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망 – 51일

어떤 사람이 모든 일에 우리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의견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정당화시켜 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교사이시므로 우리는 판단하거나 억제하지 말고 각기 예수님의 발아래 겸손히 앉아서 그분에게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갖게 하신 영혼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관용하는 사랑을 드러내실 통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지닌 자들을 낙심시킴으로써 그분께서 세상에 비추기를 원하셨던 빛줄기를 차단하지 말도록 얼마나 조심해야 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이끌고 계셨던 사람에 대하여 한 제자가 보인 가혹함과 냉정함-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던 자를 요한이 금한 것과 같은 행동-은 그 발을 돌이켜 원수의 길에 들어서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영혼을 잃어버리게 하는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45)고 부언하셨다.

왜 어떤 말도 더 이상 강렬할 수 없는 이토록 중대한 말씀을 하셨을까? 그 까닭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제자들이 저희의 동료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하늘의 엄위(嚴威)하신 분께서 보이신 것보다 관심을 덜 보여서야 되겠는가? 영혼마다 무한한 값을 치렀으므로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가게 하여, 그를 위한 구주의 사랑과 치욕과 고뇌가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죄를 범하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마 18:7)다. 사단의 충동을 받은 세상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반대하고,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취하고도 여전히 이 일을 행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우리 주께서는 당신을 섬기노라 하면서 당신의 품성을 그릇 나타내는 자들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신다. 따라서 무리들은 기만을 당하고 그릇된 길로 인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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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빠지게 하여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습관이나 행습은 무엇이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버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은 영혼에 유익이 될 수 없다. 영원한 의의 원칙을 어기는 자에게는 하늘의 축복이 따를 수 없다. 그리고 한 가지라도 마음에 품은 죄는 품성을 타락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기에 넉넉하다. 몸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하여 발이나 손을 절단하거나 심지어 눈을 빼버리는 일이 있거든 하물며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를 버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힘써야 할 것인가!

의문(儀文)의 제사에서는 제물마다 소금을 쳤다. 향을 피우는 것과 같이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만이 그 제사를 하나님께 가납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관습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롬 12:1)고자 하는 자들은 다 구원하는 소금인 우리 구주의 의를 받아야 한다. 그 때 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 소금이 방부(防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사람들 중에서 죄악을 방지한다(마 5:13). 그러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즉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이 경건의 모양만 있다면 선을 위한 능력은 조금도 없게 된다. 그런 생애는 세상에 구원하는 감화를 끼칠 수 없다. 예수께서는 ‘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그대의 활력과 능력은 그대가 나의 영을 받는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다.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되려면 그대는 나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경쟁심, 이기심, 높은 지위에 대한 욕심이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부를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부를 구하는 그런 사랑을 가질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에 그 눈을 고정시키도록 하라. 그는 바라봄으로써 변화된다. 그의 공포는 기쁨으로, 의심은 소망으로 변한다.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오른다. 돌 같은 마음이 부서진다. 사랑의 조수가 심령에 밀려들어온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마음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신다. 우리가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를 아는 자이신 예수께서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일하면서 멸시와 조롱과 경멸을 받고 당신의 사명을 성취하기까지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쫓기신 모습을 볼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큰 피땀을 흘리고 십자가 상에서 고뇌의 죽음을 당하시는 그분을 보게 될 때 자아는 더 이상 인정받기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냉담함과 무기력과 이기심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주님을 위해 진정한 봉사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사랑하는 그분을 위하여 시련이나 치욕, 박해를 견디기를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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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믿음이 비록 약하고 그의 발걸음이 어린이의 발걸음처럼 흔들거릴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아무도 낮게 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은 모든 것, 그것이 교육이거나 품위거나 품성의 고상함이거나 그리스도인 훈련이거나 혹은 신앙의 경험이거나 간에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우리보다 은혜를 적게 받은 자들에게 빚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의 한도 내에서 그들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우리가 강하다면 약한 자의 손을 붙잡아 주어야 한다. 항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는 영광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어린 자녀들을 섬기는 것을 기뻐한다. 많은 좋지 못한 품성의 특성을 가진 불안에 떠는 영혼들이 그들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천사들은 언제나 자기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있다. 그들은 자아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하며, 가장 절망적인 환경에 처한 자들과 함께 있다. 그리고 이 봉사에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은 협력할 것이다.

