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장 함정 가운데서
축제가 계속되는 동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셨을 때 언제나 정탐꾼들이 그림자처럼 그분을 따라 다녔다. 날마다 그분을 침묵시키려는 새로운 음모들이 시도되었다. 제사장과 율법사들은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폭력으로 그분을 제지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뿐이 아니었다. 저들은 백성들 앞에서 이 갈릴리에서 온 선생을 천대하고자 하였다.
그분께서 절기에 참석하신 첫날에 율법사들은 그분에게 찾아가서 무슨 권세로 가르치느냐고 힐문하였다. 그들은 관심을 그분으로부터 그의 가르칠 수 있는 그분의 권리에 대한 문제로, 그렇게 하여 그들 자신의 관록과 권위에 관심이 돌려지기를 바랐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6, 17)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트집쟁이들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영혼의 구원에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공개하셨다. 그분께서는 진리에 대한 지각과 인식은 지성보다는 마음에 더 의존한다고 말씀하셨다. 진리는 심령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은 의지의 충성을 요구한다. 만일 진리가 이성으로만 수용되는 것이라면 자만심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마음에서의 은혜의 역사를 통하여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모든 죄를 버리는 데 달려 있다. 아무리 큰 진리의 지식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가 마음 문을 열어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의 원칙에 반대되는 모든 습관과 행동을 양심적으로 벗어버리지 않는 한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 것으로 입증될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정직한 마음으로 그분의 뜻을 알고 행하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진리는 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는 자와 자신만을 위하여 말하는 자를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저희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의 편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를 알려고 힘쓴 것이 아니라 진리를 피할 수 있는 어떤 핑계를 찾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바로 저희가 당신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임을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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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분은 참 선생과 기만자를 구별할 수 있는 한 시금석을 주셨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8). 자기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단지 자신만을 위하여 말한다. 이기주의적 정신은 그 본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이야기하셨다. 이것이 진리의 교사로서 그분이 가지신 권위의 증거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음을 보이심으로 당신의 신성의 증거를 랍비들에게 보여 주셨다. 베데스다에서 병 고치심을 본 이후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해 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수호하고 있다고 공언하는 율법을 스스로 범하고 있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빠른 섬광처럼 이 말씀은 랍비들에게 그들이 뛰어 들어가려던 멸망의 구덩이를 나타내 보였다. 잠시 동안 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들은 무한한 능력자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경고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백성들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살인 계획은 은폐되어야 했다. 예수님의 질문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고 외쳤다.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사업은 악령에 의해 교사(敎唆)된 것이라고 교묘하게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묘한 말에 유의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계속하여 베데스다에서 병 고치신 일은 안식일에 관한 율법에 일치하며 유대인들 자신의 율법 해석으로도 정당한 일임을 보이셨다. 예수께서는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할례를 주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에 의하면 어린아이마다 팔 일째 되는 날에는 할례를 받아야 했다. 정한 날이 안식일이어도 예식을 행하여야만 하였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하는 것은 율법의 정신에 얼마나 더 일치되는 일인가!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경고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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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원들은 잠잠하였으나 많은 백성들은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라고 부르짖었다.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그분을 대적하는 관원들의 음모를 잘 아는 그리스도의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자신들이 그분에게 이끌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이 그들을 짓눌렀다. 그러나 사단은 곧 의심을 불어넣었다. 메시야와 그분의 임하심에 대한 그들 자신의 그릇된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준비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나 얼마 후 사라질 것이며 두 번째 나타날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었다. 메시야는 인성과는 생래적(生來的)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메시야의 영광에 대한 일반 백성의 관념이 나사렛 예수님에게는 들어맞지 않은 까닭에,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는 암시에 유의하게 되었다.
그들이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동안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원이 어디임을 안다고 주장하였지만 사실은 그것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애하였다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을 것이다.
청중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씀은 분명히 여러 달 전에 산헤드린 앞에서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그 말씀의 반복이었다. 그때 그분을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지금 그들은 그분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를 제한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들을 막고 그들에게 여기까지 가고 더 이상 가지 말라고 하였다.
