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장 십자가의 예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업은 마지막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분의 걸음이 그리로 향하여 가고 있는 장면들이 그분 앞에 생생한 윤곽으로 나타났다. 그분은 인성을 취하시기 전에도 이미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걸어가야 할 전 여정을 보셨다. 그분의 마음을 찌르는 심한 고통, 그분의 머리에 씌워진 모욕, 그분께서 견뎌야 했던 궁핍, 이 모든 것들이 그분이 왕관과 왕복을 벗어 던지고 신성을 인성으로 옷 입기 위하여 보좌에서 내려오시기 전에 이미 그분의 시야에 공개되었다. 말구유에서 시작하여 갈바리에 이르는 길이 모두 그분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분은 당신에게 임할 고통을 아셨다. 그분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7, 8)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명의 결과를 항상 미리 보셨다. 수고와 자아 희생으로 충만한 그분의 지상 생애는 이 모든 수고가 무익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으로 격려를 받았다. 그분은 인류의 생명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께 충성을 바치게 할 것이었다. 비록 피의 침례를 먼저 받으셔야 했고, 세상 죄가 그분의 흠 없는 영혼을 내리누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그림자가 그분에게 덮쳤지만, 그분은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기로 선택하고 치욕을 개의치 않으셨다.
그분 앞에 놓인 장면들이 그분의 공생애를 위하여 선택된 제자들에게는 아직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분의 고뇌를 보아야 할 때가 가까이 이르렀다. 그들은 저희가 사랑하고 신뢰하던 그분께서 원수의 손에 넘겨져 갈바리의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는 것을 보아야 하였다. 조만간 그분은 당신의 가시적 임재로 위로함이 없이 그들을 세상에 직면하도록 버려두실 수밖에 없었다. 그분께서는 저들이 얼마나 심한 증오와 불신으로 박해당할지를 알고 저희를 시련에 대비시키기를 원하셨다.
-411-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제 가이사랴 빌립보 근방에 있는 한 마을로 왔다. 그들은 갈릴리 지경을 넘어 우상숭배가 성행하는 지방으로 들어갔다. 이 곳에서 제자들은 유대교의 지배 세력에서 벗어나 이교의 예배와 더욱 밀접한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 주위에는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미신의 풍습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이러한 것들을 봄으로 이방인에 대한 저희의 책임을 느끼게 되기를 바라셨다. 이 지방에서 유하는 동안 그분께서는 백성들을 가르치는 일에서 물러나 더욱 전적으로 제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려고 힘쓰셨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기다리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실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먼저 홀로 떠나가서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로 돌아간 후에도 나눠주기를 원하는 것을 즉시로 전달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하기 전에 그분께서는 장차 임할 시련을 견딜힘을 얻을 수 있도록 당신께 대한 저희의 믿음을 고백할 기회를 주셨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슬프게도 제자들은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시인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이적을 보고 그분이 다윗의 아들임을 진심으로 선언하였다. 벳새다에서 양식을 먹은 군중은 그분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포하기를 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선지자로는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으나 그분이 메시야라고는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 자신에 관계되는 두 번째 질문을 하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처음부터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었다. 침례 요한의 전도로 확신을 얻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던 많은 다른 사람들은 요한이 투옥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요한의 사명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예수님이 과연 저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예수께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기를 열렬히 기대하였던 제자들 중 다수가 예수께 그런 의사가 전혀 없음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떠나가 버렸다. 그러나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저희의 충절을 버리지 않았다. 어제는 찬양하고 오늘은 저주한 자들의 흔들리는 행동이 구주의 참 제자의 믿음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왕의 영예가 주께 씌워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겸비함을 입으신 그분을 받아들였다.
