기 생애에 관한 간단한 기록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얼굴에서 비추는 햇빛 아래서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눅 2:52)셨다. 그분은 정신이 민활하고 통찰력이 있었으며, 나이에 비하여 생각이 깊고 지혜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분의 품성에는 균형 잡힌 아름다움이 있었다. 정신력과 체력은 아이의 성장 법칙에 따라 점점 발달하였다.  예수께서는 유년의 독특한 사랑스러운 기질을 나타내셨다. 그분의 자발적인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그분은 아무것도 침해할 수 없는 인내와 결코 고결함을 희생시키지 않는 진실성을 나타내셨다. 원칙에는 반석과 같이 확고하였지만 그분의 생애는 이기심 없는 인정을 드러내셨다.  -69-  예수님의 어머니는 그분께서 능력을 발휘하시는 것을 매우 진지하게 주목하였으며 그분의 품성에 나타난 완전의 표적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기쁨으로 그 명랑하고 감수성이 많은 아이의 마음을 격려하기를 힘썼다. 그녀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그의 아버지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 아이를 양육하는 일에 하늘 천사들과 협력하기 위한 지혜를 받았다.  아주 옛날부터 이스라엘의 신실한 자들은 청소년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주께서는 아이들을 아주 어릴 때부터, 특히 하나님의 율법에 명시되고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위대하심에 대하여 가르치라고 명하셨다. 찬미와 기도와 성경의 교훈들은 지성이 뜨이기 시작하는 아이들의 마음에 적응되도록 해야 할 것이었다. 부모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표현인 것과 또한 그들이 율법의 원칙을 마음속에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의 심령에 새겨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였다. 가르치는 일은 주로 구두로 하였으나 청소년들은 또한 히브리 저술들을 읽는 법을 배웠고 양피지 두루마리에 기록된 구약 성경을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 당시에는 청년들의 종교적 지도를 위하여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마을이나 도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곳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 교훈은 형식화되어 있었다. 유전이 성경을 대신하는 일이 많았다. 참된 교육은 청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행 17:27) 하도록 인도할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 교사들은 의식에 대한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의 마음은 배우는 자에게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욱 높은 학교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할 그런 요소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얻어지는 경험은 그 교육 제도에서 자취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외양적인 것들에 열중한 학생들은 하나님과 조용히 보낼 시간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음에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였다. 그들은 지식을 찾는 가운데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돌아섰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가장 요긴한 것이 무시를 당하였다. 율법의 원칙들은 모호해졌다. 탁월한 교육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참된 향상에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랍비들의 훈련을 받음으로 청소년들의 능력은 억압을 당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제한을 당하고 좁아졌다.  -70-  아이 예수는 회당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분의 어머니가 최초의 인간 교사였다. 그분은 어머니의 입술과 선지자들의 두루마리로부터 하늘 사물에 대하여 배우셨다. 그분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말씀을 이제는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서 배우셨다. 유년기에서 소년으로 자라나실 때에도 그분은 랍비의 학교를 찾지 않으셨다. 그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얻는 교육이 그분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는데 이는 하나님이 바로 그분의 교사이셨기 때문이다.  구주의 공생애 동안에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한 질문은 예수께서 글을 읽으실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랍비의 교육을 받지 않으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요 7:15). 그분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지식을 얻으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그처럼 성경에 정통하신 사실은 소년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부지런히 연구하셨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분 앞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으로 채워진 큰 도서관이 펼쳐져 있었다. 만물을 만드신 그분께서 당신의 손으로 친히 땅과 바다와 하늘에 쓰셨던 교훈을 연구하셨다. 그분은 세상의 부정한 방법들을 떠나서 천연계로부터 학문적 지식을 얻으셨다. 그분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의 생명을 연구하셨다. 그분은 유년 시대부터 오직 한 목적에 사로잡히셨는데 곧 남을 축복하기 위하여 생애하셨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자원을 그분은 천연계 가운데서 발견하셨다. 식물과 동물, 생물의 생태를 연구하시는 동안 새로운 방법과 수단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번개같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분은 보이는 사물로부터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소개할 수 있는 예증들을 끌어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셨다. 