이 작은 자 중 하나가 정복당하여 그대에게 잘못을 행할 때에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힘쓰는 것이 그대가 할 일이다. 그가 먼저 화해하려고 힘쓸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의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온유한 심령으로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갈 6:1)며 실수한 자에게 가서 “너와 그 사람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그의 실수를 다른 사람들에게 폭로함으로써 그에게 모욕을 주거나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죄나 실수를 공개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욕을 돌리는 일이 없게 하라. 종종 실수한 자에게 진리를 분명히 말해 주어,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고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대는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지 말라. 그대의 모든 노력은 그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 되게 하라. 영혼의 상처를 치료할 때 가장 섬세한 접촉과 가장 세심한 감정이 필요하다. 갈바리에서 고난을 당하신 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만이 이 경우에 그 효력을 낼 수 있다.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으로 형제가 형제를 대우하되 그대가 성공한다면 그대는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여 허다한 죄를 덮”(약 5:20)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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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노력해도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 때에는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의 연합된 감화는 먼저 간 사람의 감화로는 성공하지 못한 점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그 사건에 관계가 없으므로 더 공정하게 행동할 것이며 이 사실은 실수한 자에게 저희의 권면을 더욱 무게 있게 해줄 것이다.

그래도 그가 저희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래도 안 된다면 그 문제를 전체 신자 앞에 내 놓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자로서 교인들은 범죄자가 회복되도록 연합해서 기도하고 사랑의 탄원을 해야 한다. 성령께서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그 방황하는 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간구하실 것이다. 영감을 받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고 말한다. 이 합동 제의를 거절하는 자는 자기를 그리스도에게 결합시킨 끈을 끊음으로써 교회의 교제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를 하나님의 자비에서 끊긴 자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의 이전 형제들은 그를 멸시하거나 등한히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우리 안으로 인도하려고 힘쓰고 계시는 잃어버린 양 중의 하나로서 친절과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도록 하라.

실수한 자를 취급하는 일에 대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교훈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레 19:17)고 한 교훈을 더 구체적인 형태로 반복한다. 다시 말하면 어느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의무, 곧 오류와 죄 가운데 빠진 자들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을 등한히 하면 그는 그 죄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우리가 막을 수도 있었던 죄악 때문에 마치 우리 자신이 범행한 것과 같은 책임을 진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을 행한 자에게 친히 그 잘못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그 잘못을 우리들 사이에서 비평이나 비난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설혹 교회에 제출된 후일지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실수에 대한 정보는 믿지 않는 세상에게는 다만 장애의 원인이 될 뿐이며,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우리 자신들은 해만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시정하려고 할 때 그리스도의 영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그 자신의 형제들의 비난에서라도 그를 보호할 것이며 믿지 않는 세상의 비난에서는 더욱 그리하실 것이다. 우리들 자신도 실수하므로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유하심이 필요하다. 그분께서 우리를 대접해 주시기를 바라는 대로 우리도 피차간에 대접하라고 그분께서는 분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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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대는 하늘의 대사로서 행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의 사업의 결과는 영원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큰 책임을 홀로 지는 것은 아니다. 신실한 마음으로 말씀을 순종하는 곳에는 어느 곳이든지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함께 계신다. 교회의 회중에게 임재하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어느 곳이든지, 그 수가 비록 적을지라도 그 곳에도 계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함으로 인성으로는 제자들과 연합하여 그들의 시련에 동참하며 그들의 고난을 동정하셨고, 신성으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보좌와 연결되어 있음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셨다. 얼마나 놀라운 보증인가! 하늘의 천사들은 사람들과 연합하여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자에게 동조하고 그를 위하여 활동한다. 그리고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함에 있어서 하늘의 모든 능력은 인간의 능력과 연합하기 위하여 임한다.

시대의 소망 pp. 438-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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