-412-
베드로는 열두 제자의 믿음을 대변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반대와 오전(誤傳)이 저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돌이키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아직도 그들을 크게 혼란케 하였다. 그들은 저희의 길을 분명히 보지 못하였다. 그들이 일찍이 받은 훈련의 감화, 랍비들의 교훈, 인습의 영향 등이 여전히 진리에 대한 저희의 견해를 가로막았다. 때때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귀중한 빛줄기가 그들을 비췄지만 자주 그들은 암중모색하는 사람들과 같았다. 그러나 믿음이 큰 시련에 부딪히기 전인 이 날에 성령께서 능력으로 그들에게 임하셨다. 잠시 동안 저희의 눈은 “보이는 것”에서 떠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후 4:18). 인성의 모습 이면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식별하였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진리는 신자의 신앙의 기초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영생이라고 선언하신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 지식을 소유하였다고 하여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 진리는 결코 자신의 지혜나 우수함으로 말미암아 베드로에게 계시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하늘의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 11:8). 오직 양자의 영께서만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수 있으시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 10).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시 25:14)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식별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았다는 증거였다(요 6:45). 아! 참으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예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라고 하는 말은 돌, 곧 구르는 돌을 뜻한다. 베드로는 교회의 터가 세워진 반석은 아니었다. 그가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주님을 부인하였을 때 음부의 권세는 그를 이겼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분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다.
-413-
구주께서 초림하시기 여러 세기 전에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의 반석을 가리켰다. 시편 기자는 “내 힘의 반석”에 대해 노래하였다. 이사야는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고 기록하였다(신 32:4; 시 62:7; 사 28:16). 베드로 자신도 영감을 받아 기록하는 중에 이 예언을 예수께 적용시키고 있다. 그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3~5)라고 말하였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예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모든 하늘 거민들 앞에서, 또 보이지 않는 음부의 군대 앞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산 반석 위에 세우셨다. 그 반석은 예수님 자신 곧 우리를 위하여 찢기고 상함을 받으신 그분의 몸을 의미한다. 음부의 권세가 이 터 위에 세워진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당시의 교회는 얼마나 연약해 보였던가! 소수의 신자밖에 없었으며 마귀와 악인들의 모든 세력이 그들을 대적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말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능력의 반석 위에 세워졌으므로 넘어질 수 없었다.
육천 년 동안 믿음은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왔다. 육천 년 동안 사단의 분노의 홍수와 태풍이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쳤으나 그것은 요동하지 않고 서 있다.
베드로가 교회의 믿음의 기초가 되는 진리를 나타냈으므로 예수께서는 신자들의 전체 대표자로서 그를 높이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천국 열쇠”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모든 성경 말씀은 그분의 말씀으로서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 말씀은 하늘을 열고 닫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말씀은 사람들이 가납되느냐 혹은 거절당하느냐를 결정짓는 조건들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의 사업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되거나 또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 그들의 사업은 영원한 결과가 달려 있는 사명이다.
-414-
구주께서는 복음 사업을 개인적으로 베드로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나중에 베드로에게 했던 말씀을 반복하면서 그분께서는 그 말씀을 직접 교회에 적용시키셨다. 그리고 대체로 같은 말씀을 신자들의 전체 대표자인 열두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만일 예수께서 제자들 중 하나를 다른 제자들보다 높여서 그에게 어떤 특별한 권위를 위임하셨다면 우리는 그들이 누가 가장 크냐고 자주 다투는 것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저희 선생의 소원대로 복종하였을 것이요 그분께서 선택하신 자를 공경하였을 것이다.
한 명을 지정하여 머리로 삼는 대신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8, 10)고 말씀하셨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만물을 구주의 발아래 두신 하나님께서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전 11:3; 엡 1:22, 23). 교회는 그 기초인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으므로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에 의존하거나 사람에 의하여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책임 있는 지위는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믿거나 행하는 바를 명령할 권위를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구주께서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언명하신다. 사람은 다 시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실수하기 쉽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에게 지도를 위촉할 수 없다. 믿음의 반석은 교회에 계신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임재이다. 가장 연약한 자도 이것을 의지할 수 있으며, 자신을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라도 그리스도를 그들의 능력으로 삼지 않는 한 가장 약한 자임을 드러낼 것이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는)…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주께서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렘 17:5; 신 32:4; 시 2:12).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은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이 분부를 내리신 까닭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결정적인 반대 때문이었다. 이보다 더 큰 이유는, 백성들과 심지어 제자들까지라도 메시야에 대하여 매우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분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공표를 한다면 그분의 품성이나 사업에 대하여 그들에게 참된 개념을 심어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주로서 날마다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와 같이 함으로써 그분은 메시야로서 당신에 대한 참된 개념을 그들에게 보여 주기를 원하셨다.