공생애 동안 비유를 들어서 진리의 교훈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신 것을 보면 그분은 천연계의 감화에 대하여 얼마나 마음 문을 열어 놓으셨으며, 일상생활의 환경으로부터 영적 교훈을 어떻게 취하셨는지를 알게 된다.  그와 같이 예수께서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려고 힘쓰셨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천연계의 깊은 뜻이 그분께 펼쳐졌다. 하늘의 천사들이 그분의 수종자였으므로 거룩한 사상과 교제를 계발시킬 수 있었다. 지성의 눈이 처음 뜨일 때부터 그분은 영적 은혜와 진리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끊임없이 자라나셨다.  어떤 아이든지 예수께서 지식을 얻으셨던 것처럼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와 친숙하게 되려고 노력할 때에 천사들은 우리에게 접근하고, 우리 마음은 연단되며 우리의 성품은 고상해지고 세련될 것이다. 우리는 더욱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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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006일

By admin | Apr 29, 2020

6장 “우리가 그의 별을 보았노라”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명문 출생이며 그 나라에서 재물과 지식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매우 유력한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는 백성들의 우매함을 나쁘게 이용하는 자들도 많았으나 천연계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표적을 연구하고 그들의 청렴함과 지혜로 존경을 받던 정직한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님을 찾아온 박사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빛은 항상 이교의 흑암 속에서 비치고 있다. 이 박사들이 별이 총총한 하늘을 연구하고 그 별들의 빛나는 궤도 안에 숨은 신비를 탐구할 때에 그들은 창조주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더욱 명확한 지식을 찾는 가운데 히브리 성경에 관심을 돌렸다. 그들의 나라에서도 거룩한 교사가 오시리라고 예언한 예언서들이 있었다. 한때는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발람도 이들 박사의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는 이스라엘의 번영과 메시야의 나타나심을 예언하였고 그의 예언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전설로 전하여 내려왔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는 구주의 강림이 더욱 명백히 계시되어 있었다. 박사들은 구주의 강림이 가까웠다는 것과 온 세상이 주의 영광의 지식으로 충만하게 될 것을 알고 기뻐하였다.  -60-  박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베들레헴의 언덕을 가득히 채웠던 바로 그 밤에 하늘에 빛나는 신비한 빛을 보았다. 그 빛이 사라지자 광채나는 한 별이 나타나 하늘에 머물렀다. 그 별은 항성(恒星)도 유성(游星)도 아니었으므로 그 현상은 극도의 흥미를 일으켰다. 그 별은 멀리서 빛을 발하는 천사의 무리였는데 박사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별이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제사장과 철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보고 고대의 두루마리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발람의 예언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나”(민 24:17)리라. 이 이상한 별이 약속된 분을 예고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닐까? 박사들은 하늘에서 주신 진리의 빛을 환영하였으므로 이제 그 빛은 더욱 광명한 빛줄기로 그들을 비추었다. 그들은 꿈을 통하여 새로 탄생하신 왕을 찾으러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히 11:8)간 것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구름기둥을 따라 약속의 땅에 간 것같이 이 이방 사람들도 약속된 구주를 찾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동방의 나라에는 귀한 물건들이 풍부하였으므로 박사들은 빈손으로 출발하지 않았다. 왕이나 지위가 높은 명사들에게 존경을 나타내는 행위로써 예물을 증정하는 것이 풍습이었는데, 그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고귀한 선물이 그분 안에서 세상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게 되어 있는 분에게 예물로 드려져야 했다. 별을 보면서 가기 위하여 밤에 여행해야 했다. 그들은 그들이 찾으려 하는 분에 대한 전설과 예언들을 암송하면서 그 시간을 보냈다. 쉬기 위하여 멈출 때마다 그들은 예언을 살펴보았으며 그들이 하늘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확신은 깊어졌다. 그들은 외적 표적으로써 그들 앞에 별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그들을 소망으로 고무시키는 성령의 내적 증거도 가졌다. 그 여행은 비록 길었지만 그들에게는 즐거운 여행이었다.  그들이 이스라엘 나라에 도착하여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감람산에서 내려올 때에 피곤한 여행길을 내내 인도해 오던 별이 성전 위에 멈추었다가 얼마 후에 사라져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메시야의 탄생이 각 사람의 기쁨에 찬 대화의 주제가 되리라고 확신하면서 열띤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들은 헛일이었다. 그들은 거룩한 성에 들어가 성전으로 갔다. 놀랍게도 그들은 새로 탄생하신 왕에 대하여 아는 듯한 사람을 한 사람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의 질문은 기쁨의 말이 아닌 조롱이 섞인 놀람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61-  제사장들은 유전들을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과 자신의 경건성은 높이면서 헬라 사람과 로마 사람은 이방인이요, 다른 민족들보다 더 큰 죄인들이라고 비난한다. 이 박사들은 우상 숭배자들이 아니었으며, 하나님 보시기에는 당신을 경배하노라고 공언하는 이들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말씀의 수호자로 임명을 받은 자들 가운데서도 이들의 열렬한 물음에 동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동방 박사들이 왔다는 소식이 온 예루살렘에 신속히 퍼졌다. 