백성들 중의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고 말하였다. 사건의 추이를 근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바리새인의 지도자들은 무리 가운데서 동정의 표시를 간파하였다. 그들은 급히 대제사장에게 달려가 그분을 체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 앞에서 감히 그분을 잡을 수 없었으므로 그분이 홀로 계실 때 잡으려고 준비하였다. 다시 예수께서는 그들의 목적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셨다.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그분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분은 곧 그들의 조소와 증오의 손길이 닿지 않는 피난처를 발견하실 것이었다. 그분은 아버지께로 올라가 다시 천사들의 숭배를 받으실 것이며 그분을 살해한 자들은 그곳에 갈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랍비들은 비웃으면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이 트집쟁이들은 그들의 조롱하는 말 가운데서 저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묘사하고 있었음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분께서는 하루 종일 불순종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당신의 팔을 펴셨으며, 여전히 그분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백성들에게 나타나신 바 되었다(롬 10:2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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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확신한 많은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랍비들의 거짓된 이론으로 말미암아 잘못 인도되었다. 이 선생들은 메시야가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는 예언과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신다”는 예언을 힘 있게 강조하고, 그것을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사 24:23; 시 72:8). 그러고는 이곳에 묘사된 영광과 예수님의 비천한 모습을 멸시하는 태도로 비교하였다. 바로 그 예언의 말씀들은 오류를 옳다고 인정할 만큼 왜곡되었다. 백성들이 성실하게 그 말씀을 스스로 연구하였다면 그들은 잘못 인도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사야 61장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이 하신 바로 그 일을 행하실 것이었음을 증거한다. 53장은 세상에 오셔서 거절당하고 고통당하실 것을 나타내며, 59장은 제사장들과 랍비들의 품성을 묘사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저희 불신을 버리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들 앞에는 빛과 어둠, 그리고 진리와 오류가 있다. 어느 쪽을 받아들일지는 그들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다. 인간의 마음은 선악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일시적 충동으로 결정하지 않고 성경절들을 조심성 있게 대조해 보고 그 증거의 무게에 따라 결정하도록 계획하신다. 만일 유대인들이 선입관을 버리고 기록된 예언의 말씀과 예수님의 생애를 특징짓는 사실들을 비교해 보았다면 그들은 비천한 갈릴리 사람의 생애와 봉사에서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 사이에 있는 아름다운 조화를 깨달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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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처럼 속임을 당하고 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유전의 빛으로 성경을 읽으며 백성들은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판단을 버리고 자신의 영혼을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맡긴다. 그분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빛을 퍼뜨리기 위하여 정하신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의 가르침을 성경 말씀으로 시험해야 한다. 순종하기 위해 진리를 알고자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거룩한 조명(照明)을 받게 될 것이다. 그는 성경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절기의 마지막 날에 제사장들과 당국자들이 하속들을 보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하였으나 그들은 그분을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제사장과 당국자들은 분노하여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고 물었다. 하속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강퍅했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듣고 녹아버렸다. 그분께서 성전 마당에서 가르치고 계시는 동안 그들은 가까이 와서 그분에게서 어떤 일을 책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 그들은 그들이 파송된 목적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황홀감에 빠진 사람들처럼 서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영혼들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당국자들이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 즉 신성의 영광으로 넘치는 인성을 보았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고 그분의 말씀에 감명을 받고 돌아온 그들은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는 질문에 “이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제사장들과 율법사들도 처음 그리스도 앞에 왔을 때 같은 확신을 느꼈다. 그들의 마음은 깊이 감동되었으며, “이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다는 생각이 힘 있게 그들에게 밀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깨우치심을 짓눌려버렸다. 이제 그들은 율법을 집행하는 관리들까지도 그 미운 갈릴리 사람의 영향을 받은 데 분노하여 이렇게 부르짖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진리의 기별을 듣는 자들 가운데 “이것이 진리인가?”라고 묻는 사람은 드물지만 “누가 이것을 옹호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은 많다. 대중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들의 수효로 진리를 평가한다. 그리고 “지식인과 종교 지도자들 중에 믿는 자가 있느냐”란 질문이 아직도 계속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진정한 경건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결같이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며 영원한 부를 등한히 여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과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이 진리에 대한 반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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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은 예수님을 잡으려는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만일 그분을 마음대로 하시도록 더 내버려둔다면 그분은 기성 지도자들에게서 백성을 이끌어 갈 것이므로 제일 안전한 방책은 지체 없이 그분을 침묵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의논이 최고조에 달하였을 때 그들의 의논은 갑자기 저지되었다. “우리의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결정하느냐”라고 니고데모가 질문하였다. 회중 가운데 침묵이 흘렀다. 니고데모의 말은 그들의 양심을 찔렀다. 그들은 사람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 정죄할 수 없었다. 거만한 관원들이 정의를 위하여 담대히 말한 그를 바라보고 침묵을 지킨 것은 이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성품에 감화를 받고 그를 변호하는 말을 한 것에 대해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으며 원통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놀란 마음을 가다듬고 신랄하게 비꼬면서 니고데모에게 말하였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그 항의로 회의의 진행이 중단되었다. 관원들은 듣는 일이 없이는 그들의 목적을 성취하고 예수님을 정죄할 수 없었다. 당분간 모든 일은 좌절되어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었다.
도시의 흥분과 혼란, 열망하는 군중들과 반역적인 랍비들을 피하여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있는 조용한 감람산으로 가셨다. 그러나 이른 아침에 그분은 성전으로 돌아가셨다. 주위에 백성들이 모여들자 그분은 앉아서 가르치셨다.