-415-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임금으로서 통치하실 것을 여전히 기대하였다. 예수께서 매우 오랫동안 당신의 계획을 숨기셨을지라도 그들은 그분이 항상 빈곤하고 미천한 상태에 머물러 계시지 않을 것으로 믿었으니, 곧 그분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시기가 가까웠다고 믿었던 것이다. 제사장들과 랍비들의 증오심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을 것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민족에게 거절을 당하고 기만자로 정죄를 받아 악인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실 사실 등을 제자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러나 흑암의 세력의 때는 가까이 이르고 있었으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에 놓인 쟁투를 공개하셔야 하였다. 고난을 예상하였을 때 그분은 슬펐다.
이제까지 그분께서는 당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것을 일체 저들에게 알리지 않으셨다. 니고데모와 말씀하시는 중에 그분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15)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지 못하였으며 비록 들었을지라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분의 하시는 일을 봄으로 비록 그분의 주위 환경이 미천하고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간증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한 것에 동조할 수 있게까지 된 것이다. 이제 장래를 숨긴 휘장이 걷혀져야 할 시기가 왔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
슬픔과 놀라움으로 입을 다문 채 제자들은 귀를 기울였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시인을 받아들이셨는데, 이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을 하시니 이해할 수 없었다. 베드로는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그는 선생을 굳게 붙잡고 예수님을 마치 절박한 죽음에서 끌어내려는 것처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부르짖었다.
베드로는 그의 주님을 사랑하였으나 예수께서는 당신을 고난에서 막겠다는 욕망을 나타낸 베드로를 칭찬하지 않으셨다. 베드로의 말은 큰 고난을 앞두고 계신 예수께 도움과 위안이 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에 일치하지 않았으며, 예수께서 친히 모본을 보이심으로써 가르치러 오셨던 자아 희생의 교훈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업에서 십자가를 보고자 하지 않았다. 베드로의 말이 주는 인상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마음에 끼치기를 원하셨던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래서 구주께서는 당신의 입술에서 떨어진 책망 중에 가장 가혹한 책망의 말씀을 하시게 되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416-
”사단은 예수님을 낙심하게 하여 그분을 당신의 사명에서 돌아서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으며, 베드로는 그의 맹목적 사랑으로 유혹의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의 장본인은 악의 임금이었다. 그 충동적 호소의 이면에는 그의 교사(敎唆)가 있었다. 광야에서 사단은 굴욕과 희생의 길을 버리는 조건으로 세상의 통치권을 주겠다고 그리스도에게 제의하였다. 이제 사단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그 같은 시험을 제시하고 있었다. 사단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눈을 돌려 보게 하려고 하셨던 십자가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의 영광에 그의 시선을 집중시키도록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단은 베드로를 통하여 다시 예수께 유혹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당신의 제자를 염려하셨다. 사단은 그 제자의 마음이 자기를 위하여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굴욕을 보고도 감동을 받지 않도록 그의 선생과 베드로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베드로를 구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힘쓰고 있는 자에게 하신 것이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나와 나의 실수하는 종 사이에 더 이상 개입하지 말라. 내가 베드로와 직접 대면하여 나의 사랑의 오묘를 그에게 드러낼 수 있게 하라.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길이 고뇌와 비천으로 수 놓여졌다는 사실은 베드로에게 쓰라린 교훈이었고 그는 이 교훈을 느리게 깨달았다. 이 제자는 그의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풀무불의 열기 속에서 그는 그 축복을 배우게 될 것이었다. 오랜 후에 그의 활동적이던 몸이 연령과 수고로 굽어졌을 때 그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13)고 기록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제 당신의 희생의 생애가 제자들이 따라야 할 생애의 모본이 됨을 그들에게 설명하셨다.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사람들을 제자들과 함께 가까이 부르고 그분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로마의 세력을 연상시켰다. 