그들의 이상한 사명은 백성들 가운데 흥미를 일으켰으며, 그 소식은 헤롯의 왕궁에까지 들어갔다. 이 간교한 에돔 사람은 혹시 자기의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가 왕위를 획득하기까지 걸어온 길은 무수한 사람의 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는 이방인의 혈통이었으므로 그가 다스리는 백성으로부터 증오를 받았다. 그의 유일한 안전책은 로마의 총애였다. 그러나 이 새로 나신 왕은 보다 높은 권리를 가졌으니 이는 바로 그 나라 태생인 까닭이었다.  헤롯은 제사장들이 이 낯선 박사들과 음모하여 대중 폭동을 일으켜서 자기를 폐위시키지나 않을까 의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의심을 숨기고 보다 뛰어난 간계로써 그들의 음모를 좌절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소집하고 메시야께서 탄생하실 장소에 대하여 그들의 성경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를 그들에게 물었다.  -62-  동방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 요구할 때에 왕위 찬탈자의 이 질문은 유대인 교사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그리고 예언서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은 질투심이 많은 폭군을 격노케 만들었다. 그는 그들이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정보를 감추려고 하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들이 감히 무시하지 못할 권위를 가지고 그는 그들에게, 면밀히 살펴서 예상되는 왕의 탄생지를 밝혀 달라고 명령하였다.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헤롯은 이제 박사들을 조용히 만나자고 초청하였다. 그의 심중에는 분노와 공포의 폭풍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고 이 외국인들을 정중히 영접하였다. 그는 별이 나타난 때를 물으면서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기쁨으로 환영한다고 공언하였다. 그는 이 방문객들에게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렇게 말한 후에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장로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그들이 가장한 것처럼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났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이미 들어왔지만 랍비들은 그 소식을 유의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였다. 그들 자신들이 예수를 발견하고, 박사들을 예수의 탄생지로 인도할 준비를 갖추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동방 박사들이 와서 메시야의 탄생에 대하여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말했다.  이제 교만과 시기는 빛에 대하여 문을 닫아버렸다. 만일 목자들과 박사들이 전한 소식들이 신임을 받는다면, 제사장과 랍비들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의 해설자라는 그들의 주장이 그릇되었음을 증명할 것이었다. 이 학문이 있는 교사들은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자신들을 낮추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간과하시고 무식한 자들이나 할례 받지 못한 이방 사람들과 교통하실리 만무하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을 흥분시키고 있는 그 소식을 경멸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들은 그 일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베들레헴에 가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에 대한 관심을 일종의 광신적인 흥분으로 여기도록 이끌었다. 여기서 제사장과 랍비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그들의 교만과 완고함은 구주를 결정적으로 미워하기까지 자라났다.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문을 여시는 동안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에게 문을 닫고 있었다.  -63-  박사들끼리만 예루살렘을 출발하였다. 그들이 성문을 나설 때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지만 매우 기쁘게도 그들은 그 별을 다시 보았고, 베들레헴으로 인도 받았다. 그들은 목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초라한 형편에 대하여는 아무런 암시도 받지 못하였었다. 그들은 오랜 여행 후에 유대 나라 지도자들의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실망을 당했으며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는 이 성에 들어올 때보다 확신을 잃어버렸다.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은 새로 탄생하신 왕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렬한 왕의 근위병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세상의 귀인은 한사람도 그 곳에 없었다. 예수님은 구유 안에 눕혀 있었다. 교육받지 못한 부모가 그분을 지키는 유일한 수호자였다. 이 아기가 과연 성경에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존된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방의 빛”이 되어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겠다고 기록된 바로 그분이실까?(사 49:6).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라한 외형 속에 숨어 있는 신성의 임재를 인식하였다. 그들은 진심으로 그분을 구주로 믿고 그들의 예물,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다. 그들은 얼마나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가! 