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장 논쟁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리스도의 날카로운 질책을 잠잠히 듣고 있었다. 그들은 그분의 책망을 논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층 더 단호하게 결심하였다. 이런 목적으로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하여” 정탐꾼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게 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끔 만나신 일이 있는 나이 든 바리새인들을 보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아시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열심 있는 젊은 바리새인을 보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심문할 때에 그분에 대하여 적대적인 증언을 하려고 하는 어떤 헤롯 당원들이 이들과 동행하였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서로 큰 원수였지만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인들의 가혹한 과세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세금을 바치는 일은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된다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예수께 올무를 놓을 기회를 잡았다. 정탐꾼들이 예수께 와서 겉으로는 신실한 체하며 그들의 의무를 알기를 원하는 것처럼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라고 질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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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라고 한 말은, 그들이 진실되었더라면 경이로운 고백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속이기 위하여 말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증언은 사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저들은 그들 자신의 증언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 이 질문을 한 자들은 저희가 저희 목적을 충분히 위장하였다고 생각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저희 마음을 펼친 책처럼 읽으시고 저희 위선을 경고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은 그들이 감추고 있는 목적을 읽고 계심을 나타냄으로써 그들이 요구하지 않은 표적을 주셨다. 예수께서 “셋돈을 내게 보이라”고 덧붙여 말씀하셨을 때에 그들은 더욱더 당황하였다. 그들은 동전을 가져왔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셨다.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동전에 새겨진 형상을 가리키면서 예수께서는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정탐꾼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질문에 이쪽 혹은 저쪽이라고 직접 대답할 것을 기대하였다. 만일 예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이 부당하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분은 로마의 관원에게 보고되어 반란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실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 정당하다고 선언하실 경우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반대한다고 그분을 백성들에게 고발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저희의 계획이 좌절되었음을 느꼈다. 그들의 계획들은 혼란되었다. 요점(要點)을 답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질문이 대답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회피가 아니라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이었다. 가이사의 이름과 형상이 새겨진 로마의 돈을 손에 들고 예수께서는 그들이 로마의 권세의 보호 아래 살고 있는 이상 그들은 이 권세를 유지하기에 요구되는 것만큼 세금을 바칠 것이며, 이것이 더욱 높은 의무와 상충되지 않는 한 그렇게 하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국가의 율법에 온화하게 복종하는 반면에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먼저 할 것이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구주의 말씀은 음모를 꾸미는 유대인들에게 한 혹독한 책망이었다. 만일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충실히 실행하였더라면 그들의 국가가 분열되고 외국의 권세에 복종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깃발이 예루살렘에 휘날리지 않았을 것이며 로마의 보초병이 저희의 문에 서지도 않았을 것이요 로마의 총독이 저희의 성안에서 다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대 민족은 그 당시 하나님을 배반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대답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위선과 무례를 책망하셨으며 이 일을 행하심으로 세상 정부에 대한 사람의 의무와 하나님께 대한 의무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한 위대한 원칙을 선언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결말이 나지 않았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그 때 이후로 그들은 올바른 원칙을 굳게 고수하였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은 채 떠나갔지만 그들은 그 질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원칙이 분명히 제시된 것을 보았고 또 그리스도의 선견지명이 있는 분별력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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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이 침묵을 당하게 되자마자 사두개인들이 교활한 질문을 들고 나왔다. 두 교파는 서로 크게 대적하는 입장에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엄격하게 유전(遺傳)을 고수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외형적 의식에 엄격하였고 씻고 금식하고 긴 기도를 드리는 데 부지런하였으며 구제하는 일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헛되게 한다고 선언하셨다. 