십자가는 가장 잔인하고 굴욕적인 형태의 사형 기구였다. 가장 저열한 죄수는 사형 장소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종종 그들의 어깨에 십자가를 메게 할 때에는 굴복 당할 때까지 광포하게 항거하다가 마침내 그 고문의 기구가 그들에게 메워지곤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비록 희미하게 밖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가장 치욕적인 수욕,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까지 그들이 복종해야 할 것을 지적하신 것이었다. 이 말씀보다 더 완전한 자아 포기를 묘사한 말씀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 모든 것을 그들을 위하여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상태에 있을 동안에는 하늘을 계실만한 곳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비난과 모욕의 생애를, 그리고 치욕의 죽음을 당하기 위하여 하늘 궁정을 떠나셨다. 값을 헤아릴 수 없는 하늘 보화로 부요하던 그분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당신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
-417-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자신을,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내려진 사슬의 한 고리로서,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그분과 함께 행군하는, 자비의 경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자로 여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과, 품성으로 세상에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자기희생, 동정, 사랑이 하나님의 일꾼의 생애에서 재현(再現)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기심(利己心)은 곧 죽음이다. 신체의 어떤 기관도 그 활동을 그 자체에만 한정시킨다면 살 수 없다. 생명의 원동력을 손과 머리에 공급하지 못하는 심장은 그 능력을 속히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피처럼 그리스도의 사랑도 그분의 신비한 신체의 각 부분에 발산된다. 우리는 여러 지체 가운데 하나이니 주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멸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현재의 가난과 치욕을 넘어서, 세상 왕좌의 찬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늘의 천사들이 함께 할 당신의 영광스런 강림을 제자들에게 가리키셨다. 그러고 나서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 영광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눈은 빈곤과 치욕과 고난의 지상 생애, 곧 보다 가까운 광경에 집중되어 있었다. 메시야의 왕국에 대한 그들의 불타오르는 기대를 버려야만 하는가? 그들의 주께서 다윗의 왕좌에 오르시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께서 비천하고 집도 없는 방랑자의 생애를 살다가 멸시와 거절을 당하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시는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제자들은 저희 선생을 사랑하였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슬픔으로 압도되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와 같이 잔악한 치욕을 받으신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의심이 또한 저희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자원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기가 그 곳에서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대우를 당하셔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분께서 어떻게 그와 같은 운명에 자신을 맡기고, 그분이 친히 저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전에 저희가 방황하였던 것보다 더 캄캄한 흑암 중에 저들을 버리실 수가 있단 말인가?
-418-
제자들은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계시는 한, 그리스도께서 헤롯과 가야바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계신다고 생각하였다. 그분께서는 유대인의 증오나 로마의 세력을 조금도 두려워하실 것이 없었다. 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 곳에서 일하지 않으실까? 그분께서 어찌하여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실 필요가 있을까? 그분께서 죽으신다면 어떻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만큼 튼튼하게 그분의 나라를 세우실 수가 있을까?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일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신비였다.
그들은 마침내 갈릴리 해변을 따라서 그들의 모든 소망이 깨지게 될 성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 감히 묻지 않았으나 장래에 될 일에 대하여 낮고 슬픈 음조로 함께 논의하였다. 의심을 하면서도 그들은 어떤 예기치 않은 환경이 그들의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운명을 반전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엿새 동안의 길고 우울한 날들을 비탄과 의혹과 희망과 공포 가운데서 지냈다.
시대의 소망 pp. 410-418