훗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고 로마 백부장에게 하신 말씀은 동방 박사들에게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64-  박사들은 예수님에 대한 헤롯의 의중을 간파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여행의 목적을 이루자 그들의 성공을 헤롯에게 알릴 생각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꿈 가운데서 그와 더 이상 교통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기별을 받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피하여 다른 길로 고국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요셉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가라는 경고를 받았다. 천사는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고 말하였다. 요셉은 지체하지 않고 순종하여 더욱 안전한 곳을 향하여 밤중에 길을 떠났다.  하나님께서는 동방 박사들을 통하여 유대 백성들에게 당신의 아들의 탄생에 주의를 환기시키셨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한 질문들, 그로 인해 야기된 백성들의 관심 그리고 심지어는 제사장들과 랍비의 관심을 강요한 헤롯의 시기심 등은 사람들의 마음을 메시야에 관한 예언과 방금 발생한 큰 사건에 이끌리게 하였다.  -65-  사단은 세상으로부터 하늘의 빛을 차단하는 일에 열중하였으며 구주를 죽이려고 온갖 간책을 다 썼다. 그러나 결코 졸거나 주무시지도 않는 분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지키고 계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리시고 기근의 때에 엘리야를 먹이신 분께서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위하여 이방 나라에 피난처를 준비하셨다. 주께서는 이방 나라의 박사들이 가져온 예물을 통하여 애굽으로 가는 여행과 타향에서 우거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마련해 주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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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망 – 005일

By admin | Apr 28, 2020

5장 봉헌식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지 약 40일 후에 요셉과 마리아는 그분을 주께 바치고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 이것은 유대인의 법에 따른 것으로 인간의 대속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모든 조목을 따라야 하셨다. 그분은 율법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으로 이미 할례를 받으셨다.  율법은, 어머니를 위해 1년 된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고 어린 비둘기나 반구를 속죄 제물로 드리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율법의 규정에 의하면 만일 부모가 너무 가난하여 어린 양을 드릴 수 없을 경우 반구 한 쌍이나 혹은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한 마리는 번제로, 다른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주께 드리는 모든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였다. 이 제물들은 그리스도를 표상하였는데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 자신은 육체적 결함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분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벧전 1:19)이셨다. 그분의 신체 조직은 어떠한 결함으로도 훼손을 받지 않았다. 그분의 몸은 튼튼하고 건강했다. 그리고 그분은 평생토록 자연 법칙에 일치하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은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가 당신의 법칙을 순종함으로 어떠한 사람이 되도록 의도하셨는지를 보여 준 모본이셨다.  -51-  초태생을 주께 바치는 일은 아주 옛날에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장자를 주기로 약속하셨다. 이 선물은 각 가정에서 장자를 봉헌하는 것을 통하여 인정되어야 했다. 사람들 가운데 거하실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자로서 그는 제사장직에 바쳐져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실 때에 처음 난 것을 바치라는 명령이 다시 주어졌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 사람들의 종노릇하고 있을 때에 주께서는 모세에게 애굽 왕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출 4:22, 23)라고 말하도록 지시하셨다.  모세는 이 기별을 전하였으나 거만한 애굽 왕은 듣고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고 대답하였다.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고 바로에게 무서운 재앙들을 보내셨다. 마침내 멸망시키는 천사에게 애굽 사람들의 장자와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죽이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그들의 문설주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는 지시를 받았다. 천사가 살육하는 사명을 가지고 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가정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이렇게 표를 해 놓아야 하였다.  애굽에 이 재앙을 내리신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출 13:2; 민 3:13). 성막 제사 제도가 확립된 후에 여호와께서는 레위 지파를 온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성전 봉사를 하도록 선택하셨다. 그러나 장자는 여전히 주의 것으로 여겨져서 속전(贖錢)으로 다시 사도록 되어 있었다.  그와 같이 장자를 드리는 규례는 특히 의미심장한 것이 되었다. 이것은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기이하게 구원해 내신 일에 대한 한 기념물인 동시에 또한 장차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될 더욱 큰 구원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문설주에 뿌려진 피가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를 구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에는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52-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바치는 일은 얼마나 중대한 의미가 있었던가! 그러나 제사장은 그 휘장을 꿰뚫어 보지 못하였다. 