한 계급으로서 그들은 완강하고 위선적이었지만 저희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제자가 된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의 유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의 대부분을 믿으며, 이것을 행위의 법칙으로 삼는다고 공언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무신론자들이며 유물론자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교리와 또 그 보상과 형벌을 부인하였다. 이 모든 점에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았다. 부활은 특별히 이 두 교파 사이의 논쟁의 주제였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굳게 믿고 있었으나 이 논의에서 미래의 상태에 관한 그들의 견해는 혼란되었다. 죽음은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되었다. 사두개인들의 논증에 맞설 수 없는 그들의 무능함은 계속적인 노여움을 일으켰다. 두 교파 사이의 논의는 대체로 성난 언쟁을 초래했으며, 그들을 전보다 더 멀어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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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효에 있어서는 사두개인들이 상대측보다 훨씬 적었으며 일반 백성들을 굳게 장악하지 못했으나 그들 중의 많은 사람이 부자였으며 그들은 부가 주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 계층에 대부분의 제사장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대제사장은 흔히 그들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들의 회의적 견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명백한 약정 하에 그렇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이 수효가 많고 인망이 있는 까닭에, 사두개인들은 어떤 제사장 직분이든지 유지할 때는 외형적으로 바리새인들의 교리를 용인할 필요가 있었으나, 그와 같은 직분에 적격이라는 바로 그 사실이 그들의 오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거절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만 그와 같이 스스로 드러나는 어떤 정신에 의해 고무되셨다. 하나님과 내세에 관한 그분의 가르치심은 그들의 교리에 반대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류보다 높으신 유일의 존재자로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배하는 섭리와 하나님의 예지는 인류에게서 자유로운 도덕적 기능을 빼앗아 사람을 노예의 위치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류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더욱 큰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살도록 버려두셨다는 것이 그들의 신조였다. 그들은 인류가 스스로의 생애를 지배하고 세상의 사건들을 계획할 자유가 있으며 인류의 운명은 사람 자신의 손에 놓여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의 힘과 자연의 법칙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그들은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능력을 적당하게 활용함으로 인류는 향상하고 계몽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엄격한 강요를 통하여 그의 생애가 순결하게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개념이 그들 자신의 품성을 꼴 지었다. 그들의 견해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으셨다. 그러므로 그들도 상호간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들 가운데 연합이란 거의 없었다. 인간의 행동에 끼치는 성령의 감화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저희 생애에는 그분의 능력이 부족하였다. 다른 유대인들처럼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생득권(生得權)과 율법의 요구를 엄격하게 지키는 일을 크게 자랑하였으나 그들에게 율법의 참 정신과 아브라함의 믿음과 자비심은 없었다. 자연적인 동정심은 좁은 범위 안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생애의 위안과 축복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저희 마음은 다른 사람의 궁핍과 고통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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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위로써 초자연적 결과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과 현세 저편의 내세와 인간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항상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비와 동정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나타내셨는데 이것이 사두개인들의 이기적 배타심을 질책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현세적 유익과 영원한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마음을 움직이신다고 가르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품성의 변화를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루려는 과오를 보여 주셨다.
사두개인들은 이 가르침을 믿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예수님과 논쟁하면 그들은 그분을 정죄할 수는 없을지라도 예수님의 평판을 떨어뜨릴 자신이 있다고 느꼈다. 부활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하기로 선택한 문제였다. 만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동의하신다면 그분은 바리새인들을 더욱 크게 화나게 할 것이었다. 만일 그들에게 반대하신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조롱하기로 그들은 계획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만일 몸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처럼 불멸의 상태에서도 동일한 물질의 분자(分子)로 구성되었다면 죽음에서 살아났을 때에도 살과 피가 있어야 하며 지상에서 중단된 생명이 영원한 세계에서 계속되어야 한다고 추론하였다. 그럴 경우 세상에서의 관계가 계속될 것이며 남편과 아내는 다시 연합되어 부부 생활이 계속되고 모든 일이 죽기 전과 똑같이 되어 나가고 금생의 약점과 격정이 내세에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심으로 예수께서는 내세를 가린 베일을 거두셨다. 예수께서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사두개인들의 신조가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셨다. 그들의 전제는 잘못되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부언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것처럼 위선 때문이 아니라 신조의 오류에 대하여 그들을 책망하셨다.