일단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거칠고도 열띤 음성으로 일곱째 계명을 범하였다고 비난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힌 한 여인을 끌고 그분에게 나왔으므로 가르치시던 일은 곧 중단되었다. 그들은 그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떠밀어 보낸 후 존경하는 척하면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라고 물었다.
그들의 꾸며낸 존경에는 그분을 해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짜놓은 음모가 가려져 있었다. 그들은 그분께서 어떠한 결정을 내리실지라도 고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분을 정죄할 구실을 확보하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그분께서 이 여인을 정죄하시지 않는다면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며, 마땅히 죽어야 된다고 선언하신다면 로마인들만이 가진 권리를 횡령하는 자로 로마인에게 고소당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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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잠시 동안 수치심으로 떨고 있는 여인과 인간적인 동정조차 없는 철면피한 고관들을 바라보셨다. 흠 없이 순결한 그분의 정신은 그 광경을 보고 움츠러들었다. 어떠한 목적으로 이런 문제를 당신께 가져오게 되었는지 그분은 잘 알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품성과 생애의 어떠함을 아셨다. 소위 정의의 수호자들이라는 이들이 예수님을 해할 함정을 만들기 위하여 이 여인을 죄 짓게 했던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질문은 들은 척도 안 하시고 몸을 굽혀 시선을 땅에 고정시킨 채 흙에다 글씨를 쓰기 시작하셨다.
그분의 지체와 명백한 무관심에 참을 수 없게 된 고소자들은 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시도록 강력하게 촉구하면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예수님의 시선을 따라 땅바닥으로 쏠렸을 때 그들의 안색은 변하였다. 그들 앞에 그려져 있는 것은 그들 자신들의 생애의 죄의 비밀들이었다. 바라보고 있던 백성들은 그들의 표정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자 무엇 때문에 그처럼 놀라고 부끄럽게 생각하는지 알기 위하여 밀며 앞으로 나왔다.
율법을 존중한다는 그들의 모든 공언에도 불구하고 랍비들은 여인을 고소하기 위하여 데려옴으로 율법의 규정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 여자를 고소할 의무는 남편에게 있었으며 범죄한 상대방도 똑같이 처벌을 받아야 하였다. 고소자들의 행동은 완전히 월권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 자신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하셨다.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을 집행할 때 그 사건의 증인들이 먼저 돌을 던지도록 율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이제 예수께서는 일어나 음모한 장로들을 바라보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땅에 계속 기록하셨다.
그분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도 제거하지 않았으며 또한 로마의 권위도 침해하지 않으셨다. 고발자들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제 거룩함을 가장하던 그들의 의복은 찢겨진 채 그들은 무한히 순결하신 분 앞에서 정죄를 받고 서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애의 숨은 죄악이 무리들 앞에 공개될까봐 두려워 떨면서 머리를 숙이고 눈을 땅에 떨어뜨린 채 그들의 희생자와 동정하시는 구주를 남겨두고 한 사람씩 슬금슬금 도망쳐버렸다.
예수께서는 일어나 여인을 보고 말씀하셨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가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그 여인은 두려워 떨면서 예수 앞에 서 있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그분의 말씀은 그녀에게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그녀는 감히 눈을 들어 구주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그녀는 고발자들이 말없이 부끄러워 떠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 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시는 희망에 찬 말씀이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그녀의 마음은 녹아 내렸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고마운 사랑의 마음으로 흐느껴 울면서, 뜨거운 눈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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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녀에게 순결과 평화의 생애,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바쳐진 새 생애의 시작이 되었다. 이 타락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가장 흉악한 육체적 질병을 고칠 때보다도 더 큰 이적을 행하셨다. 그분께서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영적 질병을 고치셨다. 이 회개한 여인은 그분을 가장 신실히 따른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자아 희생적 사랑과 헌신으로 그녀는 예수님의 용서하여 주신 은혜에 보답하였다.
이 여인을 용서하고 고상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신 이 일 가운데서 예수님의 성품은 완전한 의의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그분께서는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는 동시에 정죄하지 않고 구원하려고 노력하신다. 세상은 곁길로 나아간 이 여인에게 멸시와 조롱밖에 보내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하신다. 무죄하신 분은 죄인의 연약함을 동정하고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신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은 비난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과오를 범한 자들이 타락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고 그들에게서 눈을 돌리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고발하는 데 앞장서고 그들을 재판하여 처벌하는 데 열중하는 자들이 오히려 그들의 생애에는 그들보다 죄가 더욱 많을 수 있다. 사람들은 죄는 사랑하면서도 죄인은 미워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미워하고 죄인은 사랑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비난하는 데는 느리고, 회개하는 자를 분별하여 용서하고 격려하며, 방황하는 자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여 그의 발이 그 길에 머무르도록 하는 데 신속해야 한다.
시대의 소망 pp. 455-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