그는 그 너머에 있는 신비를 깨닫지 못하였다. 어린아이를 바치는 일은 흔히 보는 일이었다. 매일 제사장은 아기들이 바쳐질 때마다 속전을 받았다. 그들은 날마다 그들의 일과를 되풀이하는 가운데 부모의 부나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어떤 표시가 보이지 않으면 그 아기나 부모에 대하여 별로 유의하지 않았다.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기를 안고 갔을 때에 제사장들은 그들을 갈릴리 사람처럼 차리고 또 아주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남자와 여자로만 여겼다. 그들의 외양에 주목을 끌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그들은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드리는 제물을 드렸을 뿐이었다.  제사장은 그의 공적인 의식을 행했다. 그는 아기를 그의 팔에 안고 제단 앞에서 쳐들었다. 어머니에게 아기를 돌려 준 후에 그는 장자의 명부에 “예수”라는 이름을 기입하였다. 그는 그 아기가 자기 팔에 안기었을 때에 이 아기가 바로 하늘의 주재시요, 영광의 왕이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 제사장은 모세가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행 3:22)고 기록한 것이 이 아기를 가리킨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그분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모세가 간구했었던 분이 바로 이 아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보다 더욱 크신 분께서 제사장의 팔에 안기었다. 제사장이 그 아기의 이름을 명부에 올렸을 때에 그는 곧 온 유대의 제사 제도의 기초가 되시는 분의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그 이름은 그 제도에 종말을 고할 것이었다. 그 까닭은 제사와 제물의 제도가 점점 낡아가고 있었으며 표상은 그 원형(原型)에, 그림자는 그 실체에 거의 도달하였기 때문이었다.  성소의 속죄소에 나타나던 여호와의 영광(쉐키나)은 떠나가 버렸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아기 안에 천사들이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영광이 가려져 있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이 아기는 에덴의 입구에 쌓은 첫 제단이 가리켰던 약속의 후손이셨다. 그는 실로 곧 평강을 주시는 분이셨다. 이 아기가 바로 모세에게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선포하신 분이셨다. 그가 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분이셨다. 이 아기가 바로 선지자들이 오래전부터 예언한 분이셨다. 그는 만국의 보배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셨다. 이스라엘의 명부에 기록되어 우리의 형제임을 선포하는 그 연약한 작은 아기의 이름은 타락한 인류의 소망이었다. 그를 위하여 속전이 지불되었던 이 아기가 바로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전을 지불하실 분이셨다. 그는 참된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시요, “갈리지 아니”하는 “제사 직분”의 머리시요,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신 중보자이셨다(히 10:21, 7:24, 1:3).  -55-  영적인 일들은 영적으로라야 분별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당신이 행하려고 오셨던 사업을 위하여 성전에서 바쳐지셨다. 제사장은 보통 다른 아이를 보듯이 그를 보았다. 그 제사장이 어떤 비범한 것을 보거나 느끼지 못하였지만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행위는 인정을 받았다. 이 기회는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일이 없이 그냥 지나가지는 않았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라.  성전에 들어갈 때에 시므온은 한 가족이 그들의 장자를 제사장 앞에 바치는 것을 본다. 그들의 외양은 가난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시므온은 성령의 경고하심을 깨닫고 주께 드려지고 있는 그 아기가 곧 이스라엘의 위로이시며 자기가 보기를 사모하던 자라는 깊은 감명을 받는다. 놀란 제사장의 눈에 시므온은 기쁨에 도취된 사람처럼 보인다. 시므온은 방금 마리아가 되돌려 받은 아기를 자기 팔에 안고 하나님께 바치는데 그때에 그의 마음에는 전에 느껴 보지 못한 기쁨이 영혼에 밀려온다. 그가 아기 구주를 공중에 쳐들면서,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취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예언의 영이, 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하였다. 요셉과 마리아가 그의 말에 놀라면서 곁에 서 있을 때에 그는 그들에게 복을 빌고 마리아에게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고 말하였다.  여선지자 안나도 들어와서 시므온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한 말을 확증하였다. 시므온이 말할 때에 안나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났다. 그는 자기가 주 그리스도를 보도록 허락받은 것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를 드렸다.  이 겸손한 경배자들은 예언을 헛되이 연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나라의 관원과 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자들 또한 그들 앞에 귀한 예언의 말씀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의 길로 행하지 않고 있었으며 저들의 눈은 생명의 빛을 보기 위해 열려 있지 않았다.  오늘날도 역시 그러하다. 종교 지도자들과 성전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온 하늘의 주의가 집중되어 있는 사건들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러한 사건들이 발생한 사실도 모르고 있다. 사람은 역사상의 그리스도는 인정하면서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게서는 돌아선다. 1천8백 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자아 희생을 요청하는 말씀을 하시고 구제를 요구하는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하시며 가난과 수고와 비난이 따르는 의로운 사업을 행하시는 그리스도를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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