사두개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그들이 성경 말씀을 가장 굳게 고수한다고 자랑해 왔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성경 말씀의 참뜻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 그 지식은 성령의 비침으로 마음에 깊이 확신되어야 한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그들의 무지가 믿음의 혼란과 심령의 어둠을 가져온 요인이라고 예수께서는 선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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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들의 유한한 추리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해력을 넓혀 주고 힘 있게 할 이 거룩한 진리에 저희 심령을 열도록 초청하셨다. 그들의 유한한 지력으로써는 하나님의 신비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된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거룩한 능력의 경이로운 현시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그와 같은 능력의 증거를 거절하며 그것을 그들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자연 작용에 돌린다. 우리 주위에 있는 신비를 여는 유일의 열쇠는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임재와 능력을 승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사를 명하시고 집행하시는 우주의 창조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넓은 견해와 그분의 섭리의 신비를 알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저희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성경이 쓸데없게 되리라는 사실을 청중들에게 선언하셨다. 그분은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들을 있는 것처럼 간주하신다. 그분은 시작부터 끝을 아시며 사업의 결과를 그것이 지금 이루어진 것처럼 보신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맨 마지막에 죽을 성도에 이르기까지 죽은 고귀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와 불멸의 생명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은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과 부활한 성도들은 친밀하고 부드러운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그분의 목적 가운데 예기되어 있는 이 형편을 그분은 이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보신다. 죽은 자가 그분에게는 산 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사두개인들은 침묵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답할 수 없었다. 예수님을 정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리스도의 대적들은 백성들의 멸시밖에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분을 책잡는 데 사용할 말을 하도록 그분을 추궁하는 일을 아직도 단념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학식 있는 서기관을 설복시켜 율법의 열 가지 교훈 가운데 가장 크고 중대한 것이 어느 것인지 예수께 질문하도록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창조주에 대한 사람의 의무를 지적한 첫 네 계명을 그의 이웃 사람에게 대한 사람의 의무로 밝힌 나머지 여섯 계명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높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실제적 경건을 이루는 데 크게 실패하였다. 예수께서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큰 결점을 보이신 다음에 그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고 선언하시면서 선한 행실의 필요를 가르치셨다. 이런 이유로 그분은 나머지 여섯 계명을 처음 네 계명 이상으로 높인다는 비난을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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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사는 예수께 접근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질문하였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직접적이며 힘이 있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예수께서는 둘째도 첫째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그것이 첫째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하나의 큰 계명으로 요약된다. 나머지 여섯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다른 계명 가운데 포함된다. 이 두 계명이 다 사랑의 원칙의 표현이다. 둘째 계명을 범하면서 첫째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첫째 부분을 범하면서 둘째 부분을 지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보좌에 바른 자리를 차지하고 계실 때에 우리 이웃에게도 바른 자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할 때만 우리 이웃을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다.
모든 계명이 사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요약되어 있으므로 이 원칙을 범하지 않고는 한 계명도 깨뜨리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은 어떤 것은 크게 중요하고 다른 어떤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할지라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그렇게 많이 분리된 계율이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가르치셨다. 우리 주님은 처음 네 계명이나 나머지 여섯 계명을 다 거룩하고 완전한 것으로 나타내시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분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예수께 질문한 서기관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는 예수께서 그처럼 심오하고 완전한 성경 지식을 나타내시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 거룩한 계명들의 근간이 되는 원칙에 대하여 넓은 식견을 얻었다. 모인 제사장들과 관원들 앞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바로 해석하셨다는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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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지혜로운 대답은 서기관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였다. 서기관은 유대인의 종교가 내적 경건보다는 외적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죄를 속하는 데에 단순한 제의(祭儀)적인 제물과 신앙심 없는 피 흘림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사람에게 이기심 없이 대하는 것이 이 모든 의식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스도의 논증의 올바름을 인정한 이 사람의 신속성과 백성들 앞에서 보여 준 그의 결정적이며 기민한 대답은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정신을 나타냈다. 예수님의 마음은 제사장들의 찌푸린 얼굴과 관원들의 위협을 무릅쓰고 담대히 마음의 확신을 말한 이 정직한 서기관을 동정하였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하셨다.
이 서기관은 번제물과 제물보다 의의 행위가 하나님께 더욱 받으실 만한 것임을 깨달았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의의 사업을 행할 능력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산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 한 의식적인 희생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심지어 도덕적 율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구주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율법에는 단지 권위적인 명령 이상의 더 깊은 무엇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 주셨다. 율법 가운데는 복음에 나타난 바와 같은 원칙이 구현되어 있다. 율법은 사람의 의무를 지적하며 그의 죄를 보여 준다. 사람은 그리스도께 용서와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해야 한다.
예수께서 서기관의 질문에 대답하실 때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가까이 모여 있었다. 이제 예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질문하셨다. 이 질문은 메시야에 관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하여, 즉 그분을 단순한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무리들은 음성을 합하여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메시야에게 예언된 칭호였다. 예수께서 능력 있는 기적들로 당신의 신성을 나타내셨을 때에, 그분이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셨을 때에 백성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뇨” 하고 그들 가운데서 서로 물었다.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과 소경 바디매오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도움을 청하면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15:22)라고 부르짖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그분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1:9)라는 즐거운 부르짖음의 만세 소리를 들으셨다. 그리고 그날 성전에서는 어린이들이 그 즐거운 찬송을 반향시켰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신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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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 대답하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감의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셨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시대의 소망 pp. 601-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